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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성서학당] 성경 인물의 빛과 그림자 : 하갈

20201022 청파교회 목요 <성서학당> : 성경 인물의 빛과 그림자

 

여왕과 야성녀: 하갈

 

 

성서학당

 

안녕하세요. 세 번째 목요 <성서학당>을 시작하겠습니다. 문득 이번 성서학당을 준비하면서, 영상을 시청하는 분들이 이 영상을 보며 얼마나 도움이 될까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주중에 이뤄지는 성서학당은 매해 전반기에 한 번, 후반기에 한 번 이렇게 두 차례 진행이 되는데, 각 학기를 맡으신 목사님들의 관심사와 경험에 따라 강의의 내용과 진행방식이 달라집니다. 아무쪼록 강의를 들으시며 한 가지라도 건질 것이 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가 나를 떠났도다

 

여러분, 혹시 지금 사랑하고 계십니까? 뜨거웠던 밀월의 시간을 한번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연애만큼 좋은 기대로 시작했다가 슬픔으로 끝난 경험도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사랑과 연애를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사람입니다. 사랑만큼 인생의 압축적인 체험을 제공하는 그런 경험은 드물기에 그렇습니다. 세상에 사랑 만큼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 일도 없는 것 같습니다. 

 

왜 처음부터 사랑 타령을 하냐면, 사랑의 고통과 상처가 오늘 함께 나눌 인물의 이야기와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연애할 때 주로 차이는 쪽이셨습니까, 차는 쪽이셨습니까? 매번 차기만 한 거 아닌가요? 가수 이효리씨는 연애 시절에 한 번도 차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냐고 물었더니, 상대방이 이별을 이야기할 것 같으면, 자신이 먼저 헤어지자고 했기 때문에 자신은 한 번도 차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실 헤어진다거나 누군가로부터 버림을 받는다는 것은 엄청난 슬픔이자 고통의 경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고통이 싫어 사랑하기를 망설이곤 합니다. 그런데 세계 문학 작품들을 보면, 주로 ‘버린 사람’이 아니라 ‘남겨진 사람’이 자신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결코 “내가 너를 버렸도다.”라는 관점에서 쓰인 글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사랑에서 남겨진 자는 굉장히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사랑에서만큼은 더 많이 사랑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성장할 기회를 얻을 가능성이 높은 경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랑을 받기만 한 사람은 자신의 언어를 갖기 힘듭니다. 더 사랑한 사람이 자신의 언어를 가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말은 여성학자 정희진씨가 한 강연에서 했던 말입니다. 

 

“밀당엔 더 사랑하는 사람이 ‘패자’라는 전제가 있어요. 실연의 고통을 인격의 성장이나 예술로 승화시키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죠. 사랑한 사람과 사랑받은 사람 중에 누가 더 성장할 것 같아요? 사랑한 사람이 성장하죠. 모든 문학 작품은 ‘그가 나를 떠났도다, 내가 남겨졌다’ 이렇게 남겨진 사람의 시점이죠. ‘내가 너를 버렸도다’ 이런 관점으로 쓰인 작품은 전 세계에 하나도 없습니다. 사랑을 받은 사람은 언어가 없어요. 더 많이 사랑한 사람이 언어가 가질 가능성이 높죠.” 


<정희진 강연, 2015년 4월 27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

 

누군가의 강요에 의해 시작한 사랑이 아니라면, 더 많이 사랑한 사람은 그 사랑이 끝이 나도 아쉬울 게 없습니다. 충분히 노력했고 할 만큼 해봤기에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훨씬 아쉬움이 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 ‘버림받았다.’라는 표현도 안타깝게만 볼 표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부가 된 하갈(하가르)

 

성경을 보면, 남성에 비해 여성이 홀로 남겨지는 경우들이 확실히 많습니다. 하지만 사람에게 버림받았다고 해서 하나님에게까지 버림받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과부’, 즉 어떤 식으로든 버림받은 여성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습니다. 그 대표적인 여성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인물인 ‘하갈(하가르)’입니다. 하갈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사래)의 이집트 여종이었지요. 책의 한 대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버림받은 여자를 그리는 소설은 여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그때 여자는 자신을 재발견한다. 여자의 영혼은 버림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직감한다. 동시에 하느님이 자기를 버리지 않는다는 확신도 있다. 구약성경은 말한다. “주님께서는 이방인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돌보신다”(시편 46,9) 과부는 버림받은 여자의 전형이다. 구약성경의 인물 중 버림받았지만 하느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은 여자의 원형이 하가르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49-50

 

지난 시간에도 잠시 말씀드렸지만, 고대 이스라엘 사회는 아주 불평등이 심한 사회였습니다. 고아와 나그네 그리고 과부가 그 대표적인 대상자였습니다. 특히 ‘과부’는 사회적으로 굉장한 취약한 계층이었습니다. 여성인 데다가 혼자였기 때문에 경제적, 사회적인 뒷받침을 받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사라를 다룰 때 말씀드렸듯이, 사라는 임신하지 못하는 여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종인 하갈에게 가서 아이를 얻으라고 말합니다. 하갈의 몸을 빌려, 집안의 대를 이어나가길 바랐기 때문입니다(16:2). 아브라함은 그렇게 했고,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에 아이가 생기게 됩니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하갈이 임신을 하자 자기 주인이었던 사라를 업신여기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받게 될 호의와 대접을 알아서였을까요? 그래서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불평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하갈을 사라에게 내어주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당신의 종이니,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소? 당신이 좋을 대로 그에게 하기 바라오.”(창세기 16:6) 그 뒤에 사라는 하갈을 학대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그녀는 사라가 보는 앞에서 도망을 치게 됩니다. 

 

질투하는 사람

 

안셀름 그륀은 이 대목에서 여성의 안타까운 면을 봅니다. 질투하는 여성의 모습인데요.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라는 질투한다. 여종은 임신하는데 자기는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참을 수가 없다. 사라는 하가르를 구박해서 우월함을 보여 주고 싶었다. 여자에게서 이런 경향을 자주 본다. 한 여자가 자기 장점을 발전시키면 다른 여자들이 공격한다. 자기에게 금지되었거나 자기는 할 수 없는 일을 다른 여자들이 하는 것을 참지 못하는 여자가 많다. 다른 여자의 유능함을 기뻐하기보다 싸움을 건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50

 

이 이야기에 동의를 하시려나 모르겠습니다. 물론 하갈이 먼저 사라를 업신여기긴 했습니다만, 결과적으로 사라의 학대로 하갈은 도망을 칩니다. 

 

사실 ‘질투’라고 하는 것은 남녀를 구분하진 않습니다. 질투하는 이유가 중요한데요. 평소 우리가 누군가를 질투하거나 시기하는 이유를 가만히 살펴보면, 단순한 이유가 숨겨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깊은 속내를 살펴보면, 나는 하고 싶었지만 갖은 이유를 대며 할 수 없었거나 하지 못했던 일을 누군가가 했을 때, 그 상대방에게 질투를 느끼곤 합니다. 그 사람이 정말 잘못한 뭔가가 있어서 질투하는 게 아닙니다. 방금 한 안셀름 그륀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기에게 금지되었거나 자기는 할 수 없는 일을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린 참을 수 없게 됩니다. 괜히 사람이 미울 때는 이 생각을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이제부터라도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갖은 이유는 내려놓고 하나씩 실행해보는 것입니다. 누구도 내 삶을 대신 살아주진 못합니다. 

 

희생의 역할이 무서운 이유

 

다시 성경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사라는 자신의 여종 하갈을 질투하게 되죠. 자신은 갖지 못한 아기를 그녀는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갈은 사라를 피해 도망을 칩니다. 그리고 하갈은 사막(광야)의 한 샘에서 주님의 천사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천사가 지금 어딜 가고 있냐 묻자, 자신의 여주인을 피해 도망가는 길이라고 답을 합니다. 그러자 주님의 천사는 뭐라고 말합니까? 가던 길을 멈추고 “너의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면서 살아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라에게 돌아가라는 것이 무조건 희생하라는 것이 아님은 천사의 다음 말을 통해 드러납니다. 천사는 말하죠. “내가 너에게 많은 자손을 주겠다. 자손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불어나게 하겠다.”라고 말입니다. 

 

안셀름 그륀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갈은 결코 ‘희생양 역할’을 맡아서는 안 된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을 계속해서 희생하는 사람이라고 여기면, 주위 사람에게도 희생을 강요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가르(하갈)는 희생양 역할을 맡아서는 안 된다. 희생양 역할은 여자에게 좋지 않다. 자신을 희생양이라고 자처하면서 주위 사람에게도 희생을 강요한다. 자기를 희생하면서 권력을 행사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희생의 대가를 묻는다. 아니면 자신이 희생양 역할을 맡았으니 남들에게 불안, 억압, 양심의 가책을 느끼라고 한다. 희생양 옆에 있는 사람들은 마음이 편할 수 없다. 끊임없이 양심의 가책에 시달린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51

 

사실 따지고 보면, 자신이 희생하고 싶어서 하는 희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살다 보니 또 부모가 되어보니 자연스레 희생하는 역할을 감당하며 살고 있었던 거죠. 근데 이 희생이 무서운 건, 자신도 모른 채 이 희생의 역할을 대물림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후대를 살아갈 우리 학생들이 또 자녀들이, 우리 여성들이 되도록 덜 희생하며 살도록 해야지, 하면서도 자신도 모른 채 희생양 역할을 강요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희생’보다 ‘기쁨’을 쫓는 것이 정말 중요할 것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가진 기질과 또 동방 국가가 강조하는 예의와 자신이 맡은 역할 때문에 희생하는 것을 미덕으로 알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하루하루 희생하는 자의 모습으로 사는 게 아니라, 일상에 숨겨진 삶의 기쁨을 찾으며 살라는 것이 그분의 더 큰 뜻임을 느낍니다. 

 

미국의 신학자인 콘라드 하이어스(Conrad Hyers)는 자신의 저서 <그리고 하나님이 웃음을 창조하셨다>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눈물’보다는 ‘웃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은혜 안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과 그들의 환경, 도덕, 견해, 경건, 믿음을 너무 심각하게 대하려는 욕구에서 자유롭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어린아이들처럼 자유롭게 웃고 놉니다. 회개만큼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많은 눈물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며, 우리가 뉘우치는 행동보다 더 큰 구원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자유롭게 주고받는 구원의 표현은 눈물이 아니라 웃음이거나, 웃음이 되는 경건한 눈물입니다. 가장 충만하고 자유로운 웃음과 명랑함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선물입니다. 


콘라드 하이어스, <그리고 하나님이 웃음을 창조하셨다>, 아모르문디, 2005

 

삶이 어쩔 수 없이 계속 우리를 ‘희생양’의 역할로 끌어갈 수밖에 없다면, 더더욱 추구해야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이 ‘기쁨’ 혹은 ‘웃음’일 것입니다. 

 

약속으로 견딘 고난

 

다시 성경 이야기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하갈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많은 자손을 주겠다는 약속(16:10)이 바로 그것이었죠. 힘든 시기를 견디는 방법 가운데 ‘약속’이 있습니다. 누군가 자신을 두고 했던 그 약속으로 힘든 순간을 이겨내기도 합니다. 물론 약속만큼 깨지기 쉬운 것도 없지만, 만약 믿음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이 하신 약속만큼 든든한 것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하갈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견뎠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약속으로 견딘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는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는다는 말은 다른 말로 자신의 진가를 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안셀름 그륀은 말합니다. 

 

여자가 힘든 상황을 견뎌 내는 것은 내면 깊은 곳에서 자기의 진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안에 있는 생명이 이 세상에서 계속될 것이다. 어머니뿐 아니라 아이가 없는 여자도 마찬가지다. 여자가 자신을 생명의 보호자라고 느낀다면 힘든 상황 속에서도 삶을 지탱하고 보호할 수 있다. 하가르처럼 하느님이 자기를 돌본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자신을 깎아내리는 말 따위에 상처 입지 않을 것이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52

 

때때로, 흔들리는 자신을 견디는 게 쉽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왜 어려운 일은 한꺼번에 몰려오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세상일은 우리의 인식 밖에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는 건,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고 자신을 긍정할 수 있도록 부단히 애쓴다는 말과도 같을 것입니다. 

 

다시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

 

하갈은 다시 한번 위기와 다시 한번 약속을 받습니다. 사라는 아들 이삭을 낳습니다. 그리고 하갈도 아들 이스마엘을 낳게 되죠. 이삭이 젖을 떼던 어느 잔칫날, 사라는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라는 하갈이 업신여겼던 경험도 있었기에, 자신의 아들이 이스마엘에게 그런 대우는 받는 게 탐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그의 아들을 쫓아내 달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좀 언짢기는 했지만, 사라의 말대로 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종의 배에서 나온 자식이긴 하지만, 자신의 아들이기도 한 이스마엘을 내쫓은 일로 마음이 어려웠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걱정하지 말라며, 이스마엘에게서 큰 민족이 나올 것이니 그만 괴로워해도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갈은 이스마엘과 광야로 쫓겨났습니다. 그녀는 아브라함에게서 받아온 먹거리와 물이 떨어지자 우는 아들을 덤불 아래에 뉘어놓습니다. 차마 아이가 죽어가는 모습을 볼 수 없어 그녀는 아이를 바라보지 못하고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 우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신 하나님이 천사를 보냅니다. 하나님의 천사는 무슨 일을 겪었냐며, 하나님께서 아이의 우는 소리를 들였으니 두려워 말라고 말합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마엘에게서 큰 민족이 나오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제야 눈이 열린 하갈은 옆에 있는 샘을 발견하게 되고, 그 물을 아이에게 먹이게 되는데, 이때부터 하갈은 하나님의 구체적인 도움을 체험하게 됩니다. 

 

모성과 에로스의 적절한 분배

 

‘하와’ 강의 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여러분께서는 요즘 어떻게 ‘자신의 감정’과 ‘자신의 욕구’를 잘 알아차리며 지내고 계십니까? 자기감정과 욕구에 민감해져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타인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신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생동감’ ‘생명력’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셀름 그륀의 여동생 린다 아로슈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여성이 모성만 발휘하며 살면 여성의 에로스적인 측면이 지나치게 축소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여자가 지나치게 모성으로만 살면, 여자의 에로스적인 측면은 사그라진다. 무시된다. 넘치는 모성을 표현하듯, 자신의 에로스도 지켜야 한다. 이때 여자들은 왠지 부자연스럽다고 느낀다. 낡은 가치관이 좀 더 개방적으로 존재하려는 것을 얼마나 가로막는지 깨닫게 된다. 여자들은 남자들의 기대에 압박을 느낀다. 참고 견디는 역할에서만 자신을 경험한다. 이 역할은 부부 사이에서 중요한 요소일 수 있다. 하지만 서로에게 자신이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58

 

평소에 하지 않던 행동을 하면 어색하기 마련입니다. 생각이란 것도 마찬가지겠지요. 하지만 잘 느껴야 잘 지낼 수 있습니다. 챙기고 돌보는 자리에서 조금 물러나도 괜찮습니다. 내 안의 어떤 필요나 감정 등을 잘 알아차리고 그것들을 한번 살아내 볼 때라야 우리의 정신은 더욱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이들도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기도 할 것입니다. 

 

매순간 곁에 머무는 천사

 

여러분께서는 ‘하나님의 천사’하면 어떤 생각부터 드십니까? 무슨 램프의 요정 ‘지니(genie)’가 떠오르십니까? 하갈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를 만났습니다. 하지만 이 천사는 어떤 영적인 존재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안셀름 그륀은 하나님의 천사는 특별한 사람만 만나는 그런 대상이 아니라, 아주 일상적인 이들이나 상황을 통해 만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버림받아 광야로 쫓겨난 여자들이 자기 눈을 뜨게 해주는 천사를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곁에 있는 친구들일 수 있다. 비록 그런 일을 겪었지만 그녀는 가치 있고, 그녀 안에 큰 풍요로움이 있다는 느낌을 친구들이 전해 준다. (...) 책도 천사가 될 수 있다. 자신의 상황을 다르게 평가할 수 있는 눈을 열어 준다. 때로 미사(예배)나 묵상(기도) 중에 확신을 주는 체험을 한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59-60

 

가톨릭 작가 페터 제발트도 그의 책 <사랑하라 하고 싶은 일을 하라>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좀 길지만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게다가 하느님은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씀하시지 않는가. 하지만 그분의 도우심을 느낄 수 있는 가능성은 많다. 어떤 때는 작은 손짓으로, 어떤 때는 책으로, 또는 어떤 말을 통해서 도움의 손길이 찾아온다. 더러는 우리가 겅험하는 특정한 고통과 고난이 그 통로가 되기도 한다. 결코 우연이라 볼 수 없는 섭리가 신과의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고, 그것이 우리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관계의 존재인 인간은 오직 다른 사람을 통해서 스스로를 인식하고 계발하며 참된 자기를 찾을 수 있다.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하느님은 인간을 통해서만 인간에게 오신다. 이는 신성한 원칙과도 같다. 그러므로 우리의 길, 삶의 의미, 삶 전체의 과제는 다른 사람과의 만남 속에서 드러난다. 


페터 제발트, <사랑하라 하고 싶은 일을 하라>, 문학의숲, 2010, p.216-217

 

어떻게,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가 좀 가깝게 느껴지십니까? 내 곁에 있는 친구나 책, 예배나 기도 또는 고통과 고난 또한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의 메시지일 수 있습니다. 삶의 의미는 결국 모든 ‘만남’을 통해 발견하게 되는 것 아닐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떠나보내는 사랑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이야기 나누고 마칠까 하는데요. 사실 좀 냉정하게 말하면, 하갈은 남성으로부터 버림받은 여자입니다. 자녀는 있지만 제대로 된 남편은 없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은 내쫓김당한 하갈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이야기를 전하지만, 린다 아로슈는 하갈의 모습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이야기를 전합니다. ‘능동적인 여성’에 관해 이야기인데요. 

 

누군가를 구속하지 않고 놓아주는 것도 여성에게 있어 무척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자유롭고 그가 원하는 삶을 살도록 하게 하는 것은 모든 남녀의 과업일 것입니다. 부부나 애인, 부모나 자녀 등 한 사람에게 얽혀 있는 존재는 무수히 많을 것입니다. 린다 아로슈는 말합니다. 

 

한 사람을 놓아주는 것, 구속하지 않고 그가 살고자 하는 대로 자유롭게 놓아주려면 내면에 큰 힘과 사랑이 있어야 한다. 여자는 비애, 절망, 분노를 느낀다. 놓아주어야 하는 사랑도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힘으로 살 수 있다는 큰 신뢰가 필요하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61

 

저는 이 대목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사라의 질투로 인해 하갈은 아브라함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냥 그렇게 버림받은 자의 처지(패배자)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을 버린 그 사람을 자신의 ‘선택’으로 놓아줄 줄 알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말이 좀 어렵나요? 

 

누군가 자신을 떠나는 걸 어떻게 붙잡을 수 있겠습니까? 어떤 식으로든 헤어짐을 경험해본 사람은 떠나는 사람을 붙잡는 건 부질없는 짓이었음을 알 수 있죠. 어쨌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자신을 버렸거나 떠난 사람 때문에 비애나 절망, 분노를 느끼게 되죠. 이것은 당연한 반응입니다. 

 

하지만 놓아주어야 하는 것도 ‘사랑’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뢰가 필요하죠. 자신을 긍정하는 힘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산다는 말은 철학에서는 엄청난 자기 의지를 말할 테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자신의 힘으로 산다는 말은 곧 하나님의 보호와 돌봄에서 외면당하지 않는다는 신뢰의 한 표현일 것입니다. 

 

절망의 깊이, 영광의 깊이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우리는 목요 <성서학당> 세 번째 시간을 통해 ‘하갈’에 관해 살펴봤습니다. 하갈은 성경에서 ‘버림받은 여성’의 모습으로 등장을 했습니다. 하지만 버림을 받았다는 건,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이긴 하나, 깊은 절망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새로운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절망의 깊이가 곧 영광의 깊이이기도 한 것입니다. 

 

가장 깊은 삶의 이야기는 버림받은 사람 혹은 남겨진 자에 의해 쓰여졌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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