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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성서학당] 사랑한다면 투쟁하라: 이삭

20190922 청파교회 주일 성서학당

사랑한다면 투쟁하라: 이삭

성경과 일상의 간극

안녕하세요. 오늘도 지난 번 성서학당에 이어, 성경인물에 관해 나눠볼까 합니다. 그런데 시작에 앞서 약간의 전제가 되는 이야기를 드릴까 하는데, 이 시간은 성경인물들이 이룬 업적이나 어떤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를 다루기보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의 내면에 더 집중해 볼 예정입니다. 그래서 약간은 어렵고 약간은 어색한 이야기로 들릴 수 있는데, 그래도 이야기를 잘 따라가다 보면 건질 수 있는 것들 한두 가지는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약간의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잘 아시겠지만, 성경에는 구체적인 묘사가 있는 반면에, 생략된 부분도 많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성경 이야기 속에 감춰져 있는 이야기들과 등장인물들의 마음의 변화를 조금씩 그려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어떤 이야기들은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어떤 말들은 꼭 나한테 하는 말 같게 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좀 가벼운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돌아보고 아니면 자신이 아주 잘하고 있는 것 같다고 느끼면 스스로를 잘 칭찬해주면 될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인가 싶으실 텐데, 어쨌든 마음의 불편함이 있더라도 좀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좋을 듯합니다. 

순례자 아브라함

오늘 함께 나눌 인물은 ‘이삭’입니다. 그런데 이삭을 나누기에 앞서, 그의 아버지에 관해 간단한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뭐 물론 아브라함에 대해 더 무슨 말이 필요 한가 싶으시겠지만 그래도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아브라함’은 어떤 인물입니까? 그는 누가 봐도 ‘순례자’ 같습니다. 그럼 순례자는 어떤 사람을 말할까요? 여러 정의가 있겠지만, 아마 ‘순례자’는 삶에 답이 감춰져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을 말 할 것입니다. 그래서 순례자는 답을 찾기 위해 ‘떠나는 자’이기도 합니다. 친숙한 것들, 익숙했던 것들에서 자꾸 거리 두는 연습을 합니다. 바로 아브라함이 그런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성경에 자주 ‘떠나는 자’로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번 이런 상상을 해볼 수 있습니다. ‘순례자’ 같은 이를 아버지로 둔 ‘아들’ 혹은 ‘자녀’는 어떨까 한 번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자녀들 입장에서 봤을 때, 자녀들은 ‘순례자’ 같은 아버지로 인해 ‘든든함’이 더 느껴질까요, 아니면 ‘부족함’이 더 느껴질까요? ‘순례자 유형의 사람’은 일상과 자주 거리두기를 하기 때문에, 자주 모험을 감행하거나 어떤 경계들을 넘나드는 행위를 할 겁니다. 

그렇기에 그런 사람을 부모로 둔 자녀들은 대게 어떤 ‘결핍감’이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이었던 이삭이 딱 그러합니다. 

① 다른 고향을 찾는 아들

‘아버지의 부재’ 즉, 아버지가 내 곁에 없다는 사실이 나에게 ‘다른 고향’을 갈망하게 만듭니다. 그의 아버지처럼 길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결핍과 부족함에 다른 것을 집어넣으려 합니다. 예를 들어, 규범이나 제도 또는 종교에 깊이 의존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것들에서 어렸을 때 결핍되었던 어떤 ‘유아적 욕망’을 충족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없는 남자’는 주로 어떤 남성에게 끌리게 될까요? 그는 자신이 알아채지 못하는 상태에서 뭔가 ‘기댈 수 있는 강함 남성’을 찾게 된다. 그런 경향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만약 ‘좋은 스승’을 만나면 자신의 길을 다시 잘 찾아가게 되겠지만, 그렇지 않고 의존하게 되어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보스, 대장 뒤만 졸졸 따라다니느라 자신을 잃게 될 겁니다. 이렇게 ‘위대한 정신의 부모’를 둔 자녀는 한편으론 어떤 결핍으로 인해 강력한 리더십을 찾아다닐 수도 있습니다. 

② 아버지와 틀어진 이삭

우리가 가만히 성경을 살펴보면, 성경에서 ‘이삭’은 ‘강한 남성’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는 나중에 등장할 그의 아들 ‘야곱’에 비해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말씀 드릴 이런 부분이 참 흥미로운데, 그가 좀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인물로 그려진 이유가 어쩌면  자신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 했던 아버지의 그 ‘숨은 공격성’으로 인해 큰 상처를 입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무슨 ‘공격성’인가 싶으실 텐데요. 이 부분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그 에피소드를 살펴봐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이 부분을 대게 ‘아브라함의 순종’으로 해석합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가톨릭 신부이자 작가인 ‘안셀름 그륀’은 이 부분을 아주 흥미롭게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한 이 부분을, 아브라함의 ‘잘못된 하나님 상(相)’, 뭔가 왜곡되고 뒤틀린 하나님의 이미지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 부분은 ‘분석심리학’적인 접근이긴 한데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에게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삭을 죽이기 직전까지 갑니다. 그때 뭐가 나타나죠? ‘천사’가 나타나 그를 가로 막고 숫양 한 마리를 건네줍니다. 바로 이 부분이 ‘아브라함의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라고 보기 보다는, 하나님에 관한 아브라함의 잘못된 ‘하나님 상’ 때문에 저지른 실수라고 그륀 신부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해석도 여러 성서해석 가운데 하나일 수 있는데, 저는 참 흥미로운 접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쨌든 이 상황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아들’을 없애려는 경향이 ‘아버지라는 존재’ 안에 담겨 있었음을 발견합니다. 

경쟁자 아버지와 아들

여러분, 여기에도 ‘아들’을 두신 부모님이나 지금 아들의 신분으로 계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방금 이야기를 통해, ‘아버지’가 때로 ‘아들’을 어떤 존재나 대상으로 느끼는지 감이 오십니까? 아버지는 아들을 ‘경쟁자’로 느낍니다. 주로 언제 그러냐면, 자신의 아내와의 관계에서 그렇습니다. 자신보다 아들에게 더 관심을 기울이는 아내와의 관계에서, 아들과 아버지는 어느 정도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부분이 공감이 되십니까?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테마는 ‘그리스 신화’에도 나옵니다. 세계를 지배하는 가장 힘센 거인 ‘크로노스’는 자신의 누이 ‘레아’를 아내로 맞아 여러 신들을 낳습니다. 우리가 한번 이상쯤은 들어본 이름일 겁니다. 제우스, 하데스, 포세이돈, 헤라 등을 낳습니다. 그런데 이 크로노스는 아들에게 왕위를 빼앗길 것이라는 예언을 두려워하여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어떻게 합니까? 잡아먹습니다. 

그런데 크로노스의 아내 ‘레아’는 ‘제우스’라는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그를 크로노스에게 넘기지 않고, 아기 대신 ‘포대기에 싸인 돌덩이’를 주어 살아남게 됩니다. 아들에게 권좌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시대를 초월해서 전해지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자립하기 어려운 아버지의 부재

다시 이삭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아마도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는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그 일 때문에 확실히 틀어졌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커다란 좌절과 실망을 안겨주는 일을 만나면 어떻게 되나요? 견딜만한 작은 좌절이 오면 저항이라도 할 텐데, 큰 좌절과 실망을 안게 되면 그 엄청난 절망감 때문에 마음이 상해 ‘자립’할 수 없게 됩니다. 스스로 설 힘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결정적으로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삶을 살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삭은 ‘자신의 정체성’ 즉,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건강하게 맺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어릴 때 버려진 경험을 한 남자들은 주로 ‘편협한 규범’에 매달리게 됩니다. 예를 들어, 변화를 두려워해 좀 ‘보수적’이 되거나 아니면 어떤 ‘분명하고 확실한 원칙’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자주 사람들과 충돌하게 되고 깊이 있는 대인관계를 맺기가 어려워집니다. 

③ 결혼: 어머니에게 고착된 이삭

성경을 보면 이삭은 머지않아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의 신부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리브가(레베카)입니다. 그런데 혹시 이삭이 그녀를 어떻게 만났는지 기억하시나요? 아브라함의 ‘늙은 종’을 시켜 알아보게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인은 이삭의 신붓감을 찾으러 떠났고, 리브가를 찾아서 데려오게 됩니다. 그리고 이삭과 리브가는 결혼에 골인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매우 재미난 부분이 있습니다. 창세기 24:67 이야기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이삭은 리브가를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그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이렇게 해서, 리브가는 이삭의 아내가 되었으며, 이삭은 그를 사랑하였다. 이삭은 어머니를 여의고 나서, 위로를 받았다.” 

“이삭은 어머니를 여의고 나서, 위로를 받았다.” 이 부분이 참 흥미롭습니다. 이삭은 리브가를 만나면서 마음의 큰 위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 구절로 미루어볼 때, 이삭은 어머니에게 매우 고착(옮겨지거나 변화되지 않고 같은 곳이나 일정한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되다)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치 이 구절을 보면, 그에게 리브가는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하는 존재로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 이렇게 남성이 어머님께 고착되어 있으면, 여성과 진정한 관계를 맺는데 있어 치명적인 걸림돌이 될 것입니다. 남성이 정서적으로 여전히 어머니 곁을 맴돌고 있으면, 여성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 여성은 그런 남성이 옆에 있을 때, 채움을 받는다는 느낌보다 계속된 결핍의 느낌을 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한번 생각해 보시면 되겠습니다. 

④ 이삭과 두 아들(에서와 야곱)

여러분,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누구였나요? 에서와 야곱입니다. 이 두 형제는 쌍둥이입니다. ‘에서’가 먼저 엄마 뱃속에서 나왔고, 그의 발꿈치를 붙잡고 ‘야곱’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이름의 뜻이 ‘발꿈치, 발뒤꿈치를 잡은 자’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데 혹시 ‘에서’의 생김새가 어떤지 기억나시는 분 있으신가요? 피부가 붉고 온몸이 털투성이였다(25)고 했습니다. 해당 본문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창세기 25장 24-26절입니다. 

“달이 차서, 몸을 풀 때가 되었다. 태 안에는 쌍둥이가 들어 있었다. 먼저 나온 아이는 살결이 붉은데다가 온몸이 털투성이어서, 이름을 에서라고 하였다. 이어서 동생이 나오는데, 그의 손이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있어서, 이름을 야곱이라고 하였다. 리브가가 이 쌍둥이를 낳았을 때에, 이삭의 나이는 예순 살이었다.” 

‘에서’의 외모가 어떤지 느낌이 오시나요? 뭔가 ‘야생 동물’의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그는 성장해 가며, ‘들판의 남자, 사냥꾼’이 됩니다. 그에 반해 ‘야곱’은 어떤가요? 야곱은 주로 집에만 머뭅니다. 요즘 말로 야곱은 ‘홈-보이(Home-Boy)’입니다. 에서에 비해 야곱은 훨씬 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참 신비한 건,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심이 정확히 반으로 나뉜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 이삭은 이 두 형제 중에 누굴 더 사랑했을까요? ‘에서’입니다. 그리고 어머니 리브가는 누굴 더 아끼고 사랑했을까요? ‘야곱’입니다. 성경에 그렇게 쓰여 있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며 믿을 순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나눈 이야기 맥락에서 보았을 때,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이삭이 사냥한 고기를 좋아해서 에서를 사랑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우리가 가만히 지켜보면, ‘에서’는 이삭의 ‘그림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림자’가 뭔가 싶으실 겁니다. ‘그림자’는 심리학자 융(Jung)의 이론에 나오는 용어인데요. ‘그림자’ 하면 어떤 생각부터 떠오르시나요? 우리 내부에 있는 ‘어두운 면’을 말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정신의 어두운 면’을 말하는데요. 

아버지 그림자 ‘에서’, 어머니 그림자 ‘야곱’

‘에서’는 바로 이렇게 아버지 이삭의 어두운 면을 반영한 아들이었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삭은 아들에게서 자신의 그림자를 보았습니다. 그의 그림자는, 자신은 살아보지 못했던 삶, 야생적이고, 불같이 화를 내고,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강하며 투쟁적이었던 ‘에서’를 사랑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에서는 이삭의 사랑과 관심을 받기에 충분한 자질을 갖췄습니다. 이삭 자신의 결핍을 아들 에서가 채워줬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어머니 리브가는 어땠습니까? 영리하고 지적인 아들 ‘야곱’을 더 사랑했습니다. 그녀는 야곱을 사랑함으로써 그가 가진 능력의 덕을 좀 보았습니다. 그녀는 남편 이삭에게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는데 아들 야곱을 이용하기도 한 것입니다. 

사실 이삭은 아내가 하자는 대로 거의 다 따랐던 인물입니다. 리브가는 이삭을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반전의 상황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흉년이 들어서 먹을 것이 떨어졌을 때, 이삭과 리브가는 ‘그랄’이라는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그곳에서 이삭은 자신의 아버지 아브라함과 똑같은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게 뭔지 아시나요? 그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26:7). 해당 부분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창세기 26장 1-7절입니다. 

“일찍이 아브라함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든 적이 있는데, 이삭 때에도 그 땅에 흉년이 들어서, 이삭이 그랄의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로 갔다. (생략) 이삭은 그랄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 곳 사람들이 이삭의 아내를 보고서, 그에게 물었다. "그 여인이 누구요?" 이삭이 대답하였다. "그는 나의 누이요." 이삭은 "그는 나의 아내요" 하고 말하기가 무서웠다. 이삭은, 리브가가 예쁜 여자이므로, 그 곳 사람들이 리브가를 빼앗으려고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삭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아내의 신분을 속인 것입니다. 사실 밖에서는 이삭이 리브가를 지배하는 듯하나, 집에서는 리브가가 더 힘이 있는 듯한 상황을 충분히 상상해봄 직합니다.  

마무리

여러분, 오늘은 성경의 인물 가운데 ‘이삭’에 관해 짧게 나눠봤습니다. 순례자로써의 아버지는 그의 자녀들에게 어떤 결핍감을 안겨주게 되고 또 아버지와 경쟁관계에 놓인 아들 이삭은 아버지와 관계가 틀어지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결혼을 통해 어머니에게 아직 고착되어 있는 아들 이삭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서와 야곱은 부모님의 그림자였음을 우리는 볼 수 있었습니다. 성경 인물들의 내면을 살핌을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었기를 바라봅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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