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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고난주간] 두 가지 질문

20240325 청파교회 새벽설교

 

두 가지 질문

 

<요한복음 12장 1-8절> 

 

1.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가셨다. 그 곳은 예수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에 살리신 나사로가 사는 곳이다. 

2.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마르다는 시중을 들고 있었고, 나사로는 식탁에서 예수와 함께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 가운데 끼여 있었다. 

3. 그 때에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다.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다. 

4. 예수의 제자 가운데 하나이며 장차 예수를 넘겨줄 가룟 유다가 말하였다.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 

6.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그는 도둑이어서 돈자루를 맡아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것을 훔쳐내곤 하였기 때문이다.) 

7.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로 두어라. 그는 나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 

8.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고난주간의 색깔 

 

오늘은 고난주간 기도회 첫 번째 날입니다. 이 고난주간색으로 한번 표현해 본다면, 아마 검은색이 될 겁니다. 사실 검정은 다른 색을 더해도 검정이 됩니다. 검정그저 검정일 따름입니다. 그런데 검정에도 농도가 있다고 본다면, 금요일을 향해 가면서 검은색 농도는 점점 짙어질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달리 말해서, 예수님이 당하신 그 고난의 깊이점점 더 깊어진다는 말과도 같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고난주간 기도회의 첫날로써 어둠을 향해 나아가는 그 초입의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베다니로 향한 예수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말씀은 요한복음 12장입니다. 요한복음 12장베다니에서 일어난 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유월절이 오기 며칠 전이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유월절이 가까워 오자, 자신이 살던 동네를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11:55). 사람들이 일찍 떠난 것은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이동하느라 더럽혀진 몸을 깨끗이 하고, 지친 몸을 회복하는 시간을 갖기 위함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잘 아시는 대로) 이스라엘이집트를 탈출한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구약에서는 유월절을 기념하는 장소가 광야였다면, 신약으로 넘어와서는 예루살렘으로 장소가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유대 사람들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한 예수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계셨습니다(11:54). 그렇기에 예수님도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는 에브라임을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향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어찌 된 영문인지 예루살렘이 아닌 베다니라는 동네로 발걸음을 옮긴 것입니다. 시간이 남아서 그곳으로 간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곳을 가야만 할 이유가 있으셨습니다. 

 

예수의 행동, 마르다의 반응

 

그럼 우리는 먼저 베다니가 어떤 곳인지 알아봐야 합니다. 베다니에 대한 힌트는 오늘 읽은 본문 1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베다니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난 곳을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이러한 내용이 나옵니다. 나사로에게는 두 명의 누이가 있었습니다. 그녀들은 마르다와 마리아였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병든 나사로를 낫게 하기 위해서 예수에게로 사람을 보냅니다(11:3). 그런데 예수는 마치 이 상황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는 듯,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병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11:4). 

 

예수의 말이 뭔가 알쏭달쏭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하고 나서, 보였던 그의 행동은 더 아리송합니다. 예수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요청에 곧장 응답하지 않고, 원래 머물던 곳에서 이틀이나 더 머뭅니다. 결국 골든 타임을 놓쳐버린 나사로숨을 거두고 맙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의 행동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나사로가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자,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마치 이제 자신이 나설 때가 되었다는 듯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우리 친구 나사로는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11:11) 

 

마지막 희망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난 예수나사로가 잠든 곳으로 향했습니다. 정확히 말해서, 나사로가 죽어서 묻힌 곳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오신다는 소문을 들은 마르다도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사실 마르다는 제시간에 오지 않은 예수원망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녀는 속마음을 감춘 채, 예수께로 향합니다. 

 

드디어 예수마르다가 만납니다. 그녀는 예수의 얼굴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이 튀어나왔습니다. 만약 예수께서 제시간에 와주었다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며 그녀는 원망 섞인 말을 건넸습니다(11:21). 그러나 그녀는 예수에게 화풀이를 하기 위해 그를 찾아온 게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그 희망의 끈을 붙잡기 위해 예수께 온 것입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나는 주님께서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께서 다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 그녀는, 예수께서 (자신을 대신하여) 나사로를 살려달라고 주님께 간구해 주길 바랐습니다. 

 

예수의 슬픔

 

이어서 예수는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와 만납니다. 집에 있던 마리아는 예수께서 오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곧장 예수께로 향합니다. 그리고 (예수를 만난) 마리아언니 마르다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합니다.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11:32)라고 말입니다. 그녀들의 믿음참 대단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께서 이곳에 계셨다면, 죽음이 나사로를 비껴갔을 거라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 말을 하고 나자, 슬픔이 몰려왔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울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울자, 그곳에 있던 유대 사람들도 따라 울었습니다. 이별에서 오는 슬픔그곳을 가득 채운 것입니다. 그런데 저자 요한이러한 상황을 지켜본 예수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마리아가 우는 것과, 함께 따라온 유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마음이 비통하여 괴로워하셨다.”(11:33)라고 말입니다. 

 

안타까움, 분노

 

사실 이 대목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우리는 이 대목을 보며, 예수님의 뛰어난 공감력, 공감의 힘을 떠올립니다. 예수는 나사로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는 유가족을 봅니다. 그리고 그 가족과 함께 슬퍼하는 유대 사람들 또한 마주합니다. 예수는 슬픔에 가득 찬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비통함과 괴로움을 느낍니다. 우리는 흐름 상, 충분히 ‘예수께서 슬픔에 찬 이들에게 감정이입했다.’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슬픔그런 슬픔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와의 헤어짐에서 오는 그런 감정에 대한 슬픔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와 정반대에서 오는 비통함과 괴로움을 느꼈습니다. 사실 방금 읽어드린 “예수께서 마음이 비통하여 괴로워하셨다.”라는 말 안에는 ‘동요되다, 흥분되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는 슬픔에 잠긴 사람들에게 감정이입 됐던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헛된 기대, 왜곡된 기대를 갖고 있음을 아시고, 비통함과 괴로움을 느낀 것입니다. 이어서 등장하는 35절에도 눈물을 흘리신 예수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모습같은 맥락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는 공감에서 오는 눈물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적만을 바라는 헛된 기대’ 때문에 안타까움과 분노의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다시 살아난 나사로

 

예수는 나사로의 가족들과 함께, 나사로의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마르다에게 무덤을 막고 있는 돌옮겨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르다어리둥절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죽은 지가 나흘이 되어서, 벌써 냄새가 납니다.”(39) 마르다이미 부패해 버린 나사로의 시체를 굳이 꺼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는 다시 말씀하십니다. “마르다야,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리라고, 내게 네게 말하지 않았느냐?”(40) 마르다는 잠시 생각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자, 하나님의 아들’(27)이라고 이미 고백한 바가 있지만, 막상 그분이 구체적인 행동을 하려고 하자 쉽게 믿음이 흔들리고 말았습니다. 고백과 믿음 사이에 유격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잠시 자신의 마음을 살핀 마르다는 사람들에게 돌을 옮겨 달라고 부탁합니다. 이제 무덤의 문이 열렸습니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무엇을 하실지 숨죽여 지켜보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는 사람들이 다 들으라는 듯,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내 말을 들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내 말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해서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40) 예수속마음을 사람들에게 가감 없이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는 자신이 이 땅에 온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드러낸 것입니다. 

 

그러고는 큰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나사로는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죽은 지 사흘이나 지났습니다. 그런데 죽은 나사로무덤 밖으로 걸어 나온 것입니다. 사람들은 매우 놀랐습니다. 어떤 사람충격을 받았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깊은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저자 요한기적을 행한 예수를 보고, 그곳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45). 

 

베다니에 숨겨진 의미

 

결국 예수기적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이 기적행위사람들의 기대를 충족하기 위한 그런 기적행위는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죽은 나사로를 살린 이 이적행위를 통해, 자신의 무한한 능력을 드러내려고 한 것아닙니다. 예수의 행위 속에는 하나님의 뜻하신 바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사로에게 일어난 일을 통해 예수의 미래에 대해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께서 나사로에게 행한 이 사건을 통해, 앞으로 예수께 닥쳐올 죽음과 그리고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알게 됩니다. 예수께서 곧장 마르다와 마리아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던 이유를 말입니다. 예수는 기다려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는나사로의 죽음’이라는 통로가 필요했습니다. 이 말이 결코 ‘예수께서 나사로의 생명을 가볍게 여겼다.’라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는 나사로의 사건을 통해, 사람들 속에 있는 헛된 기대, 왜곡된 기대를 드러내고자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재단했습니다. 예수는 자신들이 기대하는 바그대로 이루어줘야 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는 눈먼 사람의 눈뜨게 하고, 죽은 사람다시 살리시는 기적을 행할 줄 알아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예수하나님의 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예수는 그저 기적만을 일으키는 ‘기적의 자판기’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는 기적을 행하셨지만, 사람들 속에 무엇이 있는지 드러내기 위해 머뭇거림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사로의 죽음부활을 통해, 예수께서 알리고자 한 것자신의 미래입니다. 예수는 나사로에게 행한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자신의 미래를 보았습니다. 그는 나사로의 죽음다시 살아난 사건곧 자신에게도 닥쳐올 일임을 아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는 나사로에게 행한 일을 통해, 자신에게 닥쳐올 죽음과 그리고 죽음 후에 부활을 드러내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의 기적대중들이 바라는 기적과는 다른 종류의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베다니바로 그런 곳입니다. 예수에게 닥쳐 올 미래간접 경험한 장소였던 것입니다. 

 

마르다와 나사로

 

이제 12장의 말씀입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예수에브라임에 계시다가 바로 이 베다니로 오셨습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해야 했던 그베다니로 향한 것입니다. 베다니에는 예수를 위한 잔치가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누가 이 잔치 자리를 마련했는지확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바로 예수를 위해 마련한 이 자리이미 등장한 바가 있는 몇몇의 사람들이 다시 등장합니다. 그들은 바로 마르다나사로입니다. 

 

먼저 마르다열심히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행여 잔치 자리에 먹을 것이 떨어질까 하여 열심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사로가 등장합니다. 나사로는 식탁에 앉아 있습니다. 그는 식탁에 둘러앉아서 예수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사로죽음에서 살아난 인물입니다. 그가 살아났다는 가장 큰 증거는 바로 먹는 행위를 통해 드러납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부활한 자신을 믿지 못하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24:41)라고 말입니다. 성경에서 먹는 행위는 중요합니다. 1. 식사하는 사람들이 서로 하나 되게 하는 중요한 수단이면서도 2. 사람의 생명이 유지되고 있음을 드러내는 하나의 징표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마리아 

 

이어서 세 번째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녀는 바로 마리아입니다. 그런데 뒤늦게 나타난 마리아의 등장사람들을 당혹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녀양손에 향유 한 근을 들고 왔습니다. ‘한 근’무게를 나타내는 단위인데, 로마법으로 계산해 봤을 때, 약 320g 정도가 됩니다. 그러니까 마리아가 들고 온나드 향유 한 근’대략 이 정도의 무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드 기름매우 고급 기름을 말합니다. 고급 향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드 기름’이라고 하는 것은 왕의 의자식탁에서 방향제로 쓰이기도 하였고(아 1:12) 또 신부의 아름다움을 묘사할 때 비유적으로 사용(아 4:13-14)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이런 고급 향유를 가져와서는 예수의 발에 전부 부은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의 머리털예수의 발을 닦아주었습니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의 제자 가운데 하나인 가룟 유다였습니다. 그는 값비싼 향유를 몽땅 쏟은 마리아를 꾸짖었습니다. 그가 마리아를 혼낸 이유나름 합리적이었습니다. 이 향유를 삼백-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 훨씬 좋지 않겠냐는 이유였습니다. 삼백-데나리온노동자의 일 년 품삯에 해당됩니다. 그러니까 마리아가 부은 향유의 값어치대략 노동자의 1년 치 연봉에 가까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도 기록하고 있듯이 그의 진심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유다에게 있어서 중요한 가치는 바로 돈, 물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한 말가만히 듣고 있던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대로 두어라. 그는 나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7-8) 오늘 이야기예수의 심오한 한 마디 말로 끝이 납니다. 

 

선택과 집중 

 

오늘 우리가 나눈 요한복음 12장 1-8절의 말씀사실 좀 난해합니다. 마리아의 우발적인 행동예수의 답변이 무엇을 뜻하는지 쉽게 와닿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마리아의 위대함그녀의 시선에 있습니다. 마리아보이는 것 너머의 것보았습니다. 그녀는 알았습니다. 예수께서 가실 길그녀는 미리 내다보았습니다. 예수께서 가실 길종착역바로 부활입니다. 그러나 부활을 맞이하기 전에 예수는 죽음을 먼저 통과해야 했습니다. (1) 그래서 마리아는 안 것입니다. 예수에게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녀가 고가의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부은 것예수를 위한 장사를 미리 치른 것입니다. 예수의 장례미리 앞당겨한 것입니다. (2) 그녀는 또한 알았습니다. 자기 곁에 예수께서 항상 계실 수 없음을 말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곧장 행해야 했습니다.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예수그녀는 추모해야 했습니다. 마리아무엇이 중요한지 선택했고, 그 일에 집중했습니다. 

 

사실 ‘마르다와 마리아’ 일화요한복음에만 등장하지 않습니다. 공관복음서에도 등장합니다. 그 가운데 누가복음에만 등장하는 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 일화에도 마리아무엇이 중요한지 집중하고, 선택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눅10:38-42). 

 

예수께서 길을 걷다가 마르다의 집초대받습니다. 마르다에게는 마리아라는 여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예수님이 오시자마자 그의 곁에 자리를 잡고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를 초대한 마르다예수께 뭔가를 대접하기 위해 혼자 분주합니다. 그러자 마르다갑자기 억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해, 동생보고 언니를 좀 도우라고 말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조금은 서운한 말씀을 하십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41-4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의 이 이야기제자 됨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분주함내려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방금 읽어드린 대로) “많지 않거나, 하나뿐”그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에 집중할지를 고민해봐야 합니다

 

두 가지 질문

 

오늘 우리는 고난주간 첫 번째 저녁을 맞았습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하십니다. 유대 사람들은 예수에게서 헛된 기대를 했습니다. 그분을 통해 기적만을 바랐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예수를 늘 재단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묻고 계십니다. 나에게 어떤 기대를 갖고 있는지 그리고 그 기대가 나의 뜻과 하나가 되었는지를 묻고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또한 물으십니다. 삶의 분주함눈앞의 현실 때문에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물으십니다. 그리고 당장에 처리해야 할 일들 때문에 친절히 맞이해야 할 사람들외면하고 있는 건 아닌지를 묻고 계십니다. 고난주간을 보내는 동안, 우리의 뜻주님의 뜻에 잘 조율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 곁에 있는 이들을 사랑으로 환대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살롱(salon)에서 성경에 담긴 생명과 평화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with 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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