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024 청파교회 새벽설교
질문에 붙들리기보다
<예레미야 12장 1-2절>
1. 주님, 제가 주님과 변론할 때마다, 언제나 주님이 옳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공정성 문제 한 가지를 여쭙겠습니다. 어찌하여 악인들이 형통하며, 배신자들이 모두 잘 되기만 합니까?
2. 주님께서 그들을, 나무를 심듯이 심으셨으므로, 뿌리를 내리고 자라며, 열매도 맺으나, 말로만 주님과 가까울 뿐, 속으로는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악인은 왜 잘 되는가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은 예레미야 12장입니다. 예레미야 12장은 예레미야의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그 질문은 평소 우리가 궁금했던 질문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묻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과 변론할 때마다, 언제나 주님이 옳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공정성 문제 한 가지를 여쭙겠습니다. 어찌하여 악인들이 형통하며, 배신자들이 모두 잘 되기만 합니까?”(1) 간단히 말해서, 예레미야는 왜 악인들이 잘 사느냐는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만사가 형통한다는 그 만사형통의 복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만 있어야 하는데, 예레미야가 보기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너무 승승장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이러한 질문은 구약성서에서 종종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욥기>가 그러합니다. 욥기 12장 7-15절을 보면, 욥은 그의 친구 소발이 자신을 정죄하는 이야기를 듣고 다음과 같이 답합니다. “어찌하여 악한 자들이 잘 사느냐? 어찌하여 그들이 늙도록 오래 살면서 번영을 누리느냐?(7) (...) 그들은 그렇게 일생을 행복하게 살다가, 죽을 때에는 아무런 고통도 없이 조용하게 스올로 내려간다(13).” 예레미야의 질문과 거의 흡사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시편 기자도 비슷한 궁금증을 가졌습니다. 시편 73편에서 시편 기자는 ‘자신이 거만한 자를 시샘하고, 악인들이 누리는 평안을 부러워했’(3)음을 시인했습니다. 그리고 악인들의 ‘신세가 언제나 편하고, 재산은 늘어만’(12) 가는 모습 때문에 힘들어했음 또한 인정했습니다.
호소와 요청
악한 자들이 잘 사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주님은 과연 공정하신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합니다. 사실 이러한 생각은 주로 관계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이와 갈등이 생겼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나는 주님의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 애씁니다. 헌신하고 자신을 희생합니다. 마음은 불편하지만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인내합니다. 그런데 상대방은 자신과의 관계에서 어떤 수고와 노력도 안 했는데, 승승장구하기까지 합니다. 그럼 우리는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선한 사람에게 주어질 형통함과 악한 사람에게 내릴 심판이 성취되지 않음에 의심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아주 협소한 예시일 수 있으나 우리 일상에서 종종 발생하는 경우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 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 악인들은 형통하며, 배신자들이 모두 잘 되는지를 말입니다. 다만 우리는 주님께 아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결백함을 주님께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마음을 감찰해 달라고 호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악인들의 행위를 심판해 달라고 요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께서는 저를 아십니다. 주님은 저의 속을 들여다보시고, 저의 마음이 주님과 함께 있음을 감찰하여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도살할 양처럼 끌어내시고, 죽일 날을 정하셔서 따로 갈라내 두십시오.”(3) 예레미야는 자신의 마음이 늘 주님께 향하고 있음을 알아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 있는 자들을 심판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다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은 하나님의 손에 맡겨두어야 합니다.
예레미야의 호소, 주님의 심판
예레미야가 사실 이처럼 선인과 악인을 대조하며 말한 이유는 동족이었던 남유다 사람들의 위협 때문이었습니다. (어제 다루었던) 예레미야 11장에서 예레미야는 자기 고향 사람들이었던 아나돗(1:1) 사람들의 암살 계획을 듣게 됩니다. 그는 연약함 중에도 성실히 주님의 일을 행했는데, 오히려 동족으로부터 배신자 취급을 당하고, 목숨까지 잃을 위험에 처한 것입니다. 그는 억울했고 분노했습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믿음을 지킨 수고의 결과가 죽음이라는 사실에 억울했고 또 주님이 결국 자신을 죽음에 내버려둔 것에 분노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 호소하듯 오늘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예레미야의 속마음을 다 알고 계셨다는 듯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집을 버렸다. 내 소유로 택한 내 백성을 포기하였다.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 백성을 바로 그들의 원수에게 넘겨 주었다.”(12) 여기서 집과 소유는 곧 유다 백성과 유다 땅을 가리킵니다. 주님은 집을 버리고 소유를 포기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자기 백성을 잡았던 손을 끝내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
그러나 우리는 오늘 본문 마지막 문단을 읽으며 하나님의 진짜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이미 살펴본 대로 주님은 자신의 백성을 포기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기 백성뿐만 아니라 자기 백성을 꾀어 우상 숭배를 하게 한 민족 또한 벌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 주가 말한다.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유산으로 준 땅을 침범한, 모든 악한 이웃 백성을 두고 말한다. 내가 그 악한 백성들을 그들의 고향 땅에서 쫓아내고, 유다 백성을 그들 가운데서 구하여 내겠다.”(14) 주님은 자신이 택한 민족에게 바알의 이름을 부르며 맹세하도록 가르친(16) 자들을 그들의 땅에서 쫓아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주님은 유다 백성이나 이방 민족 모두를 벌할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주님은 한마디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그들을 쫓아낸 다음에는, 다시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 제 땅, 제 고향으로 되돌려 보내겠다. 비록 그들이 내 백성에게, 바알의 이름을 부르며 맹세하도록 가르쳤지만, 그들이 내 백성의 도를 확실하게 배우고, 내 이름을 부르며 '주님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면, 그들도 내 백성 가운데 들게 될 것이다.”(15-16) 주님은 때때로 불같이 화를 내는 분이시지만 주님의 기본적인 성품은 화평(평화)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쫓아낸 이방 민족을 불쌍히 여겨서 다시 그들이 살던 땅으로 되돌려보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조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이방 민족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하나님을 믿는다면 자기 백성으로 품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자신의 말에 복종하지 않으면, 그 민족 또한 결국 이 땅에서 뿌리째 뽑아 멸망시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17).
온전해지기를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에서 전형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봅니다.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그의 책 <사랑의 기술>에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조건이 있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 본성에는 복종이라는 개념이 매우 중요하고, 그렇기에 반대 개념인 불복종은 중요한 죄라는 사실이 놓여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이처럼 엄격한 것은 자녀들이 삶이 던지는 문제들을 잘 해결하고, 세상으로 용감하게 들어설 수 있도록 돕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구약의 하나님이 법, 질서, 조건을 강조하는 이유는 자녀들을 속박하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자녀들이 자기 삶을 책임지고, 삶이 건네는 질문에 올바른 답을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일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질문을 품고, 때로는 답을 내리지 못하고 오랜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우리는 왜 악인들은 형통하며, 배신자들이 모두 잘 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다만 우리는 우리의 결백함을 주님께 호소할 따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실 일을 다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역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이 한 가지 사실만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 안에서 온전해지기를 바라십니다. 온전해진다는 것은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고, 마땅히 들어야 할 것을 듣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점점 온전해져서 주님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살롱(salon)에서 나누는 말씀 사색
www.youtube.com
'Not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파 Note / 예레미야서 (6)] 유혹은 늘 있을 것인데 (0) | 2024.11.07 |
---|---|
[청파 Note / 예레미야서 (5)] 우리의 몸과 마음은 어디를 향하는가 (0) | 2024.10.30 |
[청파 Note / 예레미야서 (3)] 하나님이 바라시는 교회와 예배 (0) | 2024.10.17 |
[청파 Note / 예레미야서 (2)] 마음의 포피를 자르라 (0) | 2024.10.13 |
[청파 Note / 예레미야서 (1)] 나를 발견하게 해 주는 책 (0) | 2024.1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