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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성서학당] 사랑한다면 투쟁하라: 아브라함

20190918 청파교회 수요 성서학당

사랑한다면 투쟁하라: 아브라함

 

첫 수요성서학당

안녕하세요. 이 8주는 제가 가진 지식을 여러분께 나눠드리는 모임이라기 보다, 제가 좋아하는 것을 여러분과 함께 고민해보는 시간으로 삼았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 8주라는 시간 동안 평소 제가 관심있어 하고 또 공부하고 싶었던 부분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이 <수요 성서학당>에는 참고도서가 있습니다. 제가 7월 성서학당 때 한번 말씀드린 바로 그 책입니다. 신부이자 작가인 ‘안셀름 그륀’이 쓴 <사랑한다면 투쟁하라>입니다.  

인간 이해를 시작으로

모든 책이 그렇듯 당연히 이 책에도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일단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심으로 쓰였다는 것인데, 특별히 ‘남성 인물들’ 중심으로 쓰였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그륀 신부는 성경의 남성 인물들이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또 성립해 가는지 그 길을 제시하기 위해 이 책을 썼습니다. 

제가 지난 성서학당 때도 드린 말씀이지만, 그럼 이 시간은 여성분들에게는 필요 없는 시간이냐? 당연히 그렇지 않죠.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적을 알아야 승리를 거둘 수 있죠. 남성과 여성은 서로를 알려고 열심히 노력해야 아주 조금, 서로 간의 평화를 맛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늘에서 떡하니 떨어지는 완전한 평화, 완전한 관계란 어디에도 없는 거 이미 다 아실 겁니다. 

하지만 제가 여러분과 더 집중해보고 싶은 것은, 어떤 ‘성별’에 국한된 이야기라기보다, ‘인간에 대한 전반적 이해’를 토대로,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나와 다른 타자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지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시간은 여러분들의 마음이 허락하는 한에서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나눠주시면 더욱 풍성한 시간이 될 것 같습니다. 

투쟁하는 사람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매주 수요일은 성경에 등장한 인물들이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그럼 우선, 제가 이 시간의 제목을 ‘성경 인물들의 투쟁과 사랑’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 제목 듣고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투쟁’하면 어떤 생각부터 드십니까? 혹시 투쟁하는 사람 혹은 자기 기준이 센 사람 만나보셨나요? 그런 분들은 세상이나 공동체에 공헌하는 바가 반드시 있습니다. 그런 분들로 인해, 세상이 조금씩 나아가지는 걸 우리는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나치게 우직한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편하게 이야기 나누는 중에도 뭔가 서로의 이야기가 수용되기보다 꼬치꼬치 따지거나 반박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물론 다 그렇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어떤 대화가 이뤄지기보다,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끝나게 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됩니다. 그래서 그륀 신부는 투쟁만 하는 사람들을 보며 이런 염려를 합니다. ‘투쟁만 하는 사람’은 경직되고 무감각해지기 쉽다고 말입니다. 자신의 옳음이 지나치면, 내면에 감수성이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그러면 반대로 ‘사랑’하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사랑하는 사람’하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마음의 가시가 적습니다. 특히 사랑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 알 수가 있죠. 그래서 그들은 굉장히 수용적입니다. 그러나 그륀 신부는 사랑만 하는 사람들을 보며 염려하길, 그들은 자신의 부드러운 측면이 이끄는 대로만 끌려가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남성들에게는 이 두 가지 능력이 모두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투쟁의 모습’과 ‘사랑의 모습’, 이 두 가지 모습 말입니다. 그렇기에 그륀 신부는 난해한 말이긴 하지만, 투쟁하는 사람으로서 사랑할 수 있어야 하고 또 사랑하는 사람으로서도 모험을 감행하는 자, 보호하는 자의 자질을 갖출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투쟁이 그저 맹목적인 싸움이 되지 않으려면 사랑이 필요하죠. 

목사님께서는 이 말을 이렇게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맥락이었을 텐데, 싸우는 사람은 ‘명랑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평화활동가’라도 내면에 평화가 없으면 절대 평화를 이뤄낼 수 없다고 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아담을 통한 정체성

어쨌든 이 <수요 성서학당>에서는 ‘투쟁’과 ‘사랑’이라는 이 두 가지 테마를 성경 인물들의 모습 속에서 함께 살펴볼 예정입니다. 

지난 7월에는 그 첫 시간을 ‘아담’을 가지고 이야기 나눠 봤습니다. 그때 그 자리에 계셨던 분 계신가요? 그때 나눴던 이야기 중에 기억나는 것 있으십니까? 아담의 모습을 통해 우리를 돌아볼 수 있었던 것에는 무엇이 있었습니까? 남성은 자신 안에 있는 여성성을 잘 인식하고 받아들일 때, 더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남성은 여성과 합일을 이루고자 하는 동경이 있는데, 그 업무를 달성할 때 자신과도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남성은 무언가를 창조해 낼 때,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글을 쓰면서 편안함을 느끼고 또 누군가는 어떤 모임이나 단체를 만들거나 또 어떤 이는 요리를 하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하는 등의 일을 통해 창조성을 발휘합니다. 이 부분은 당연히 여성에게도 해당되는 부분입니다. 요새 여러분이 갖고 계신 ‘무의미해 보이는 창조적 행위’가 있으십니까? 저는 걷거나, 쓰거나, 낯선 이들을 만나거나 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한 정체성

본론으로 들어가서, 오늘 함께 나눌 인물은 '아브라함'입니다. 우리가 교회학교 때부터 자주 불렀던 노래 속 주인공, 바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가 알다시피, ‘믿음의 조상’ 혹은 ‘신앙의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그런데 그의 신앙이 언제 잘 형성되어 갔냐면 그가 태어난 나라, 그의 가족, 그의 부모로부터 떠나면서부터입니다.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는 말씀, 창세기 12장의 말씀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아브람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 롯도 그와 함께 길을 떠났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나이는 일흔 다섯이었다.  (창12:1-4)

그는 일찍이 아버지를 따라 자신이 태어난 고향인 ‘우르’를 떠났고, 최종적으로는 부모님과 함께 살던 땅 ‘하란’과 그의 ‘가족’을 떠났습니다. 떠난다는 말은 늘 그렇듯, 여러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① 부모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라

안셀름 그린 신부는 우리가 진정한 자아실현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부모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의존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하기 어렵습니다. 어떻게 여러분께서는 부모에게서 독립을 이루셨습니까? 이런 질문이 좀 모호할 수 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 대부분 이미 부모님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다시 묻고 싶습니다. 정말 여러분은 부모님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셨습니까? 혹시 여기 계신 분 중에, 나는 다소 이른 나이에 부모님에게서 떨어져 나왔다는 분 계신가요?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라든지 아니면 자신이 원해서 그랬다든지 뭐든 상관없습니다. 저는 신학교 때문에 20살 때 부모님과 떨어져 살게 되었지만, 서울에서 누님과 외할머니와 함께 산 시간이 10년 가까이는 되어서 온전히 부모님에게서 독립한 것은 청파교회 오고 나서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더 중요한 자유를 이뤄야 하는데, 그것은 ‘내면화된 부모상’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런 부분 들으면 어떤 감이 좀 오십니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사실 남성의 경우에, 지나치게 어머니에게 고착된 아들은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마마보이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여성과의 관계에서도 항상 응석을 받아주는 어머니를 찾으려는 경향이 클 것입니다. 그렇기에 좋은 관계를 맺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늘 아버지를 모방하기만 하는 남성은 어떨까요?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해내기가 어렵습니다. 남성은 아버지의 그늘에 머무는 경우도 참 많은데, 아버지의 인정만 구하는 남성은 어떤 성과를 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자신이 속한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내기 위해, 사람들을 그 방식에 강제적으로 맞추려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부모로부터 독립을 위한 고민

저는 얼마 전까지, 어떻게 하면 부모로부터 잘 독립할 수 있을까에 관해 고민이 많았습니다. 왜냐면, 잘 독립할 수 록 더 잘 지낼 수 있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부모로부터의 독립은 일단 경제적인 독립이 우선시 될 때, 더 잘 이뤄질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물론 큰돈을 벌어 성공한 다음 부모의 집을 나와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고생하거나 돈을 갚는다는 전제로 부모의 집에서 나오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당연히 안 그러시겠지만, 대부분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 공짜는 없기 때문입니다. 투자하고 지원한 만큼, 보답을 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너무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부정적으로 본다고 나무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어떻게 신앙의 성숙을 이루어가는지의 맥락에서 나온 이야기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② 과거의 감정에서 떠나라

그린 신부는 우리가 진정한 자아실현을 이루기 위해서는 두 번째로 과거의 감정에서 떠나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모험 좋아하십니까?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경험하는 거 좋아하십니까? 근데 사람은 모험을 즐기는 삶을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새롭고 낯선 것들은 늘 인간을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어린 시절을 미화하기 마련입니다. 여러분께서도 어렸을 때 좋은 기억들 있지 않으십니까? 포근한 기억들 말입니다. 저도 따스한 해 아래서, 어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있던 기억들이 지금도 납니다. 참 평화로운 장면으로 기억됩니다. 우리는 어릴 적 즐거웠던 일이나 특히 어머니 곁에 있을 때 느꼈던 그 안정감을 그리워합니다. 의식적으로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우리는 삶의 많은 부분에서 그 안정감을 누리려고 애를 씁니다. 어떤 장소나 공간, 관계에 있어서 안정감에 대한 추구가 드러납니다. 

특히 남성의 경우는 아버지가 되면, 이 안정감을 되살리려 하거나 만약 자녀들이 자신의 노력에 감사하지 않으면 실망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실 저는 어린 시절의 좋은 기억들은 간직하고, 나빴던 기억들만 잘 극복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륀 신부는 고통스러웠던 감정뿐 아니라 아름다웠던 감정에서도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을 이렇게 받아들입니다. 당연히 과거에 상처받은 안좋은 감정은 ‘관계’뿐 아니라 ‘나 자신’도 헤칠 수도 있기에 극복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아름답고 좋았던 감정이라는 것도 계속해서 그 감정을 유지하고픈 욕구 때문에, 자신이 맺은 여러 관계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그 감정의 기억에 종속될 수 있기에 극복이 필요한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과거의 감정에서 떠난다는 것은, 곧 상처를 극복하는 것이고, 자기 삶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지 않고 스스로 책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더 자유로운 삶, 즐거운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③ 보이는 것들에서 떠나라

그리고 우리가 진정한 자아실현을 이루기 위해서는 세 번째로 보이는 것들에서 떠나야 합니다. 뭐 눈을 감고 살아야 하느냐? 그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눈에 보이는 것에서 100% 자유롭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한데, 일반적으로 ‘남성’은 ‘여성’보다 확실히 시각에 민감합니다. 물론 본다고 할 때, 이 본다는 것이 어떤 외적인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그보다 ‘눈에 보이는 현상’ 즉, ‘성공’이나 ‘재산’이나 ‘명성’과 같은 것에도 남성은 훨씬 민감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변화가 심한 편이십니까?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건 삶이란 유동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럼 삶의 문제는 언제 발생하는가 하면, 움직이는 삶을 억지로 붙들려고 할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보자면, 이미 이룩해 놓은 것은 고정된 것이고 이미 지나간 것이기에 그곳에 오래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물리적인 모든 것에서 떠나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만약 실제로 그럴 수 있다면, 살면서 더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달을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 진짜 중요한 것은 ‘내면의 여정’입니다. 일상을 거리를 두고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살면서 어떤 깨달음을 얻었을 때는 주로 언제였습니까? 기쁘고 즐거울 때였습니까?그렇긴 어렵죠.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고통과 절망의 시간’을 지나고 나서야 어떤 깨달음들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은 원치 않는 사건이나 시간이 다가와 깨달음을 얻기도 하지만, 삶이라는 게 원래부터 ‘순례’와 같은 것을 아는 사람은 어떻게 할까요? 자발적으로 고통의 시간으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마조히즘을 이야기하는 건 아닙니다. 

포르투갈 여행

제가 지난주에 목회실 마지막으로 휴가를 다녀왔습니다. 물론 담임 목사님은 안 가셨습니다. 멀리 떠나보고 싶기도 했고 또 지인들이 너무 좋다고 해서 저 먼 땅, ‘포르투갈’을 다녀왔습니다. 근데 사실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이 여행이 마냥 좋고 설레기만 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혼자 떠난다는 ‘자유’가 있는 동시에, 혼자 ‘견뎌야 할 시간’이 반드시 있을 테고 또 처음 가는 나라인 만큼 걱정되는 부분이 있고 또 마지막으로 공항에 가기까지 얼마나 다사다난했는지 교회 일은 왜 이렇게 마지막까지 몰려서 오는 건지, 체력은 바닥이었습니다. 

비용도 아껴보겠다고 숙소도 최소 4인용 이상을 골라서 가다 보니, 도착해서 온전한 쉼을 못 누릴 거 같다는 생각에 내가 왜 사서 이 고생을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뭔가 떠나야 할 순간이라는 걸 느낄 수는 있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돌아오고 나서, 대체 이번 여행이 내게 무엇을 남겼나 답을 찾지 못하다가 우연히 책 한 구절을 만났습니다. 

창조적 잠재력

나탈리 크랍(Natalie Knapp)이라는 독일 여성 철학자가 쓴 책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에서 발견했습니다. 읽어드리겠습니다. 

“모든 과도기는 개인적이며 저마다 독특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 모두에게 나타나는 공통의 유형이 있으며 그 유형을 앎으로써 과도기를 살아내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때로 고통스럽고 힘든 과정을 의식적으로 경험하고 창조적 잠재력을 펼치게끔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나탈리 크랍,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 어크로스, p.10-11

쉽게 말해, 이 책의 저자는 삶에 변곡점들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인데, 한 사람에게 닥친 위기나 어려움은 개별적이긴 하나, 서로 간의 공통점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말합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과 어려움은 유사성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인간이 겪는 불안과 두려움에는 어떤 유형이 있는데, 그것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어쨌든 이 책의 서두는 ‘삶의 목적’이 반드시 어떤 결과물을 얻어야 하거나, 이익과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아님을 인정하고 시작합니다. 그런데 여러분께서도 잘 아시듯이, 삶에는 반드시 ‘어려움’이 있기 마련입니다. 누구도 피할 순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어려움’을 그저 흘러가는 대로 내 곁에 머물게 둔다면, 삶에서 겪는 어려움은 ‘적’이 아니라 ‘벗’이 될 수 있는 것이죠. 

 

‘여행’ 얘기하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나누고 싶었던 진짜 이야기는 제가 사서 고생을 했던 이유가 ‘고통스럽고 힘든 과정을 의식적으로 경험’함으로써, 내 안에 새로운 것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습니다. 방금의 책에서는 그것을 ‘창조적 잠재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어쨌든 ‘삶’이란 끊임없이 움직이는 유동적인 영역을 말하고, ‘떠난다는 것’은 곧 우리가 이룬 것에 안주하면 안 된다는 말과 같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실수를 통해 배우는 아브라함

그런데 성경 이야기가 재밌는 건,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이상적으로 그려지지 않았음에 있습니다. 때론 다윗이나 히스기야처럼 하나님을 처음부터 잘 믿었던 인물도 있었지만, 당연히 그들도 후반기에 위기를 맞거나 실수를 합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동화나 신화 속 주인공은 반드시 실패와 실수를 경험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브라함이 위기를 극복하고 어떻게 성숙해져 가는지를 보여 줍니다. 

여러분이 아는 아브라함의 실수에는 뭐가 있나요? ① 아브라함은 죽음을 면하기 위해 자신의 아내 ‘사라’를 자신의 여동생(누이)이라고 속입니다. 그리고 ② 하녀 ‘하갈’과 그녀에게서 나은 이스마엘이 내쫓김당했을 때 그들을 책임 있게 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③ 사라와 자신 사이에서 낳은 아들 ‘이삭’을 희생양으로 바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경쟁관계에 놓인 아버지와 아들

그런데 이 세 번째 에피소드를 대부분의 ‘아브라함의 순종’으로 해석합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안셀름 그륀 신부는 이 부분을 아주 흥미롭게 해석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한 이 부분을, 아브라함의 ‘잘못된 하나님 상’이었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 부분은 ‘분석심리학’적인 접근이긴 한데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에게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삭을 죽이기 직전까지 갑니다. 그때 뭐가 나타나죠? 천사가 나타나 그를 가로 막고 숫양 한 마리를 건네줍니다. 그륀 신부는 바로 이 부분을 심리적으로 접근을 해보는데요. 그는 자신의 아들을 없애려는 경향이 ‘아버지라는 존재’ 안에 담겨 있음을 발견합니다. 

여러분, 여기에도 ‘아들’을 두신 부모님이나 아들이신 분들이 계시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시 방금 이야기를 통해, ‘아버지’가 때로 ‘아들’을 어떤 존재나 대상으로 느끼는지 감이 오십니까? 아버지는 아들을 ‘경쟁자’로 느낍니다. 주로 언제 그렇냐면, 자신의 아내와의 관계에서 그렇습니다. 자기보다 아들에게 더 관심을 기울이는 아내와의 관계에서, 아들과 아버지는 어느 정도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이런 부분이 공감이 되십니까? 

이루지 못한 소망, 억압된 열정

저는 재작년에 좀 흥미로운 경험을 했습니다. 큰 사고 없이 온순하게 살던 제가 제작년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게 됐습니다. 결정은 제가 스스로 했지만, 부모님께 말씀은 드려야 할 것 같아 출발하기 한 두 달 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당연히 걱정이 많으신 어머니는 염려를 하셨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아버지의 반응이 궁금했습니다. 처음에는 별 반응이 없으시더니, 제 이야기를 듣고 한 참 뒤에, 갑자기 그렇게 쓸데 없는 곳은 왜 가냐며, 다 부질없는 짓이고, 그거 다 사람들의 허세고 거품이라는 식으로 비난을 하는 거였습니다. 저는 좀 당황했습니다. 

저는 그동안 아버지께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컸던 것 같습니다. 표현에 서툰 분이기도 하셨지만, 아버지가 원하는 ‘인간상’에 부합하지 않아 칭찬을 잘 못 받아 봤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의식적으로 아버지께 인정받기를 원했던 것 같고, 물리적으로 아버지와 떨어져 있어도 정서적으로는 아버지와 애착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렇습니다. 

근데 오히려 아버지가 아들에게서 어떤 ‘모험, 열정, 용기 있는 선택’을 보며, 어떤 경쟁적인 마음이 올라오셨나봅니다. 칭찬보다는 질책을 하셨던 것을 보면 말입니다. 사실 아버지라는 존재는 아들을 보며 자신이 이루지 못한 소망이나, 참고 억압해야만 했던 것들을 떠올리게 되기도 합니다. 고전들이 그런 이야기를 보여주기도 하는데요.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 라든가,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 같은 것들이 그런 이야기들을 그려 보여줍니다. 

무조건적인 어머니 사랑 / 조건적인 아버지 사랑

혹시 여러분께서 생각하시는 ‘어머니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그의 책 <사랑의 기술>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무조건적’이라고 말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어머니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어떤 조건을 충족시켜줬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그녀의 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 이런 ‘무조건적인 사랑’은 모든 인간의 가장 절실한 갈망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죠. 

그럼 여러분이 생각하는 ‘아버지의 사랑’은 어떤 사랑이라고 생각되십니까? 아버지의 사랑은 ‘조건이 있는 사랑’입니다. 아버지는 원칙적으로 ‘너는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주기 때문에 또는 너는 너의 의무를 다하고 있기 때문에 또는 너는 나를 닮았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성장하면은 이 대립되는 ‘두 사랑’이 어떤 효과를 발휘하게 될까요? ‘어머니의 사랑’은 세상은 살만한 공간이고 자신은 잘못을 저질러도 사랑받을 만한 존재임을 상기시켜 주게되고, ‘아버지의 사랑’은 세상이 던져주는 문제들을 잘 처리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리히 프롬은 가장 어려우면서도 중요한 임무를 부모에게 건넵니다. 그럼 ① 어머니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어머니는 생애 일부를 어린아이가 독립해서 마침내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를 바라는 소망에 바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럼 ② 아버지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무엇이겠습니까? “아버지의 사랑은 위협적이고 권위적이기보다는 참을성 있고 관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숙한 사람’은 외부에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에서 벗어나, 내면에 그 모습을 간직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왜곡된 하나님 상(相)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살펴볼 부분은 그의 ‘하나님 상’입니다. 그는 여러 가지에서 떠나야 했는데, 마지막으로 떠나야 했던 것은 ‘고정되고 치우친 하나님 상’이었습니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이야기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원래 하나님은 우리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물론 이 부분은 나중에 시간이 된다면 더 이야기 나눠보면 좋을 부분인데요. 그래서 안셀름 그륀 신부는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희생보다는 ‘진심과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과 건강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어떤 ‘기준과 틀’에 자꾸 몰아넣는 행위를 멈춰야 합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도록 하려면, 뭔가 완벽하고 엄하고 무자비한 하나님상과 결별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느낀 ‘사랑’은 이런 종류의 것들과는 무관했음을 잘 아실 겁니다. 

내면의 순례자를 깨우라

오늘 강의를 마무리합니다. 이 책은 아브라함을 ‘순례자’로 정의합니다. 순례자란 어떤 사람을 일컫습니까? ‘순례자’는 삶에 답이 감춰져 있음을 인정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답을 찾으려 떠나는 자입니다. 친숙했던 것들, 익숙했던 것들에서 자꾸 거리두기를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제 여러분께서도 내면에 있는 그 ‘순례자의 영혼’을 다시 깨우셨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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