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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중고등부] 그분이 하실 일

20190428 청파교회 중고등부 설교

그분이 하실 일

<사도행전 6장 8-15절>

8. 스데반은 은혜와 능력이 충만해서, 백성 가운데서 놀라운 일과 큰 기적을 행하고 있었다.
9. 그 때에 구레네 사람과 알렉산드리아 사람과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으로 구성된, 이른바 리버디노 회당에 소속된 사람들 가운데에서 몇이 들고일어나서, 스데반과 논쟁을 벌였다.
10. 그러나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므로, 그들은 스데반을 당해 낼 수 없었다.
11. 그러므로 그들은 사람들을 선동하여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습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
12. 그리고 백성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을 부추기고, 스데반에게로 몰려가 그를 붙잡아서, 공의회로 끌고 왔다.
13. 그리고 거짓 증인들을 세워서, 이렇게 말하게 하였다. "이 사람은 쉴새 없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을 합니다.
14. 이 사람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뜯어 고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습니다."
15. 공의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모두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았다.

<어벤저스> 에피소드

여러분! 봄이 왔는데, 요즘 마음은 좀 어떤가요? 저는 뒤숭숭합니다. 왜냐면 겨울 동안 감춰졌던 어떤 아름다움들이 막 뿜어져 나오는데, 저의 몸이 그 아름다움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기분은 들뜨는데,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서 저는 가능한 최대한 많이 이 봄을 느끼자는 마음으로 지내고 있어요. 

그런데 최근 제 마음을 더 들뜨게 만든 영화가 있어요. <어벤저스: 엔드게임>입니다. 그런데 요즘 참 감사하면서도 창피한 것은 제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 어벤저스 얘기를 하다 보니, 저를 보며 ‘마블 전문가’라고 하는데, 어느 정도냐면 장난으로 교회에서 마블 특강까지 해달라는 이야기까지 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건대, 저는 진정한 마블 마니아들의 신들메(혹은 신발끈, 들메끈: 벗겨지지 않도록 신을 발에다 동여매는 끈)를 풀 자격조차 없습니다. 제가 아는 정보는 아직 갓난아기에 불과합니다. 

아무튼, 마블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한번 해볼까 하는데요. 모든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항상 인물들 간의 갈등이 나오기 마련인데요. 역시 <어벤져스>에서도 몇 가지의 갈등이 등장합니다. 

이번 <엔드게임>에 관해 이야기하면, 스포일러가 될까봐 바로 이전 영화인 <인피니티 워>에 관해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인피니티 워>에 등장한 가장 큰 갈등은 무엇이었나요? 우주의 절반을 파괴하고 질서를 다시 세우려는 타노스와 이를 저지하기 위한 어벤저스 사이의 갈등이 그려집니다. 

타노스는 자신이 아주 필연적인 존재라고 느끼며, 앞으로 우주의 생명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다가는 결국 모두가 몰살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인피니티 스톤을 모아 우주의 미래를 새로 건설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어벤저스의 생각은 다릅니다. 그들은 가능성을 믿고 실패를 경험하더라도 사람을 신뢰하기를 선택합니다. 두 개의 ‘옳음’ 사이에 타협은 없게 되고, 결국 서로 간의 갈등을 피할 순 없게 됩니다. 그러니까 타노스와 어벤저스 모두 각자만의 생각과 판단, 기준들이 있었고, 이를 굽히지 않았기에 갈등은 피할 수 없는 필연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갈등은 피할 수 없다

여러분! 사실 우리는 살아가며 갈등을 피할 수 없습니다. 가족 간에도 그렇고, 친구 간에도 그러하며 교회생활을 하면서도 갈등을 피하긴 어렵습니다. 특히 친구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더욱 잘 드러납니다. 관계가 깊어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갈등은 필요합니다. 우리가 연애를 할 때도 그렇잖아요. 처음엔 모든 것이 다 좋아 보이다가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생기고, 안 보이던 것도 보이게 되면서 자연스레 갈등을 겪게 됩니다. 그렇다고 어디 완벽한 애인이 있던가요? 없죠.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 갈등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지만,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럼 이 갈등 앞에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입니다. 물론 갈등이 깊으면 깊을수록, 해결하는 데에도 많은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갈등이 해결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 가진 ‘옳음’ 즉, 자신은 옳고 상대방은 그르다고 여기는 생각 때문인 경우가 가장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에 이런 말씀을 하셨죠. 한번 들어보세요.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아라.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마 5:39-44) 

예수님께서는 반전의 사나이였어요. 그분의 말씀은 늘 상식을 벗어나기 일쑤였어요. 방금 읽어드린 말씀은 평소 우리가 자주 들었던 말씀이기도 한데, 분명한 사실은 마태 공동체는 예수님이 하신 이 말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좋은 게 있나요

그런데 여러분! 이 말씀을 들으면 기분이 어때요? 마음에 드나요? “그래, 나는 오늘부터 당장 내 양쪽 뺨을 친구들에게 마구 내주겠어.” 또는 “내 속옷이 그리 깨끗하진 않지만, 친구가 원한다면 속옷뿐만 아니라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옷 전부를 내어주겠어.” 이런 생각이 드는 친구가 있나요? 그런 친구가 있다면 지금 말하세요. 지금 당장 시원하게 뺨 좀 때리고, 속옷 좀 빌려가게요. 

근데 여러분, 저는 그래요. 이런 예수님의 말씀이 많이 부담스러워요. 더 솔직히 이야기하면,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별로 하고 싶지가 않아요. 왜냐면 제 마음이 그걸 원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누가 내 오른쪽 뺨을 치면, 뒤좇아 가 그냥 확 뒤통수까지 때리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이에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었을 거예요. 아니, 적어도 우리가 교회를 다니면서 ‘좋은 점’ 하나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저는 좋은 점을 이렇게 생각해 보는데요. 좀 어려운 말처럼 들릴 텐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본능에 따라 사는 것보다, 자신의 본능을 넘어서거나 초월해서 사는 삶이 더 보람 있고 즐거운 삶이라고 이야기해 주는 거 같아요. 

저는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며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는 데에 적극 동의하지만, 사실 우리는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한 거 같아요. 내가 ‘인피니티 스톤’을 갖는 것이 인생의 목표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이 ‘인피니티 스톤’을 왜 갖고 싶은지를 따져보면 정말 자신이 원하는 것은 다른 곳에 있음을 발견하기도 하는 것이죠. 

아무튼 오늘은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자세히 나눌 순 없지만, 이 시간을 통해 우리가 함께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분명 우리 삶에 이로운 점이 있다는 것과 또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데반과 리버디노 회당 사람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사도행전> 말씀을 보면, 열두 사도들과 함께 일할 ‘일곱 일꾼’이 뽑힌 걸 알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자주 들었던 인물 ‘스데반’이 등장합니다. 성경은 말하길, 그는 은혜와 능력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이 대놓고 칭찬하는 사람은 몇 없는데, 이 스데반이 칭찬을 들은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에게 사로잡힌 사람으로서, 많은 이적들을 행했습니다. 그러나 숱한 역사만 돌아봐 알 수 있듯이, 누군가 갑자기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인기가 많아지면 반드시 그를 방해하는 세력들이 나타난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스데반 역시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건, 이 부분인데요. 혹시 오늘 본문에서 스데반과 논쟁을 벌인 사람들이 누구라고 나와 있던가요? 성경은 말하길, “구레네 사람과 알렉산드리아 사람과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으로 구성된, 이른바 리버디노 회당에 소속된 사람들 가운데 몇(9).” 명이라고 말합니다(구레네: 리비아, 알렉산드리아: 이집트, 길리기아: 터키 동남쪽, 아시아: 터키) 그런데 이 ‘리버디노’가 무슨 말인가 싶으시죠? 쉽게 말해, 이 사람들은 종이었다가 자유인이 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로마의 포로로 종살이하다가, 로마로부터 해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유대인을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건, 이들과 스데반의 차이점입니다. ‘스데반’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리버디노’ 회당에 소속된 사람들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두 집단의 ‘차이’라고 한다면, 이 ‘예수님’이라는 인물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았느냐 그렇지 않았느냐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두 집단이 엄청 큰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어쩌면 서로 큰 차이가 없는 ‘동일한 믿음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만 아는 ‘하나님 상’

어쨌든 스데반과 리버디노 회당에 속한 사람들 간에 논쟁이 벌어졌고, 리버디노 사람들은 이 논쟁에서 스데반을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그들 사이에 갈등이 깊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스데반을 당해내지 못한 사람들은 자존심이 많이 상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여러 사람을 선동해 그를 ‘공의회’로 끌고 갑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괜히 그를 의심하여 ‘종교재판’에 넘긴 것입니다. 

그를 공의회에 넘긴 이유는 좀 어의가 없는데, 그가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였고, 예수라는 인물이 회당을 없애고 모세의 율법을 뜯어고칠 거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리버디노 회당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마음이 닫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몹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완고했습니다. 고집이 셌어요.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던 ‘하나님 상’이 너무 견고했어요. 그것이 좋은 믿음이라고 여겨, 어떤 의심의 여백도 없던 사람들이었어요. 결국, 오늘 이야기가 보여주는 갈등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아요. ‘내가 믿는 하나님’과 ‘당신이 믿는 하나님’ 사이의 충돌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을 소유하고자 하는 소유욕, 독점욕과도 같은 거예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 마지막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러한 갈등상황에 처한 스데반의 얼굴이 어떻다고 쓰여 있던가요? ‘천사의 얼굴’ 같았다고 했습니다. 사실 저 같으면 억울하고 답답해서 천사의 얼굴은 개뿔, 그 뭐야 <엔드게임>에서 ‘미래에서 온 타노스’처럼 미치고 팔짝 뛰었을 거예요. 

사실 저는 스데반이 스스로 노력해 ‘천사의 얼굴’을 갖게 됐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도행전>이 ‘성령의 역할’을 계속해서 강조하듯, 오늘 스데반이 경험한 사건에도 성령님의 역할이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의지’와 ‘판단’을 벗어나게 합니다. 스데반은 그저 자신이 느끼고 감동한 것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는 그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만 이야기했을 뿐, 어떠한 부담이나 두려움 없이, 자신이 만난 하나님에 관해 증거하고 다녔던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살아가면 갈등을 피할 수 없습니다. 부모님과 친구, 애인과의 갈등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갈등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꾸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이 갈등에서 벗어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닌데, 이 갈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도움을 구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한계와 자신도 분명 잘못 생각할 수 있음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아무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조금은 덜 부담스러워해도 좋을 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사는 건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도움으로 되는 것이기에 하나님 말씀을 너무 무겁게만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인생의 문제가 생겼을 때, 하나님이 나를 통해 하실 일을 기대하며 도움을 청하기만 하면 됩니다. 신앙은 훈련이기에 반복이 필요해요. 그렇기에 일부러 의식하면서라도 성령의 도움을 구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선 여러분의 진심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럼 함께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살롱에서 나누는 말씀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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