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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2부 예배] 칼과 겉옷

20230326 청파교회 2부 설교

 

칼과 겉옷

 

<누가복음 22장 35-38절>

 

35.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돈주머니와 자루와 신발이 없이 내보냈을 때에,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더냐?" 그들이 대답하였다. "없었습니다." 

36.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제는 돈주머니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챙겨라, 또 자루도 그렇게 하여라. 그리고 칼이 없는 사람은, 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 

37.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는 무법자들과 한 패로 몰렸다'고 하는 이 성경 말씀이, 내게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과연, 나에 관하여 기록한 일은 이루어지고 있다." 

38. 제자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여기에 칼 두 자루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넉넉하다" 하셨다.

 


시간의 속도

참 좋으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길 빕니다. 여러분께서도 저마다 그런 날들이 있으실 겁니다. 피하고 싶은 날, 도망가고 싶은 날, 외면하고 싶은 그런 날들이 있으실 겁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그런 날들은 왜 그렇게 빨리 돌아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시간의 속도는 일정한데, 왜 어떤 날은 빨리 돌아오고 또 어떤 날은 천천히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시간 속에서 의미라는 것이 작동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념일을 만드는 것

사실 우리가 살아가며 또 언제 시간의 속도를 크게 느끼나 하면, 나이가 들어가면서입니다. 어르신들이 공통으로 하시는 말씀 가운데 하나가 바로 ‘언제 세월이 이렇게 흘렀나?’입니다. 이 말에 얼마나 공감하실지 모르겠는데요. 많은 분들이 동의하는 내용 중 하나가 아이일 때보다 어른일 때 시간의 속도가 훨씬 빠르게 간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는 것은 우리의 기억 혹은 우리의 경험과 관계됩니다. 어른들은 과거를 어떤 식으로 기억하냐면, 영상처럼 기억하지 않고 마디마디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반대입니다. 아이들의 기억은 마디가 매우 짧아서 세상이 마치 동영상처럼 기억되고 저장됩니다. 그에 비해 어른들은 단편적인 기억, 내게 일어난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기억되기 때문에 시간의 속도가 훨씬 빠르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지나온 시간을 떠올려보면, 어떤 사건이나 이슈 혹은 경험들을 중심으로 생각이 떠오르는 걸 느끼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러므로 내게 일어난 일들, 다시 말해, 내 삶에 사진과 같은 순간들이 줄어들 때 삶이 빠르게 흐른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지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 바로 끊어내는 작업입니다. 반복적인 일상을 끊어내고 의도적인 기념일들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삶에 크고 작은 이벤트들을 만들어야 삶의 속도도 늦출 수 있고 또 삶이 조금이라도 더 풍성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교회력도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행적을 잊지 않기 위해 매년 기념일들을 만드는데, 그것이 바로 교회력입니다. 절기들을 반복함으로 마땅히 기억해야 할 것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실제로 시간을 붙들 순 없겠지만, 그래도 시간의 속도를 늦출 수 있는 방법은 의도적인 기념일들을 만들고 다양한 경험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죽음을 통해 본 시간

지금 교회학교도 사순절을 열심히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 시간이나 분반 공부 시간에도 절기에 맞는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 교회학교에서 나눌 말씀 또한 누가복음의 말씀인데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 말씀부터 살펴볼까 합니다.

예수께서는 곳곳을 다니시며, 치유사역을 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루살렘에 도착하십니다. 예루살렘은 예수께 영광스런 장소이긴 하나 영광 이전에 고난의 장소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예수는 모욕을 당하고, 수난을 당하셨습니다. 자기의 길을 알고 있던 예수는 복합적인 감정을 갖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죽음을 향한 본격적인 여정을 시작합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기도를 하러 올리브 산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십니다. 천사가 나타나 예수를 위로해주려고 하지만, 죽음을 앞둔 예수의 근심을 가볍게 해주진 못합니다. 예수께도 죽음은 미지의 세계, 즉 가보지 않은 두려움의 세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위대한 점은 바로 다음 순간에 드러납니다. 예수의 위대함은 두려움 가운데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피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께서 죽음의 잔을 거두어주길 바랐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뜻보다 아버지의 뜻을 앞세웠습니다.

저는 예수께서 겪으신 이 고난의 여정을 한번 상상해봤습니다. 내가 곧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예수에게 있어서 죽음은 과연 어떤 속도로 다가왔을까가 궁금했습니다.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는 아주 성실히 또 바쁘게 사셨습니다. 물론 홀로 기도하거나 쉼을 갖는 시간도 가지셨지만, 공생애의 기본값은 ‘바쁨 혹은 부지런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삶은 마디마디로 끊어지지 않고 마치 영상처럼 길게 이어진 삶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는 곧 체포됩니다. 그리고 공의회 앞에 서게 되고, 빌라도에게 신문을 받습니다. 죽음을 앞둔 예수께 이 모든 건 아주 찰나와 같았을 것입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여전히 미지의 세계이고, 죽음의 공포는 사람을 경직되게 합니다. 죽음은 곧 소멸입니다. 특히 나의 죽음은 나의 존재가 무(無)로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타인의 죽음과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죽음을 묘사한 흥미로운 글귀가 있어 읽어드릴까 합니다.

타인의 죽음은 내가 사는 세상의 한 조각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죽음은 나의 삶과 내 자신, 내가 인식하고 상호작용하는 세상 그 자체가 통째로 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없으면 내가 인식하는 세계 자체도 없다. (...) 타인의 죽음이 '나'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게 하는 (하나의) 사건에 지나지 않는 반면, '나'의 죽음은 그런 감정을 느끼는 주체 그 자체의 소멸이다. 세상은 그대로 있는데 '나'의 존재만 무로 바뀐다는 것, 이것보다 더 처절한 상실이 있을까. 죽음에 대한 공포감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생각의길, 2014, p.98-100)

예수께도 죽음은 받아들이기 쉬운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알았을 때, 예수는 소멸에 대한 불안감에 사로잡혔을지 모릅니다. 그때부터 매순간이 달라보였을 것이고, 매순간이 새롭게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삶의 체감 속도는 이전보다 훨씬 빨랐을 것입니다.

삶을 너무 무겁게 대하지 말라

오늘 저희가 함께 나눌 말씀은 방금 말씀드린 내용 바로 앞에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는 기도하러 산을 오르기 전, 제자들과 함께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이미 들어서 아시겠지만, 오늘 본문이 좀 난해하고 아리송한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면, 한 번도 폭력적인 모습을 보인 적 없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칼을 마련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 한 가지를 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돈주머니와 자루와 신발이 없이 내보냈을 때에,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더냐?”라고 질문하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이 이야기는 누가복음 10장의 이야기를 먼저 알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1-12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먼저 함께 일할 동역자들을 모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람들 곁으로 보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이 적다. (....) 가거라,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예수께서는 일꾼들을 보내시며, 그들의 안위에 대한 염려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 되, 전대도 자루도 신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전대는 옛날 지갑을 말한다는 걸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예수께서는 떠나는 제자들에게 돈도 챙기지 말고, 자루나 신발도 챙기지 말고 그냥 떠나라고 명하십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좀 무책임해 보일 수 있는 예수의 이 발언은 현장 감각을 익히라는 하나의 시험과도 같은 말이었습니다. 현장이 주는 온도를 느껴봐야 어떤 방식으로 또 어떤 강도로 복음을 전해야 할지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제자들이 마주해야 할 상황은 어려움이 반 보람이 반이었을 것입니다. 예수에 대한 사람들의 호감도가 아직은 높은 편이었기 때문입니다.

공생애 중반까지만 해도 예수는 사람들로부터 넉넉한 호의와 환대를 받았습니다. 예수는 높은 자, 낮은 자 가릴 것 없이 사람들로부터 많은 초대를 받았고, 존경 또한 많이 받았습니다. 제자들이 활동할 무대가 그리 차갑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는 제자들을 향해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자유롭게 떠나라고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영접하면 그들과 즐겁게 어울리면 되고 또 만약 사람들이 거부하면 발의 먼지만 털고 돌아서면 그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이 삶을 너무 무겁고, 민감하게 대하지 않길 바랐습니다. 현실적인 고민은 잠시 내려놓되, 하나님의 도움을 믿고 한번 부딪쳐보기를 바랐습니다.

상황의 변화에 따른 제안

그런데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 10장의 말씀을 전복시킵니다. 예수는 오히려 지갑도 챙기고, 자루도 챙기고 또 칼 없는 사람은 옷을 팔아서 칼까지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먼저 누가복음 10장의 상황을 상기시키며 이렇게 묻습니다. “내가 너희를 돈주머니와 자루와 신발이 없이 내보냈을 때에,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더냐?”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당시 현장에 있던 제자들은 전혀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다고 답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환대와 호의를 떠올렸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예수께서는 상황이 급격히 변한 것을 아셨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이 이전과 달리,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돈주머니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챙겨라, 또 자루도 그렇게 하여라. 그리고 칼이 없는 사람은, 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 모든 것을 두고 떠나라던 예수께서 이번에는 어찌 된 일인지 모든 것을 챙기라고 당부합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무엇을 전하고자 하셨던 것일까요?

우리는 살다 보면, 사람들의 태도가 쉽게 바뀌는 걸 경험합니다. 사람들은 누군가와의 관계가 자신에게 이로울 때면 그를 내 편으로 여기다가, 그렇지 않을 때면 금방 적대적으로 변합니다. 예수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동일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가 자신들이 그려왔던 기호에 맞을 때는 그를 위한 노래를 불렀습니다. 간과 쓸개 할 것 없이 다 내어줄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와 얽혀서 좋을 게 없거나 오히려 자기 신변에 더 악영향이 끼칠 것 같을 때는 과감히 등을 돌렸습니다. 이러한 군중 심리나 자기중심적인 태도는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어쨌든 예수는 종종 감정을 드러낸 적은 있을지언정 폭력적인 조치를 취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랬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겉옷을 팔아서 칼을 준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인내심에 한계를 느꼈던 것일까요?

현실과 이상의 균형

우리는 종종 생각합니다. ‘잘 사는 인생은 어떤 인생일까?’하고 생각해 봅니다. 질문에 대한 여러 답들이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적절히 균형 잡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평소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여러분은 이런이런 유형에 가깝다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여러분은 매우 현실적인 사람입니까? 아니면 이상을 좇는 사람입니까?

‘현실적이다’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부터 떠오르십니까? ‘저 사람 참 현실적이다’라고 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뭔가 책임감이 강하고, 맡겨진 일을 성실히 잘하며, 인간관계 또한 깔끔한 사람을 떠올립니다. 아주 나이스한 사람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 가까이 있으면 어떻습니까? 내가 실수하거나 곁길로 빠질 오류에 덜 빠지게 됩니다. 뭔가 든든하고 묵직한 느낌을 줍니다.

그러면 반대로 ‘저 사람 참 이상적이다.’, ‘저 사람은 참 꿈꾸는 사람 같다’는 말을 할 때, 우리는 주로 어떤 생각을 떠올립니까? 뭔가 유쾌하고, 낭만적이며, 창의력이 높은 사람을 떠올립니다. 자유롭고 경계선을 잘 넘나드는 그런 사람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 가까이 있으면 어떻습니까? 자주 웃게 되거나 삶의 의욕이 샘솟는 것 경험하게 됩니다. 그는 한 마디로 우리를 가볍게 해 주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어떤 성향의 사람이든 이면이 있기 마련입니다. 현실적인 사람은 어떻습니까? 책임감이 강한 반면, 무겁습니다. 현실적인 생각에 묶여 지나치게 진지해지거나 무거워지기 쉽습니다. 그럼 이상을 좇는 사람, 꿈꾸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유쾌하고 낭만적이긴 하나 진중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세상을 너무 긍정적으로만 보기 때문에, 가벼워지기 쉽습니다.

이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예수

복음서를 통해 드러난 예수는 현실과 이상을 잘 넘나드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물론 어떤 모습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한쪽 면이 더 부각되어 보일 순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억압받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사셨던 예수는 아주 현실적인 인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가 오직 땅의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처럼 비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꿈꾸는 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사람들과 잘 어울렸고, 먹고 마시는 것도 좋아했습니다. 사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부터가 땅보다는 하늘에 더 가까운 자임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는 전대도, 자루도 그리도 신발조차 가지고 가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제자들을 향해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는 그들에게 평화를 빌어 주되, 어떤 것도 소유하지 말 것을 당부했습니다. 예수는 어쩌면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 현실의 무거움 만으로는 접근할 수 없고, 때로는 무모하고 때로는 충분히 가벼워져야 접근할 수 있는 세계임을 보여주고자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는 누가복음 22장에서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예수는 이번에는 무소유가 아닌 Full-소유를 주장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는 제자들을 향해 돈주머니도 챙기고, 자루도 챙기고 그리고 혹시 칼이 없다면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사라고 명했습니다. 1세기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겉옷이 속옷보다 중요했습니다. 일교차가 심한 팔레스타인에서 겉옷은 밤의 추위를 막아주는 이불 대용으로 사용됐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겉옷을 팔아서 칼을 사라는 말씀은 자신을 보호할 장비를 팔아 칼을 사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이 말은 마치 방어용 수단은 버리고 공격형 수단을 장만하라는 말처럼 들리는 게 사실입니다. 예수는 죽음의 때가 가까이 오고 있는 만큼 제자들에게 상황의 긴박함을 전하고 싶으셨는지도 모릅니다.

제자들의 오해

마치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것 같은 예수님의 이 말씀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단편적으로 보여줍니다. 함께 사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서로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비슷한 성향의 사람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없는 차이를 보이는 게 사람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가지 관점만 고수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엔 다양한 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지나치게 낭만적이어도 안 되고 또 그렇다고 지나치게 현실적으로만 세상을 바라봐서도 안 됩니다. 현실과 이상의 경계를 잘 넘나드는 게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 제목을 <칼과 겉옷>이라고 정했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오해했지만, 예수께서 칼을 장만하라고 하신 것은 당연히 누군가를 헤치기 위한 도구를 마련하라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체포될 당시 예수 곁에 있던 한 사람이 예수를 잡으러 온 자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칼을 댔습니다. 그러자 예수는 그를 심히 꾸짖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겉옷을 팔아 칼을 마련하라고 하신 것은 누군가와 강하게 맞서 싸우라는 말이 아니라 앞으로 닥칠 일들에 무방비로 맞서지 말 것을 당부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자신을 지킬 줄 알라는 하나의 비유였던 것입니다. 38절에 제자들이 “주님, 보십시오. 여기에 칼 두 자루가 있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예수께서는 “그래, 넉넉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충분하다, 라는 의미보단 제자들의 오해에 대한 어떤 체념에서 나온 말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눈뜬 자, 꿈꾸는 자와의 어울림

산다는 것 자체가 무거운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돈주머니와 자루와 신발 없이도 살 수 있는 삶을 꿈꾸셨습니다. 저마다 조금은 가볍고, 유쾌하게 살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때로는 칼을 준비해야 할 때도 있음을 아셨습니다. 삶을 무방비로 맞서지 말고 때로는 무겁고 때로는 진중하게 대할 필요가 있음을 아셨습니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늘 고려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 개인의 삶에서 이상과 현실이 적절한 균형을 맞추는 게 필요합니다. 한쪽으로만 치우치거나 사고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가벼움과 무거움을 잘 넘나들 줄 알아야 어려운 순간을 잘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다른 이들과 잘 어울려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상을 추구하는 자 또는 현실에 깊이 발 딛고 사는 자와 잘 어울려 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현실적인 사람은 이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을 못마땅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생각의 차이가 크기 때문입니다. 물론 맞습니다. 이상을 좇는 자들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주진 못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꿈꾸는 자들 덕에 우리는 덜 절망할 순 있습니다. <광신자 치유>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이스라엘 소설가 아모스 오즈가 이 상황을 아주 잘 묘사했습니다. 그는 <유다>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꿈꾸는 자들은 복이 있고, 눈뜬 사람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네. 물론 꿈꾸는 자들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고,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제자들도 그렇겠지만, 꿈도 없고, 꿈꾸는 자들도 없다면 우리 앞에 도사리고 있는 저주가 일곱 배는 더 무거워질 걸세. 꿈꾸는 자들 덕분에 우리도, 눈뜬 자들도, 그들이 없을 때보다는 좀 덜 무서워하고 덜 절망할 걸세.” ​(아모스 오즈, <유다>, 최창모 옮김, 현대문학, 2021, p.204)

꿈꾸는 자들은 당장 눈앞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 덕에 사람들은 덜 절망하고 덜 중력에 이끌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꿈꾸는 자들은 세상에 눈을 뜬 현실적인 사람들 덕에 삶의 어려운 순간을 더 큰 어려움 없이 잘 통과해 나갈 수 있습니다.

서로에 대한 상상력

서로 다른 이가 함께 어울려 사는 문제! 이 문제는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결코 포기해서도 안 되는 문제입니다. 예수는 칼과 옷 혹은 검과 신발 가운데 어느 것 하나만이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두 가지를 통합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아모스 오즈는 그의 책 <광신자 치유>에서 서로 간의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정말 모든 차원에서, 가장 일상적인 차원에서 서로를 상상해야 합니다. 말다툼을 할 때 서로를 상상하고, 불평을 할 때 서로를 상상하고, 자신이 100% 옳다고 생각할 때에야말로 서로를 상상해봐야 합니다. 자신이 100% 옳고, 상대가 100% 틀렸다손 쳐도 상대의 심정이 되어보는 건 여전히 유익합니다.” (아모스 오즈, <광신자 치유>, 노만수 옮김, 세종서적, 2017, p.80)

하나님 나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입장과 성향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려고 노력할 때 도래하는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서로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는 나와 입장과 생각, 성향이 다른 이를 이해하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교회는 그런 일치를 이루기 위해 마련된 하나의 훈련 장소입니다. 하늘 없는 땅, 땅 없는 하늘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남은 사순절 순례의 여정 동안, 서로에 대한 상상력을 가득 키워나가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는 곳곳마다 가벼움과 무거움이 잘 조화되어 참다운 봄기운으로 가득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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