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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성서학당] 성경 인물의 빛과 그림자 : 사라

20201015 청파교회 목요 <성서학당> : 성경 인물의 빛과 그림자

여왕과 야성녀: 사라

 

 

사람에 대한 이해

안녕하세요. 두 번째 목요 성서학당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이번 시간에도 성경에 등장한 한 인물을 중심으로 ‘사람에 대한 이해’, 즉 ‘인간 이해’를 해볼 예정입니다. 그렇기에 인문학적인 요소가 그 주를 이룰 예정입니다. 진행은 안셀름 그륀의 책을 함께 읽어나가며, 설명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하겠습니다. 

앞서 앞서 말씀드리면, 안셀름 그륀은 신학과 영성, 심리학 등을 공부한 사람입니다. 특히 칼 융(C.G. Jung)의 분석심리학을 연구하였기에, 인간의 무의식이라던가, 인간의 남성성-여성성 그리고 내면의 그림자 같은 것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야기도 사람의 원형 즉, 남성의 원형, 여성의 원형에 관해 집중해볼 예정입니다. 물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남성성, 여성성은 한 사람 안에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라의 웃음

자, 그럼! 두 번째 시간에 함께 다룰 인물은 ‘사라’입니다. 미리 다룰 내용을 말씀드리면, 안셀름 그륀은 사라의 모습 속에서 ‘웃는 여자’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웃는 여자라. 뭔가 독특해 보입니다. 

먼저 성경 속 이야기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와 함께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향합니다. 그리고 이집트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그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11. “여보, 나는 당신이 얼마나 아리따운 여인인가를 잘 알고 있소.
12. 이집트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서, 당신이 나의 아내라는 것을 알면, 나는 죽이고 당신은 살릴 것이오.
13. 그러니까 당신은 나의 누이라고 하시오. 그렇게 하여야, 내가 당신 덕분에 대접을 잘 받고, 또 당신 덕분에 이 목숨도 부지할 수 있을 거요.” <창세기 12장 11-13절>

참 흥미로운 부분이죠.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름다운 아내 때문에 위험을 느낍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아내를 두고 하게 될 그 ‘질투’가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살려두고 불필요한 자신은 없애버릴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이 부분을 두고 알셀름 그륀은 아브라함이 아내의 아름다움을 이용했다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내의 아름다움을 이용했다. 파라오는 사라를 왕궁으로 데려왔다. 아브라함은 아내 덕에 대접을 잘 받았다. 파라오는 그에게 양과 소, 남종과 여종을 주었다. 그런데 파라오와 그 집안에 재앙이 닥쳤다. 파라오는 아브라함이 아내를 누이라고 내어 준 것을 알아차렸다. “네가 도대체 어찌하여 나에게 이런 짓을 저질렀느냐? 그 여자가 네 아내라고 왜 나에게 알리지 않았느냐? 어찌하여 그 여자가 네 누이라고 해서, 내가 그를 아내로 삼게 하였느냐? 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데리고 떠나라” (창 12:18-19)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36-37

잘 아시겠지만, 여기서 ‘파라오’는 ‘바로’를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생각했던 대로 사라로 인해 바로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일로 바로와 그의 집안에 하나님의 무서운 재앙이 내리게 되고, 결국 바로는 사라가 아브라함의 누이가 아닌 그의 아내인 것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이집트 밖으로 쫓겨나게 됩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본다면, 아브라함은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아내 사라를 이용했던 것입니다. 

사실 어쩌면, 아브라함이 바로를 속였던, 속이지 않았던 그 결과는 비슷했을지 모릅니다. 그는 이집트 사람들의 질투로 자신이 죽을까 두려웠고 또 아름다운 아내 덕에 혜택을 보기도 했습니다. 안셀름 그륀은 이런 아브라함을 보며, 남자는 자신의 무력감을 보상받기 위해 아내 또는 여자를 이용해서는 안 되며, 아내를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목숨이 걸린 일기에 쉽게 결정하기 어려웠겠지만, 남성은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 ‘두려움의 대상(바로)’과 부딪쳐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사라의 웃음

이어서 살펴볼 부분은 태가 열리지 못한 사라의 이야기입니다. 사라는 아이를 낳지 못한 여성이었습니다. 여성인 데다가 아이까지 낳지 못한다는 건, 지금보다 훨씬 차별이 심했던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엄청난 슬픔이자 절망의 순간이었을 겁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이 아브라함 앞에는 세 명의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엎드려 절하고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급히 장막으로 들어가 사라를 찾습니다. 사라는 음식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세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물었습니다. "댁의 부인 사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대답했습니다. "장막 안에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음 해 이맘때에, 내가 반드시 너를 다시 찾아오겠다. 그 때에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사라는 장막 어귀에서 이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습니다(창 18:9-10). 

흥미로운 부분은 이 다음 구절인 창세기 18장 12절인데요. 읽어드리겠습니다.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나이가 많은 노인들이고, 사라는 월경마저 그쳐서, 아이를 낳을 나이가 지난 사람이다.
12. 그러므로 사라는 "나는 기력이 다 쇠진하였고, 나의 남편도 늙었는데, 어찌 나에게 그런 즐거운 일이 있으랴!" 하고, 속으로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창세기 18장 11-12절>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았습니다. 출산하기에는 두 사람 다 나이가 너무 많았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이야기는 우리의 상식을 넘어섭니다. 물론 성경이 몰상식을 조장하진 않습니다. 사람의 이성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려고 하다는 걸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사라의 반응입니다. 사라는 갑자기 찾아온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이 하신 말씀을 엿듣게 됩니다. 하지만 말씀을 듣는 것과 말씀을 믿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습니다. 사라도 하나님이 하는 말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속으로 웃으면서 중얼거렸다.’라고 말입니다. 

이에 관해 안셀름 그륀은 말합니다. 

사라는 이 말을 듣고 웃었다. 물론 박장대소한 것은 아니다. “사라는 속으로 웃으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늙어 버린 나에게 무슨 육정이 일어나랴? 내 주인도 이미 늙은 몸인데” (창 18:12) 하나님이 사라의 웃음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에게 물으신다. “어찌하여 사라는 웃으면서, ‘내가 이미 늙었는데, 정말로 아이를 낳을 수 있으랴?’ 하느냐? 너무 어려워 주님이 못 할 일이라도 있다는 말이냐?”(창 18:13-14). “사라가 두려운 나머지 ‘저는 웃지 않았습니다’ 하면서 부인하자, 그분께서 ‘아니다. 너는 웃었다’ 하고 말씀하셨다.” (창 18:15)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38

성숙의 능력: 웃음

사라는 웃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웃음’에 집중해 보려고 합니다. 사라의 웃음은 다양하게 해석 가능합니다. 뭔가를 불신하는 마음에서 오는 ‘비웃음’일 수도 있고, 어려움에서 벗어날 때 찾아오는 ‘해방의 웃음’이 있을 수 있고, 또는 내 안에 어떤 가능성을 발견했을 때 솟아나는 ‘가능성의 웃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 웃음이라고 하는 것은 힘이 있습니다. 이 위트와 유머라고 하는 것은 어려운 시기를 지날 때나 아픈 경험을 한 뒤에 몹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독일 출신의 여성 철학자인 나탈리 크납이 쓴 책이 있습니다.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이 그 책인데요. 이 책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위트와 유머는 삶의 어려운 과도기를 지날 때나 트라우마적 경험을 한 뒤에도 중요하다. 

때때로 웃음이 우리 마음을 얼마나 후련하게 하고 가볍게 할 수 있는지를 경험하는 것도 소중하다. 웃음은 힘든 상황에서도 숨을 돌릴 수 있게 하며, 짧은 순간이나마 인생의 모순과 화해하게 한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어느 날 죽는다는 사실과 마주하여 살아 있음에 대한 깊은 동경으로 날마다 행복을 누리기 때문이다. 

나탈리 크납,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 더크로스, 2016, p.225

그러고 보면, 잘 웃는 것도 성숙한 사람이 가진 능력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거리를 두고 볼 수 있을 때라야 사람은 웃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자신의 인생을 지도처럼 쫙 펼쳐두고, 자신이 겪은 일이 그리 큰일이 아닐 수 있음을 깨달았을 때 사람은 힘든 가운데서 웃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사라의 웃음은 의심의 웃음이라기보다는 어떤 가능성에 대한 웃음이었습니다. 창세기 18장 12절을 보면, 사라는 “나는 기력이 다 쇠진하였고, 나의 남편도 늙었는데, 어찌 나에게 그런 즐거운 일이 있으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즐거운 일’이 무엇을 뜻하느냐가 중요한데, 안셀름 그륀은 이 부분을 아주 적극적인 표현으로 해석합니다. 몸의 욕구, 즉 ‘육정’으로 이해합니다. 충분히 이러한 의미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안셀름 그륀은 사라의 웃음에 관해 이렇게 말합니다. 

사라의 웃음을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성경은 이 웃음을 불신으로 이해한다. 사라는 믿을 수 없다. 그 나이에 육정이 일어나리라고 상상할 수 없었다. 성경이 여기서 여자의 생물학적 문제가 아니라, 육정을 말하는 것이 흥미롭다. 사라는 육정을 생각할 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의심이라기보다 육정의 가능성에 대한 웃음이다. 그 순간에 사라는 내면에 숨어 있는 것을 느꼈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정말 아름다울 거라 생각했다. (...) 웃음은 기쁨, 지금 자신의 모습을 긍정한다는 표현이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38

가능성에 대한 웃음

사라의 웃음이 불신의 웃음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이삭’을 낳은 이야기를 통해서 확실해 집니다. 이삭을 낳으면서 사라 스스로는 그 웃음은 하나님이 주신 거라고 말합니다. 

사라의 웃음은 불신의 뜻이 아니다. 이삭을 낳으면서 사라 스스로 그 웃음은 하느님이 주셨다고 말한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웃음을 가져다주셨구나. 이 소식을 듣는 이마다 나한테 기쁘게 웃어 주겠지.’ 그리고 또 말하였다. ‘사라가 자식들에게 젖을 먹이리라고 누가 아브라함에게 감히 말할 수 있었으랴? 그렇지만 내가 늙은 그에게 아들을 낳아 주지 않았는가!’” (창 21:6-7)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39

1. 늙었음에도 육신의 욕구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어떤 기대와 가능성에 대한 웃음 
2. 실제로 이삭을 낳은 후에 짓게 된 웃음 
3. 사람들이 보내올 축복의 웃음 
등으로 보았을 때, 사라의 웃음은 하나님을 비웃는 웃음이 아니라, 가능성과 희망에 관한 웃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안셀름 그륀의 동생 린다 아로슈는 사라의 모습에서 ‘웃음’을 보아낸 것이 놀랍다고 말합니다. 사실 저희도 린다 아로슈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껏 사라에게서는 불임으로 고통 받는 여자의 모습만 보았었는데, 안셀름 그륀을 통해 사라의 웃음이 생의 기쁨과 경쾌함으로 읽힐 수 있다는 게 참 흥미로우면서도 새로운 시각을 전해줍니다. 

여성들의 웃음

특히 남성들보다 여성들은 관계 맺기에 훨씬 우월합니다. 더 탁월하죠. 저희 어머님만 보아도 그런데요. 어머니는 젊은 시절에 비해, 시간이 갈수록 아버지보다 인생의 후반부가 더 바빠지고 재밌어지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 모임들을 통해, 자주 웃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남성들의 만남보다 여성들의 만남에서 훨씬 많은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안셀름 그륀은 말합니다. 

여자들이 만나서 마음껏 웃으면 집에 돌아갈 때는 좀 더 강해지는 것 같다. 일상으로 돌아가 자신의 문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가벼워지고, 자신의 일상을 보다 가볍게 대할 것이다. 날마다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에 억눌리지 않고 웃으며 넘긴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42

물론 웃음이 문제 자체를 해결해주진 않습니다. 하지만 웃음에는 다시 살게 하는 어떤 힘이 나옵니다. 그래서 린다 아로슈는 여자들은 자신의 부족함과 다른 이들이 겪은 삶의 경험을 통해 웃음을 발견한다고 말합니다. 그 안에서 자신을 다시 발견하고, 다른 여자들과 결속되어 있음을 느낍니다. 여성들에게 ‘웃음’은 자기 자신과 서로 서로를 따뜻하게 덥혀주는 ‘아궁이 불’과 같습니다. 

청파 목회실만 보아도 알 수 있는데요. 우리 장영숙 전도사님도 목회실 내에서 가장 웃음이 많으시고, 무엇보다 심방을 하시거나,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자주 웃음꽃을 피우시는 걸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 비해 남자들의 웃음은 초라한 편입니다. 남성들은 주로 시답지 않은 우스갯소리를 하며 웃곤 합니다. (물론 목회실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래서 남성들의 웃음에는 다른 사람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기도 하죠. 여성들은 다른 이를 대상으로 해선 잘 웃진 않습니다. 

하지만 웃음도 억지로 웃으려 하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습니다. 모임이나 대화에서 사람은 계속해서 웃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웃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상황 때문에 계속해서 웃으려고 애쓴다면, 그 웃음은 오히려 부자연스럽고 자신에게 더 스트레스를 주게 될 것입니다. 

노력을 통해 얻는 웃음

마지막으로 나누고 싶은 말씀은 이 웃음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자신의 수고와 노력에 달려있다는 사실입니다. 주어지는 웃음도 있지만 발견하는 웃음, 노력해서 얻는 웃음도 있습니다. 린다 아로슈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시간이 지난다고 삶이 쉬워지는 건 아니더라고요. 삶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웃음을 잃어버린 때도 있었어요. 그런 때 다시 한번 그렇게 웃을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랐어요. 그러다 깨달았지요. 그 웃음을 찾고 말고는 내게 달렸다는 걸요. 지금 삼 년째 알고이(독일 바이에른주에 있는 도시)에 살고 있는데, 이곳 여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항상 그 치유하는 웃음을 봐요. 여자들의 강한 힘으로 웃음을 새롭게 평가하는 법을 지금 배우고 있죠.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47

바로 이 부분 “그러다 깨달았지요. 그 웃음을 찾고 말고는 내게 달렸다는 걸요.”가 중요합니다. 지나간 웃음을 되찾는 방법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때론 우리는 웃음을 잃고 강한 분노를 느끼기도 합니다. 내 안에서 화가 일어나는 일은 건강한 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분노를 나 자신을 물어뜯는 도구로 쓸지, 아니면 웃음을 통해 그 힘에서 풀려나게 될지 결정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우리는 목요 <성서학당> 두 번째 시간을 통해 ‘사라’의 ‘웃음’에 관해 살펴봤습니다. 사라는 여성들 내면에 있는 ‘웃는 여자’, 즉 내게 닥친 문제를 희망과 기대로 바꿀 줄 아는 여자의 모범을 보여줬습니다. 여러분, 웃으십시오! 웃는 사람은 우리 삶에 감춰져 있던 기쁨을 만나게 하는 통로가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

안녕하세요.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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