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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성서학당] 성경 인물의 빛과 그림자 : 하와

20201008 청파교회 목요 <성서학당> : 성경 인물의 빛과 그림자

여왕과 야성녀: 하와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10월, 11월 목요 <성서 학당>에 관해 안내 말씀드립니다. 


8주의 시간은 제가 가진 지식을 여러분께 나눠드린다기보다, 제가 좋아하고 관심 있는 분야를 여러분과 나누고 또 함께 고민해보기 위한 시간입니다. 작년에 이어서, 이번 <성서 학당>에도 참고도서가 있습니다. 메인 교재라고 할 수 있는데요. 작년 <성서 학당> 때 참고한 책의 후속편인 <여왕과 야성녀>입니다. 제목이 참 거창합니다. 이 책은 성 베네딕도회 신부이자 기독교 작가인 ‘안셀름 그륀’과 그의 여동생 ‘린다 야로슈’가 공동 집필한 책입니다. 작년에 함께 나눈 책은 <사랑한다면 투쟁하라>인데, 이 책은 성경에 등장한 남성 인물들의 삶에 비친 ‘빛과 그림자’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통해, 성경에 등장하는 남성 인물들이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또 성립해가는지 그 길을 살펴봤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성경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이 어떻게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고 또 성립해가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성경 인물들의 시기와 사랑, 의심과 믿음, 두려움과 용기 등을 살펴보며 여성의 내면에 담긴 ‘빛과 그림자’를 알아보겠습니다. 

성경과 인간 이해

사실 이 시간은 성경에 등장한 한 인물을 중심에 두고, ‘사람에 대한 이해’(인간 이해)에 접근해 볼 예정입니다. 그렇기에 인문학과 관련된 이야기가 주된 흐름이 될 예정입니다. 성경을 함께 읽어가며 성경 전반에 대한 이해를 기대하신 분은 좀 아쉬운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진행 방식은 안셀름 그륀의 책을 함께 읽어나가며, 설명을 덧붙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주교재가 되는 이 책은 제가 개인적으로 많은 부분 동의가 되며, 무엇보다 저부터 공부한다는 자세로 준비하게 됐습니다. 

이렇게 말하니 굉장히 거창해 보이는데요. 사실 개인적으로 볼 때도 좀 어렵고 어설픈 시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작년에 시작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는 결자해지(結者解之)의 마음으로 시작해보려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겪은 일

첫 시간에 함께 살펴볼 인물은 ‘하와’입니다. 하와는 교회 안팎을 떠나 자주 거론되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하와와 이브는 같은 뜻입니다. 히브리식 발음인 하와(חַוָּה, Ḥawwāh)가 번역되는 과정에서 발음상의 문제로 이브가 된 것입니다. 어쨌든. 성경을 보면, 하와는 최초의 사람인 아담의 갈비뼈를 취해 만든 여자로 아담의 아내이기도 합니다. 본문을 보시죠. 

“주 하나님이 그 남자를 깊이 잠들게 하셨다. 그가 잠든 사이에, 주 하나님이 그 남자의 갈빗대 하나를 뽑고, 그 자리는 살로 메우셨다. 주 하나님이 남자에게서 뽑아 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여자를 남자에게로 데리고 오셨다. 그 때에 그 남자가 말하였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남자와 그 아내가 둘 다 벌거벗고 있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창 2:21-25) 

그녀는 가인과 아벨,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창 4:1-2). 그리고 둘째 아들인 아벨이 죽고 나자 셋째 아들인 셋을 낳게 됩니다(창 4:25). 하와 하면 가장 많이 알려진 이야기가 바로 선악과 이야기이죠. 그녀는 뱀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남편인 아담까지 먹게 하는 죄를 범합니다(창 3:1-6). 이로 인해 죄라는 게 인류 가운데 들어오게 되고, 아담과 하와는 고통을 알게 됩니다(창 3:16-17). 이런 고통이었죠. 

“여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할 것이니, 너는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을 것이다.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 남자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서, 내가 너에게 먹지 말라고 한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 이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는,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창 3:16-17)

‘여성’에게는 출산과 남편의 다스림에 관한 고통이, ‘남성’에게는 죽는 날까지 수고해야 하는 저주가 임합니다. 물론 남편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말과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해야 한다는 말은 죄로 인한 결과물이기에 ‘그것이 옳다,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다.’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여자에서 하와로

다음으로 살펴볼 부분은 그녀의 이름에 관한 또 다른 부분입니다. 좀 흥미로운 부분인데요. 하와의 이름은 처음부터 하와가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창조되었을 때에는 특정한 이름이 없었습니다. 이름은 그냥 ‘여자’였습니다(창 2:23). 하지만 선악과를 먹고 난 후에는 아담으로 인해 ‘모든 산 자의 어머니’라는 뜻의 ‘하와’가 됩니다(창 3:20). 원래 ‘여자’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하와’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는데, 이것이 선악과를 먹고 난 이후라는 게 참 흥미롭습니다. 

‘죄’에 관해서도 생각해볼 것이 많겠지만, 지금은 그녀의 이름이 바뀌었다는 데에 집중해보려 합니다. 처음 하와는 단일한 성(性)을 가진 그저 한 명의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는 하나님과 어긋남(불순종)을 ‘죄’라고 보았다) 하지만 하와를 통해 죄라는 게 세상에 들어왔고, ‘모든 생명의 어머니(새번역)’인 하와를 통해 다음 세대들은 자연히 죄를 유산으로 받게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성경은 하와의 이름이 바뀌는 것을 통해 ‘죄의 유전성’을 보여주려고 했던 게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마치 부모의 기질이 유전되는 것과 유사하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야기에서 기억하면 좋을 것은 죄보다는 하와의 이름이 변하였다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

이제 책을 읽어나가며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잠시 드릴 말씀은 저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여왕과 야성녀>의 저자는 안셀름 그륀 신부입니다. 그는 신학과 철학, 영성과 심리학 등을 공부했던 사람입니다. 특히 칼 융(C.G. Jung)의 분석심리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했기에, 주로 인간의 무의식이라던가, 남성성-여성성 그리고 사람의 내면에 깃든 그림자의 관점에서 인물을 다룹니다. 그뿐 아니라 사람의 원형 즉, 남성의 원형, 여성의 원형에 관한 것도 살펴볼 예정입니다. ‘남성이 가진 고유한 성질은 이러이러한 것이고, 여성이 가진 고유한 성질은 이러이러한 것 아닐까’라는 부분 말입니다. 물론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원형이 한 사람 안에 서로-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잠시 단편적으로 드린 말씀이지만, 성경 속 한 인물을 택해 다음과 같은 관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 볼 예정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몇 개의 텍스트를 골라 한번 이야기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머니: 거룩의 원형

성경은 하와를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라고 말한다. 하와의 여성상은 어머니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생명은 어머니에게서 시작된다. 어머니는 생명을 낳고, 보호한다. 생명을 품고, 돌본다. 생명에 봉사한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5

하와의 뜻은 ‘모든 생명의 어머니’라고 말씀드렸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봐야 할 부분은 바로 ‘어머니’입니다. 모성인데요. 현재 이 영상을 시청하는 분 가운데, 어떤 분은 이미 어머니가 되셨을 거고 또 아직 아직 어머니가 안 된 분들도 계실 텐데, 우리가 현재 누군가의 어머니가 아니어도 누구나 어머니의 자녀일 것이기 때문에, 이 ‘어머니’라는 존재는 우리를 평생 따라다닐 수밖에 없는 개념임은 분명합니다. 

‘어머니’라는 존재는 기본적으로 생명을 낳고 그 생명을 보호하는 역할을 감당합니다. 어머니는 아기를 평균 9개월 정도 본인의 뱃속에 품다가 출산을 합니다. 하지만 진짜 보호는 출산 이후에 더 집중됩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생명을 계속해서 돌보고 그 생명에 자신을 희생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어머니 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이 주로 잉태, 보호, 품음, 돌봄, 희생입니다. 이는 곧 모성이 가진 특징이기도 합니다. 

목사님께서는 ‘자식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는 어머니야말로 ‘거룩의 원형’ 아닐까’라고 말씀하기도 했습니다. 책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태중에 들어온 생명을 지키고 키우기 위해 존재 전체를 바치고, 산고를 겪으며 낳은 자식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는 어머니야말로 거룩의 원형에 가장 가까운 존재가 아닐까?

김기석, <흔들리며 걷는 길>, 포이에마, 2014, p.29

모성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안셀름 그륀의 여동생 린다 아로슈는 오빠의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어머니는 생명을 낳고, 먹이고, 돌보고, 같이 느끼고, 키우고, 보호한다. 이는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사랑하며 돌보고 보호하는 태도로 나타난다. 어머니 역할에서 모성을 발휘하며 거기에 몰두하며 살아가는 여자도 있다. 다른 분야에서 모성을 쏟아붓는 것이 자기 소명이라고 느끼는 여자도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여자는 모성을 표현하고자 한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7

여성분들과 어머님들은 이런 이야기에 얼마나 동의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죠. 어머니라는 존재는 가족 안에서 이러한 역할들을 해냅니다. 생명을 낳고, 먹이고, 돌보고, 보호하며 함께 느낄 줄 압니다. 하지만 또 여성은 가족을 떠나서, 다른 여러 곳에서 자신의 모성을 드러내기도 하죠. 예를 들어 교회 봉사나 자신이 속한 모임 또는 직장에서 그러한 역할을 감당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린다 아로슈는 다음과 같은 형태도 모성의 모습이라고 하는데요. 

자신의 모성 에너지를 표현하려는 여자는 대개 다른 이들을 위해 요리하고, 돌보고, 책임지고 싶어 한다. 성장을 북돋우고, 대범하고 관대하게 다른 이들이 발전하도록 뒷받침하는 것도 모성적 에너지의 표현이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9

그러고 보면, 모성 에너지는 타인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방식으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이어서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예를 드는데요. 

1. 사람들을 위해 요리하고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볼 때 아주 뿌듯해하는 여자들이 있다. 2. 어떤 여자는 사람들에게 정신적 도움을 주거나 영적으로 이끈다. 3. 사람을 건강하게 하고 발전하도록 돕는 데서 성취감을 느끼는 여자들도 많다. 4. 여자가 조직에 생기를 불어 넣거나, 살아 있는 것을 보호하고 성장하도록 돕는 것은 모성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5. 동물을 사랑하거나 식물을 기르는 것도 모성의 표현이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9

이 가운데 자신은 어디에 해당이 되는지 한번 생각해보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물론 사람은 때에 따라 변하고, 같은 특성을 지녔더라도 정도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건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어쨌든 중요한 사실은 여성은 자신의 모성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며 사는 게 가능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젖과 꿀을 주는 존재

하지만 무어니 무어니 해도 모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현장은 바로 ‘자녀와의 관계’에서 일 겁니다. 어머니가 된 여성은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방식으로 자신을 체험합니다. 여성에게 아이만큼 가까운 사람은 없을 겁니다. 아이와의 관계에서 여자는 자기가 누구인지, 자신은 얼마나 성장했는지 또 얼마나 사랑할 준비가 되었는지를 보게 됩니다(p.20). 

어머니는 아이에게 ‘원초적 신뢰’, 즉 최초의 신뢰를 주는 존재입니다. 이 신뢰라는 것이 한 아이를 성장시킴에 있어 아주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륀 신부는 말합니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원초적 사랑’(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습득한 것으로 주위 세계에 대한 신뢰)을 선사한다. “네가 존재하는 것이 좋다. 너는 기쁘게 받아들여졌다.”라는 것을 전해 주어야 한다. 모성은 생명과 세상에 대한 긍정을 의미한다. 세상은 우리가 태어나고 환영받으며 존재해도 좋은 곳이다. 예로부터 창조는 어머니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20

사랑에 관해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의 이름은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이 쓴 <사랑의 기술>입니다. 이 책을 보면, 성경 말씀을 인용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약속된 땅은 '젖과 꿀이 넘쳐흐른다'라고 묘사되고 있다. 젖은 사랑의 첫 번째 측면, 곧 보호와 긍정적 측면의 상징이다. 꿀은 삶의 달콤함, 삶에 대한 사랑, 살아 있다는 행복감을 상징한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문예출판사, 2014, p.73 

흥미롭게 에리히 프롬은 어머니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것을 이 가나안 땅에 비유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약속하셨던 땅이 바로 가나안입니다. 그 가나안은 주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묘사됩니다(민 14:8). 여기서 ‘젖과 꿀’은 안셀름 그륀의 표현으로는 ‘원초적 사랑’을 말합니다. 

먼저 ‘젖’은 아이에게 ‘너는 사랑 받아 마땅하다.’라는 사실을 전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어머니는 아이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아이에게 신뢰를 심어주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젖’은 곧 아이 자신이 스스로에 대해 긍정하게 하는 어떤 밑바탕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자신에 대한 긍정)

그리고 ‘꿀’이라고 하는 것은 쉽게 말해 이런 것일 겁니다. ‘세상은 살만한 곳이야.’, ‘실패와 좌절을 겪어도 나는 삶을 포기하지 않겠어.’라는 마음을 심어주는 것 말입니다. 삶의 달콤함, 삶에 대한 애정, 살아 있음에 대한 행복감 등을 주는 것이 바로 이 ‘꿀’인 것입니다. 이 ‘꿀’을 줄 수 있는 이도 바로 어머니라는 말입니다. (세상에 대한 긍정) 

이렇게 보니, 한 생명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고 또 살아가게 하는 데에 있어 어머니의 역할은 정말 어머 어마한 것 같습니다. 

아이를 떠나보내는 과업

하지만 한편으로 어머니가 갖는 어려움도 많습니다. 아이를 떠나보내야 하는 일인데요. 이건 물리적인 것, 정서적인 것 모두를 포함합니다. 안셀름 그륀은 말합니다. 

아이가 자신의 길을 가고자 할 때 떠나보내는 것은 어머니에게 가장 힘든 과제다. 그렇게 보내면서 어머니는 아이가 돌아올 때 따뜻하게 맞아 주고 그들을 이해해 줄 준비를 한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주는 것, 감사를 요구하지 않는 것, 바로 깊은 영성과 일치하는 어머니의 태도다. 모성을 실현한 여자는 이미 영적인 여자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22

이 말은 <사랑의 기술>에도 동일하게 등장하는데요. 

어머니는 삶에 대한 신념을 갖고, 지나친 걱정을 해서는 안 되며, 어머니의 걱정이 어린아이에게 전해지게 해서는 안 된다. 어머니는 생애 일부를 어린아이가 독립해서 마침내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를 바라는 소망에 바쳐야 한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문예출판사, 2014, p.65-66

어머니라는 존재는 아이를 보호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누구보다 앞서 자녀를 떠나보내야 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최초의 애정과 가장 많은 애정을 주었던 대상인만큼, 그만큼 힘든 과제가 바로 아이를 떠나보내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떠나보냄은 버리는 일과는 전혀 다릅니다. 어머니는 아이가 떠났다 돌아왔을 때, 따뜻하게 맞아 줄 준비도 해야 합니다. 아이에게 기대하지 않고 감사 또한 요구하지 않는 것! 이 어려운 과업이 어머니의 과업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에리히 프롬은 이와 관련해 한 마디 덧붙이는데요. 

사랑하는 어머니인가 아닌가를 가려내는 시금석은 분리를 견디어낼 수 있는가, 분리된 다음에도 계속 사랑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문예출판사, 2014, p.76

물론 이러한 말도 하나의 이론이기에 완전히 이 목표에 도달하긴 어려울 겁니다. 저희는 계속해서-끊임없이 도달하기 위해 애쓰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다가 저 경지에 오를 수 있다면 아주 감사한 일일 테고요. 

책임을 내려놓을 필요도 있다

안셀름 그륀은 이 모성의 측면 가운데 ‘책임’에 관해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책임이라는 말은 양면성이 있는 개념인데요. 일단 모성이 강한 여자는 책임감이 강하다고 말합니다. ‘모성’은 아이들의 일과를 챙겨주고, 집안일의 많은 부분을 감당하기도 하고 또 전체적으로 모든 일이 잘 돌아가는지 살피는 성향입니다. 그래서 이런 모성은 어떤 책임자나 지도자 역할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기도 하는데요. 이러한 모성의 역할은 아주 긍정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책임’에는 양면성이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이렇게 뭔가를 두루두루 살피는 성향의 모성이 지나치게 강해지다 보면 주위 사람을 작아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 여성들은 어떤 일에 관해 자신이 가장 잘 안다는 자신감이 넘쳐, 모든 것을 스스로 떠맡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족 일에 관해서도 그런데요. 그래서 안셀름 그륀 신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짐을 내려놓고 책임을 분담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여자는 자기가 진 짐을 내려놓고 책임을 분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기에게도 뒷받침해 줄 사람이 필요하며, 남자가 자신과는 다른 방법으로 많은 것을 처리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27

책임감이 강한 사람은 좀 느슨하게, 책임감이 덜한 사람은 좀 긴장감을 가질 필요가 있어야겠지요. 결국, 매 순간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자신을 챙길 줄 아는 여성

‘책임’에 이어서 안셀름 그륀은 ‘베푸는 것’에 관해서도 이야기하는데요. 자기 삶을 계획하고 책임질 줄 알던 건강한 여성도 어머니의 역할을 맡게 되면서 약간의 우울감을 겪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우울감은 무조건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륀 신부는 무조건 베풀기만 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하며, 자기를 위한 시간은 몹시 필요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말할 용기가 없어서 과도한 요구를 받아들이는 어머니가 많다. 그들은 자신이 어머니이기 전에 여자라는 사실을 쉽게 잊는다. 어머니도 여자로서의 삶을 표현해야 한다. 여자임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균형을 잃는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28

제가 성남에서 단독목회 할 때, <가버나움> 속회원분들이 오셔서 함께 예배를 드려주셨습니다. 예배를 마치면 짧게 기도 제목을 나누고 함께 중보기도 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속회원분들은 모두 여성들이셨고 또 어머님들이셨습니다. 그런데 참 흥미로운 건, 기도 제목을 나누다 보니 모든 분이 가족을 위한 기도, 자녀를 위한 기도의 제목만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해는 됐습니다. 지금 가장 마음 쓰이는 일이 가족에 관한 일이겠지만, 그 누구도 자신을 위한 기도 제목을 내놓지 않으시는 겁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라도 남편이나 자녀를 위한 기도 제목 말고, 자신을 위한 기도 제목을 말씀해달라고 해도, 너무 이타적인 삶이 익숙해져서인지 그 시도 자체를 어려워하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자신을 돌보고 챙기는 일은 이기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더 나은 관계와 지속적인 관계를 위해 반드시 가져야 할 시간입니다. 개인이었던 사람이 회사 생활을 하거나, 결혼을 하거나, 부모가 되면서 자신을 잃어가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무조건 베풀어야 한다는 마음을 좀 내려놓고, 내가 채우지 못하는 부분은 하나님이 채워주신다는 마음으로 지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그래야 우울감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개신교와 가톨릭: 부성과 모성

말씀을 정리할까 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와에 관해 살펴봤습니다. 그녀의 이름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 그리고 모든 생명의 어머니라는 그 뜻에 담긴 모성에 관해 더 집중해봤습니다. 모성이란 어머니가 된 분에게만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라면 누구나 갖는 어떤 ‘원형의 기질’ 같은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물론 에리히 프롬이 말했듯이, 중요한 사실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한 사람 안에 ‘모성과 부성’이 혼합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각 개인에게는 두 성격이 혼합되어 있으나 ‘남성’ 또는 ‘여성’의 성과 관련된 것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을 뿐임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문예출판사, 2014, p.57

사실 이 어머니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성격 중 한 측면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안셀름 그륀은 말합니다. 

어머니는 하느님의 본질적인 측면을 나타낸다. 어머니는 생명을 선사하고, 그 생명이 변화하며 죽음에서 궁극적으로 변화할 때까지 성장을 깨우치는 위대한 여신이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32

개신교인들이 가톨릭에 대한 많은 오해들을 하고 있는데요. 가톨릭은 전혀 이상한 종교가 아닙니다. 저는 개신교인으로서 가톨릭과 개신교를 비교할 때 다음과 같은 비교를 가장 선호합니다. 흔히 개신교와 가톨릭을 비교할 때, 모성과 부성으로 두 종교를 나누기도 합니다. 가톨릭은 개신교에 부족한 하나님의 모성적 성향을 잘 드러내 주고, 개신교는 가톨릭에 부족한 하나님의 부성적 성향을 잘 드러내 보여줍니다. 따뜻함의 상징인 모성, 법과 질서를 상징하는 부성이 두 종교의 특성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모성: 하나님의 시선

여기까지 오시느라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당부의 말씀은 이겁니다. 모성에 관해 머리와 이론으로 배운 데서 끝내지 말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모성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훈련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텍스트를 읽어드리고 오늘 <성서학당>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모성애, 돌봐 주는 따뜻한 에너지를 갈망한다. 힘들 때 더욱 그렇다. 모성애로 대하는 사람, 나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 붙잡아 주고 품어 주는 사람, 위로해 주고 도와주며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을 만날 때 힘을 얻고 삶을 새롭게 대할 수 있게 된다. 힘들 때 모성을 경험한 사람은 곧바로 나아진 것을 느낀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24

모성의 마음으로 자신을 바라본다는 건 곧 하나님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따스한 시선은 곧 타인에게도 전해지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이 시간을 통해 조금이라도 자신을 새롭게 보게 되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새롭게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

안녕하세요.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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