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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성서학당] 사랑한다면 투쟁하라: 야곱

20190925 청파교회 수요 성서학당

사랑한다면 투쟁하라: 야곱


안녕하세요. 지난 주일 오후 성서학당 때, ‘이삭’에 관해 이야기 나눴었습니다. 주일 오후에 뵌 분들이 한두 분 있으신데, 그래도 ‘이삭’에 관해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어서 잠시 말씀을 드리고 오늘 인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부모님께 사랑받는 아들, 딸이셨나요? 아니면 현재 나의 아들, 딸을 골고루 사랑하고 있는지요? 이상하게 밉지 않은 자식이 있고 또 이상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 자식도 있을 겁니다. 

이삭과 두 아들: 에서와 야곱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에서와 야곱입니다. 이들의 어머니는 누구였죠? 이삭의 부인? 리브가(레베카)입니다. ‘이삭’과 ‘에서’ 사이에 나온 이 두 형제는 쌍둥이입니다. ‘에서’가 먼저 엄마 뱃속에서 나왔고, 그의 발꿈치를 붙잡고 ‘야곱’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이름의 뜻이 ‘발꿈치, 발뒤꿈치를 잡은 자’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데 혹시 ‘에서’의 생김새가 어떤지 기억나시는 분 있으신가요? 피부가 붉고 온몸이 털투성이였다(25)고 했습니다. 해당 본문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창세기 25장 24-26절입니다. 

“달이 차서, 몸을 풀 때가 되었다. 태 안에는 쌍둥이가 들어 있었다. 먼저 나온 아이는 살결이 붉은 데다가 온몸이 털투성이어서, 이름을 에서라고 하였다. 이어서 동생이 나오는데, 그의 손이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있어서, 이름을 야곱이라고 하였다. 리브가가 이 쌍둥이를 낳았을 때에, 이삭의 나이는 예순 살이었다.” 

‘에서’의 외모가 어떤지 느낌이 오시나요? 뭔가 ‘야생 동물’의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그는 성장해 가며, ‘들판의 남자, 사냥꾼’이 됩니다. 그에 반해 ‘야곱’은 어떤가요? 야곱은 주로 집에만 머뭅니다. 요즘 말로 야곱은 ‘홈-보이(Home-Boy)’입니다. 에서에 비해 야곱은 훨씬 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부모님의 그림자 상(相)

그런데 참 신비한 건,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심이 정확히 반으로 나뉜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 이삭은 이 두 형제 중에 누굴 더 사랑했을까요? ‘에서’입니다. 그리고 어머니 리브가는 누굴 더 아끼고 사랑했을까요? ‘야곱’입니다.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이삭은 ‘에서’가 사냥해 온 고기를 좋아해서 사랑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 조금만 면밀하게 들여다보면, 이삭이 ‘에서’를 사랑한 이유는 이삭의 ‘그림자’ 투영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림자’가 뭔가 싶으실 텐데요. ‘그림자’는 심리학자 ‘칼 융(C.C Jung)’의 이론에 나오는 용어입니다. ‘그림자’ 하면 어떤 생각부터 떠오르시나요? ‘그림자’는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내 안에 있는 ‘어두운 부분’을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를 불편하게 하거나 내가 두려워하는 어떤 부분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는데요. 내 안에 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어떤 부분을 가리킨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혹시 여러분께서는 괜히 싫은 사람 없습니까? 왜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괜히 그 사람이 어떤 말을 하거나 어떤 행동을 하면 꼴도 보기 싫은 그런 사람 말입니다. 아니면 TV를 보다가 괜히 보기 싫은 배우나 개그맨이 있지 않나요? 저희 어머니는 그 두 사람을 별로 안 좋아하십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면, 김구라와 서장훈입니다. 명절이나 휴가 때, 고향에 내려가 TV를 보다 보면, 제가 가끔 ‘라디오스타’나 ‘아는 형님’을 트는데, 저 사람들 보기 싫다고 넘기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사람 없으십니까? 제가 아는 상담하시는 한 여성분은 지나치게 ‘여자-여자’한 여성을 싫어했습니다. 그분은 나름 씩씩하고 솔직한 편이시고 또 애교가 있거나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그런 분은 아니셨습니다. 근데 그분은 자신이 왜 ‘여자-여자’한 사람을 불편해하는지 알고 계셨습니다. 내 안에도 그 여성들처럼 행동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데, 많은 부분에서 억제하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계셨습니다. 

아마 저희 어머님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입니다. 평소 저희 어머니는 자신의 불편한 감정이나 생각을 잘 표현하는 분이 아니셨고, 대부분 많은 것을 인내하고 참고 지낸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김구라와 서장훈은 TV에서 어떻게 등장합니까? ‘돌직구형’이죠. 그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편입니다. 어머님 안에서 그렇게 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는데, 그걸 계속해서 참고 살아오셨고, 그러다 보니 자유롭게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을 보면 괜히 싫고 짜증이 나는 걸 느끼신 게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단편적인 예이었긴 하나, ‘그림자’란 이처럼 내 안에 있는 어떤 욕구나 본능이지만, 억누르고 살거나 회피해서 갖게 된 하나의 ‘감춰진 욕구’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아버지 그림자 ‘에서’, 어머니 그림자 ‘야곱’

이삭에게도 당연히 ‘그림자’가 있었습니다. 첫째 아들 ‘에서’는 이삭의 어두운 면을 반영한 아들이었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삭은 아들에게 자신의 그림자를 투영해서 보았습니다. ‘이삭의 그림자’는 자신은 살아보지 못했던 삶 즉, 야생적이고,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하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강하며 투쟁적이었던 ‘에서’를 사랑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의 ‘그림자’는 상대를 비난하는 방식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가족과 같은 혈연의 관계에서는 애정의 방식으로 변환되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에서’는 ‘이삭’의 사랑과 관심을 받기에 충분한 자질을 갖췄습니다. 

그에 비해, 어머니 리브가는 어땠습니까? 영리하고 지적인 아들 ‘야곱’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녀는 야곱을 사랑함으로써 그의 덕을 좀 보았습니다. 그녀는 남편 이삭에게 자기 생각을 관철시키는데 아들 야곱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가 되어가는 야곱

여기까지가 대략 ‘이삭과 리브가’ 그리고 두 아들 ‘에서와 야곱’에 관한 배경입니다.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둔 채, 다음 인물에 관해 알아볼 예정입니다. 다시 한번 드리는 말씀이지만, 이 시간은 성경 인물들의 내면을 통해 ‘자기 자신’과 ‘자기를 둘러싼 환경’을 돌아보는 그런 시간으로 삼으시면 좋을 듯합니다. 

오늘은 ‘야곱’에 관해 알아볼 건데, 포인트는 여기에 있습니다. ‘야곱’이 어떻게 어른이 되어 가는지, 어떻게 성숙해져 가며 또 아버지가 되어가는지에 중점을 맞춰보려 합니다. 먼저 그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홈-보이(Home-boy)였습니다. 홈-보이 아시죠? 집에만 있는 사람! 야곱은 활동적인 사람이 아니라 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가 처음 성경에 등장했을 때는 어머님의 그늘 아래 살던 ‘유약한 사람’으로 그려졌습니다. 

그런데 그 또한 머지않아 자신의 ‘그림자’와 대면하게 됩니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자기 내면의 ‘어두운 부분’과 마주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홀로 살아갈 수 없기에 그런데요. 어쨌든 야곱은 먼저 형 에서의 위협을 알아채고 도망을 칩니다. 그로 인해, 야곱은 어머니와 자연스레 떨어지게 됩니다. ‘안셀름 그륀’은 이 대목을 보고, 야곱이 자신의 그림자를 대면하지 않고 회피하는 장면으로 보았습니다. 사실 대부분 사람은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일을 만나면 어떻게 합니까? 정면으로 맞서기보다, 한 발자국 물러나는 편을 택합니다. 불편한 것을 외면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기본적인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마주한 그림자: 축복

그런데 참 재밌는 건, 이렇게 어머니를 떠나고 형을 피해 달아나는 야곱의 행보가 자기 자신을 직면하는 계기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은 도망을 가다가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합니다. 그는 먼저 어떤 일을 겪게 되나요? 외삼촌이 계신 ‘밧단아람’이라는 곳으로 향하던 야곱은 '베델(루스, 창 28:19)'이라는 곳에서 잠이 듭니다. 그곳에서 꿈을 꾸게 되는데, 그 꿈은 ‘층계 꿈’이었습니다. 계단 꿈 말입니다. 그 층계의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었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습니다(창 28:12). 그때 하나님께서 나타나 그에게 약속을 건네시죠. 그 대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며, 내가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 (창 28:15) 

야곱은 처음으로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어쩌면 이 부분이 야곱이 만난 ‘자신의 무의식’이었을 수 있는데요. 그런데 이 무의식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그 이상의 무엇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한 야곱은 그가 성장하는 가장 첫 단계가 됩니다. 이제 그는 삶의 성공이 자신의 ‘의지와 지혜로움’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축복)’에 있음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저는 이 과정이 우리 모두에게도 매우 중요한 과정이라고 생각됩니다. 여러분께서는 이런 하나님의 경험이 있으십니까?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신다는 경험? 사실 저도 이 정도의 강렬한 경험은 없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잘 받아주고 잘 수용하는 편이신가요? 내가 잘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칭찬하고, 나의 부족함과 내 실수에 관해서는 지나치게 매질을 하지 않는 것, 이런 거 잘하고 있나요? 야곱의 무의식은 ‘내 것이 분명한데, 내가 알아 차리 못한 부분’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제가 정말 중요한 ‘신앙생활 팁(Tip)’ 하나를 드릴까 하는데, 그게 뭐냐면 ‘나 자신과 화해를 잘 이룬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훨씬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이런 말 가끔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미 용서한 나를, 내가 용서하지 못하는 것도 죄다. 이런 말? 이게 다 이런 맥락과 연결 지어 볼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표현하는 여러 방식 중에 이런 방식이 있죠. 하나님은 ‘절대적인 타자’이다. 내 밖에서 나를 바라보는 절대적인 대상! 근데 이 타자가 하는 역할이 뭘까요? 나를 심판하고 정죄하기 위해 있는 대상을 말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적 타자’라고 하는 것은 외부의 시선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해주는 대상을 칭합니다. 

그러니까 ‘절대적 타자’인 ‘하나님’은 내가 누구인지를 더 잘 드러내 보여주는 분이시고, 그렇기에 그분의 존재를 가까이 두는 것은 우리에게 불편한 일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더 자세히 이야기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야곱이 대면한 그림자: 두려움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야곱의 외삼촌 이름이 뭐였죠? ‘라반’입니다.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20년 동안(창31:41) 일하고 나서, 두 아내(첫째: 레아, 둘째: 라헬)와 아들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때 형 ‘에서’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이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형과의 대면은 피할 수 없게 됩니다. 그는 여전히 형 에서에게 죄책감이 있었고 그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화해를 위해 그가 한 첫 번째 행동은 무엇이었습니까? ‘선물’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선물로 형의 화를 풀어보려고 했던 것이죠. 그런데 그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형과의 화해를 위해 자신이 하려던 어떤 물리적인 노력이 허물어지고 나자, 야곱이 경험한 것은 무엇이었나요? 야곱은 아내와 아이들과 전 재산을 ‘얍복 나루’ 너머로 보내고 나서 홀로 남습니다. 

그때 누구를 만납니까? 정체 모를 남성과 만납니다. 갑자기 두 존재가 어떤 ‘씨름’이라는 싸움에 돌입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부분이 굉장히 재밌는데요. ‘안셀름 그륀’은 밤에 나타난 이 정체 모를 남성을 두고, ‘야곱의 그림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야곱은 더 이상 자신의 두려움을 회피해서는 안 됐습니다. 형에 대한 ‘죄책감’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그대로 직면하게 됩니다. 이것이 정체 모를 남성과 ‘싸움의 형태’로 나타난 것입니다. 야곱은 죽을 각오를 하고 자신의 그림자와 대면했습니다. 해당 본문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어떤 이가 나타나 야곱을 붙잡고 동이 틀 때까지 씨름을 하였다. 그는 도저히 야곱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다. 야곱은 그와 씨름을 하다가 엉덩이뼈를 다쳤다. 그가, 날이 새려고 하니 놓아 달라고 하였지만, 야곱은 자기에게 축복해 주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그가 야곱에게 물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 대답하였다. "야곱입니다.” (창 32:24-27) 

평소 야곱은 갈등과 두려움이 있으면 회피하고 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진실과 대면하게 됩니다. 그는 투쟁을 피하지 않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처음에는 그토록 적대적이었던 정체 모를 그 남성에게 결국 ‘축복’까지 받게 됩니다. 이 축복으로 인해, 두려움 없이 형 ‘에서’를 만날 수 있게 됩니다. 

삶이란 투쟁이다

여러분께서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뭘 말하려고 하는지 감이 좀 오시나요? 자기를 돌아보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행위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양한 경험과 반복된 성찰이 필요해서 시간이 많이 듭니다. 

요즘 여러분의 삶은 어떠신가요? 신경 쓰이는 일이 있으십니까?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신경 쓰이는 일이나 고민이 없던 때가 있었나를 말입니다. 사실 삶이란 ‘잠깐의 기쁨’과 ‘계속된 고민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렇게 고민과 스트레스가 많은 삶이 즐겁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받아들이면 됩니다. 자꾸 다른 곳으로, 더 좋은 곳이 있다고 여기며 고통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란 원래 쉬운 것이 아님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런 마음을 갖기 쉽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런 걸 깨닫게 됩니다. ‘삶’이란 원래부터 ‘투쟁’이라서, 부딪쳐야 할 때 제대로 부딪치지 않고, 뭔가를 느껴야 할 때 제대로 느끼지 않으면, 삶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고 말입니다. 사람이 성숙해짐에 있어서 지름길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른이 되는 빠르고 신속한 길이 있다면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후하게 쳐 드리겠습니다. 

사람은 깨지거나, 떨어지거나, 고통을 겪지 않으면 뭔가를 깨닫기 굉장히 어려운 존재입니다. 사람은 어른이 되는 과정에 있어서 반드시 ‘자신의 그림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림자를 만나는 일은 결코 유쾌할 수 없는데, 그림자를 만나 싸우게 될 때도 그 결과 또한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야곱’도 결국 패배하게 되죠. 그러나 그 정체 모를 남성은 자신을 ‘하나님의 천사’라고 밝히고, 마침내 야곱을 축복하여 그에게 새로운 이름을 부여해 줍니다. 그 이름이 무엇이었나요? “이스라엘”입니다. “야곱”이 이름 뜻이 뭔지 아시나요? ‘속이는 자’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이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투사’라고 불리게 된 것이죠. 

그림자와 마주하지 않으면

그런데 야곱은 이 그림자를 대면할 때, 다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와 싸우다 야곱은 어딜 다치게 되나요? ‘엉덩이뼈’를 다치게 됩니다. 그로 인해 그는 다리를 절게 되죠. 그 때문에 그는 더 천천히, 더 조심스럽게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고 싶은 것 모두를 하며 살 순 없게 됩니다. 이를 받아들이는 과정도 필요합니다. 어쨌든 이로 인해, ‘야곱’은 이제 이스라엘 민족의 원조가 됩니다. 

사실 남성이나 여성 비슷할 텐데, 특히 남성에게 있어서 ‘자기 그림자’와 싸우지 않는 아버지는 ‘자신의 그림자’를 자녀들에게 투사하게 되기도 합니다. 아들의 경우, 아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이 계속해서 억압해 왔던 욕구와 열망을 통해 아들을 보게 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만약 아버지가 자신의 자녀에게서 ‘자신이 스스로 인정하지 못했던 것’, ‘스스로에게 금지해 왔던 것’을 보게 될 때, 어떻게 하냐면, 자녀의 모습 속에서 그러한 것들을 없애주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아들이 나와 성향이 다를 때, 그것을 인정해 주고 부추겨주기보단, 그러한 행동을 못 하도록 더 억압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안셀름 그륀’은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자녀의 삶을 도운 것이 아니라 죽음을 도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야기가 너무 무겁나요? 이런 게 있다고 가볍게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단호함과 용기

마지막으로 두 가지만 말씀드리고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그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주로 남성에게 해당하는 것이긴 하나, ‘인간에 대한 전반적 이해’에 대한 것이기에 우리 모두에게 해당한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안셀름 그륀’은 두 가지 태도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하나는 ‘단호함’이고 다른 하나는 ‘용기’라고 했습니다. 주로 아버지 혹은 남성은 어떤 상황들이 요구할 때 단호하게 ‘행동’ 해야 합니다. 어떤 문제나 갈등 상황이 생겼을 때, 이를 다른 사람에게 미루기보다 ‘결정’을 내릴 줄 알아야 합니다. 책임지고 결정을 내리는 인물이 갈수록 점점 더 부족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남성들을 자꾸 보기 힘들까 생각해 보니,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실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죠. 그런데 우리는 자꾸 ‘실수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뭔가를 결정하는 일마저 회피하게 됩니다. 실수를 두려워하면 어떠한 새로운 것도 등장하기 어렵습니다.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 ‘단호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아버지 혹은 남성은 뭔가 시시콜콜 따지거나 옹졸하게 행동하지 않아야 합니다. 특히 아버지의 마음은 넓을 필요가 있습니다. 용기 있는 아버지는 아이들이나 자기 자신을 따르는 사람을 믿어 줍니다. 우리 시대에는 이런 어른, 이런 아버지상이 너무도 필요합니다. 

마무리

오늘은 야곱과 그의 그림자에 관해 알아봤습니다. 나 자신을 알아간다는 것, 나를 있는 그대로 직면한다는 것은 늘 불편하고 어려운 법입니다. 그 여정 위에 하나님께서 함께 할 것입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살롱(salon)에서 성경에 담긴 생명과 평화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with 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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