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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시편 (28)] 하나님 알아가기

20240411 청파교회 새벽설교

 

하나님 알아가기

 

<시편 139편 23-24절> 

 

23. 하나님, 나를 샅샅이 살펴보시고, 내 마음을 알아주십시오. 나를 철저히 시험해 보시고, 내가 걱정하는 바를 알아주십시오. 

24. 내가 나쁜 길을 가지나 않는지 나를 살펴보시고, 영원한 길로 나를 인도하여 주십시오.

 

 

시인의 사정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은 시편 139편입니다. 시편 139편은 여느 시들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크고 높으심을 찬양합니다. 그래서 시인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훤히 아는 분이자 어느 곳에나 계신 분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또 주님은 얼마나 오묘하고 섬세하신지 시인이 하려는 모든 행동과 생각, 하고자 하는 말까지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시인은 크고 높으신 주님께 깊이 심취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분위기가 계속되나 싶더니, 후반부에 들어서자 갑자기 분위기가 반전됩니다. 갑자기 시인은 주님을 비방하는 자들을 죽여달라고 요청합니다. 알고 보니 오늘의 시인은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 때문에 고통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오늘의 시를 짓게 된 동기는 기쁨보다는 바로 이 고통에 있었습니다. 그럼 이제 시인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며,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통해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고 고백하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무소부지(無所不至)의 하나님

 

먼저 1-6절에서 시인은 말합니다. 그는 주님께서는 시인 자신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음을 고백합니다. 주님은 자신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길을 갈 때나 누울 때도 아시며, 무엇보다 자신의 생각조차 아신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이 대목을 읽으며, 주님의 놀라운 능력을 떠올리게 됩니다. 시인의 고백을 들어보겠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나를 샅샅이 살펴보셨으니, 나를 환히 알고 계십니다. 내가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주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멀리서도 내 생각을 다 알고 계십니다. 내가 길을 가거나 누워 있거나, 주님께서는 다 살피고 계시니, 내 모든 행실을 다 알고 계십니다.” (1-3) 

 

우리는 하나님을 묘사할 때, 종종 이런 표현들을 쓰곤 합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 무소부재한 하나님, 무소부지의 하나님이라는 표현말입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불가능한 것이 없는 하나님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리고 무소부재한 하나님바로 어느 곳에나 계신 하나님을 뜻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소부지한 하나님모르는 게 없는 하나님을 뜻합니다. 우리는 방금 읽은 말씀을 통해, 바로 이 무소부지의 하나님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시인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다 아시는 분으로 등장합니다. 그야말로 주님은 빈틈이 없으십니다

 

무소부재(無所不在)의 하나님

 

이어서 7-12절에서 시인은 말합니다. 시인은 주님은 어디에나 계신다고 고백합니다. 바로 이 하나님무소부재의 하나님입니다. 무소부재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없다는 뜻이자 하나님의 섭리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는 뜻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시인의 음성을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내가 주님의 영을 피해서 어디로 가며, 주님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 내가 하늘로 올라가더라도 주님께서는 거기에 계시고, 스올에다 자리를 펴더라도 주님은 거기에도 계십니다.” (7-8) 

 

시인은 주님의 영늘 자신을 쫓아다닌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시인에게 있어서 주님은 자신을 감시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주님은 시인을 지키는 보호자였습니다. 시인은 한 가지 예를 듭니다. 시인은 주님의 보호 아래에 있기 때문에 만약 어둠이 자신을 덮칠지라도 어둠이 자신을 비껴나갈 것을 확신합니다. 어둠은 결코 빛이신 주님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에게 있어서 주님은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동행이자 인도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전지전능(全知全能)의 하나님

 

이어서 시인은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나머지 하나인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13-18절의 시인의 고백을 들어보면, 자신이 이 땅에 존재하기 전까지 내려갑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주님께서 내 장기를 창조하시고, 내 모태에서 나를 짜 맞추셨습니다. (...) 은밀한 곳에서 나를 지으셨고, 땅 속 깊은 곳 같은 저 모태에서 나를 조립하셨으니 내 뼈 하나하나도, 주님 앞에서는 숨길 수 없습니다. 나의 형질이 갖추어지기도 전부터, 주님께서는 나를 보고 계셨으며, 나에게 정하여진 날들이 아직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주님의 책에 다 기록되었습니다.” (13-16) 

 

시인은 자신의 모든 것이 이미 주님의 책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어머니 뱃속에 있기 전부터 하나님은 자신을 바라보고 계셨고, 어머니의 배를 통해 자신을 만드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이 땅에서의 삶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모두 주님의 계획도움 때문에 가능한 일임은 시인은 기억하고 있던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생각하며, 자신의 탄생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그 탄생의 시작점바로 주님이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인간의 창조와 탄생을 주관하신 주님은 그야말로 전지전능의 하나님이 분명합니다

 

시인의 고통

 

그러나 이러한 감격의 분위기도 19절 이후에 급격히 변하게 됩니다. 말씀드린 대로, 시인이 오늘의 시편을 기록하게 된 동기바로 이 19절 이후의 상황 때문입니다. 시인은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오해를 받고 억울한 일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위협하는 자들주님께 대항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시인은 자신이 당한 직접적인 고통자신의 주인이신 주님이 당하신 모욕 때문에 중복의 고통을 받고 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합니다. 그는 결코 자신이 주님 앞에 저지른 잘못이 있어서 이러한 일을 당한 것이 아님을 호소합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하나님, 나를 샅샅이 살펴보시고, 내 마음을 알아주십시오. 나를 철저히 시험해 보시고, 내가 걱정하는 바를 알아주십시오.” (23) 시인은 자신이 결코 주님을 등지거나 악한 길에 들어서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자신의 진심을 아신다면, 주님께서 자신을 악인들로부터 받는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시인이 주님을 높여드리고 찬양을 드린 이유자신의 무흠을 증명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무소부지하시고, 무소부재하시며, 전지전능하십니다. 시인은 바로 이러한 주님의 속성들을 인정함으로 자신의 흠 없음을 알아달라고 요청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경험, 우리의 경험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눈 시편 139편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하나님의 속성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들은 사실 객관화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면 오늘 시에 등장한 하나님의 속성모두 시인의 주관적인 경험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어둠의 시간을 통과해 오면서 하나님에게서 이러한 모습들을 보았던 것입니다. 경험은 무척 중요합니다.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군가가 한 이야기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러나 또한 자기 개인의 경험만앞세워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다른 이들이 경험한 것들을 모두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자신에게 주어진 자기 삶의 몫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편협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이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창구가 필요합니다. 아마 다른 이들과의 만남이나 대화 또는 독서여행그러한 창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만남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나의 경험만을 앞세우지 말되, 서로의 경험을 나누며 하나님을 알아가는 그런 신앙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살롱(salon)에서 성경에 담긴 생명과 평화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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