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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1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20131027 청파교회 1부 예배 설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출애굽기 3장11-15절>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겠습니까?"

12. 하나님이 대답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네가 이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다음에, 너희가 이 산 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때에, 그것이 바로 내가 너를 보냈다는 징표가 될 것이다."

13.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대답하셨다. "나는 곧 나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나'라고 하는 분이 너를 그들에게 보냈다고 하여라."

15. 하나님이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 영원한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바로 너희가 대대로 기억할 나의 이름이다.

 

그 친구, 올백의 추억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도 생생한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초등학교 중간고사 때였습니다. 저희 반에 한 친구는 제가 평생 공부해도 받을 수 없는 올백(All 100점)이라는 점수를 받았습니다. 아직도 그 친구의 이름이 기억이 납니다. 담임선생님께서는 올백을 받은 그 친구를 얼싸 안으시고는 다른 친구들 앞에서 춤을 추셨습니다. 그 때도 앉은키가 컸던 저는 맨 뒷자리에서 다른 친구들과 함께 부러움의 눈길로 그 친구를 바라보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선생님의 사랑은 저 정도는 해야 받을 수 있는 거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뭔가 잘하지 않으면 선생님의 관심도 받을 수 없으며 또한 사랑도 받을 수 없는 것 같았습니다. 요새 그 친구는 뭐하며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나는 곧 나다”

 

오늘 본문은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입니다. 양떼를 몰고 광야를 지나 호렙산에 이른 모세는 신기한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불이 붙어도 타지 않는 떨기나무에서 불꽃의 형상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놀라운 광경을 자세히 보고 싶어 했던 모세는 가까이 다가가려했지만, 하나님의 음성은 가까이 오지 말 것을 명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 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7).” 

 

이 말씀을 마치신 하나님은 모세에게 굉장히 무거운 말씀을 하십니다. “이제 나는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게 하겠다(10).” 이 말을 들은 모세는 자신의 능력 없음을 고백하지만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시며 그를 강하게 하십니다. 그러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를 보내신 이가 누구냐고 물으면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정의하는 가장 근원적 대답인 “나는 곧 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난해한 자기소개에 이어 백성들의 언어를 사용해 자신의 소개를 덧붙입니다.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여라. 이것이 영원한 나의 이름이며, 이것이 바로 너희가 대대로 기억할 나의 이름이다(15).”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먼 여정을 떠나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자신이 그 여정 동안 함께 할 것과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증거 할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십니다. “나는 곧 나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가장 완벽하게 표현하는 말씀이면서도, 가장 난해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음 사람

 

하나님의 이 명확성과 불명확성을 이해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다음 구절의 말씀과 함께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창1:27)”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 말씀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이 말씀과 하나님이 자신을 가리켜 “나는 곧 나다.”라는 이 두 말씀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저는 요새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사람됨’에서 발견하고 있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습니다.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구나 겪게 되는 과정입니다. 경쟁화 된 교육 속에 살아가는 지금의 청소년들은 더 말해야 무엇 하겠습니까. 지금 내 모습은 진짜 내 모습은 아닌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발견해야 할지 난감합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그들의 기대와 실망 속에 우리 자신은 자꾸 위축되어 갑니다. 

 

성경번역의 차이긴 하지만, “나는 곧 나다”라는 말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개역개정)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무엇을 잘했고 또는 잘못했기에 하나님이 되신 것이 아니라, 존재(isness) 자체만으로 하나님이라 불리어지기에 충분했다는 말입니다. 있음 자체만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사람은 하나님의 이 속성을 당연히 닮아야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은 ‘되어야 하는’ 어떤 모습이 아니라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안타깝게 그런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 멀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과 세상 앞에 특별하게 잘하는 것이 있어야만, 그리고 남들보다 앞서야만 인정받고 사랑받는다고 여긴다는 사실입니다. 

 

근원적인 질문 앞에 놓인 우리

 

우리는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 따라 다양한 기대를 받고 살아갑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어머니는 어머니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학생은 학생답게, 친구는 친구답게, 목회자는 목회자답게. 우리는 주위의 많은 기대들 때문에 본래의 모습을 잃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공부 하나로 존재를 평가받고 있는 중고등부 친구들을 볼 때면 가슴이 아픕니다. 공부만 잘하면 그 친구의 다른 성향이 어떠하든 다 용서가 되고, 칭찬받을 만한 성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못하면 용서가 되지 않는 세상 속에서 학생들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대체 사람을 평가하는 그 잣대는 어디서부터 왔다는 말입니까.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은 그러한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야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이렇게 나를 나답게 만들지 못하게 한 원인은 외적인 요소도 있겠지만, 내적인 요소도 큽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형상을 잃게 만드는 것은 ‘너’가 아니라 ‘나’ 자신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내 진짜 모습을 인정할 수 없어 자신에게 가혹하게 굴 때가 많습니다. 내가 기대하는 내 모습에 미치치 못하는 자신을 보며 실망하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할 수는 있어도 자신의 존재자체로 인해서는 절대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있음 자체로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내적으로 자유로운 예수님

 

복음서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다양한 병을 치유해 주십니다. 그래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은 ‘치유자 예수님’이라 일컬어지기도 합니다. 안셀름 그륀 신부는 예수님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예수는 완전히 현존한다. 자아를 중심에 세우려 애쓰지 않는다. 돈, 권력, 명예 따위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느낀 대로 말한다.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이나 자신의 말과 행동이 초래할 결과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는다. (안셀름 그륌, <사랑한다면 투쟁하라>, 분도출판사, p.204)

 

이 말은 예수님이 자기 멋대로 살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내면을 끊임없이 들여다보았고, 자신의 심장이 뛰는 일을 하며 살았다는 말입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는 얼마나 자신을 감추며 또 억압시키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구원받았다는 것은 자신을 옭아매는 감옥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지금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한다는 말은 스스로를 옭아매는 감옥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시각을 조금 넓혀본다면 ‘사람됨’을 상실하고 끊임없이 사회를 악순환 시키는 이들도 그 길에서 멈춰서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이 세상을 자신들의 이익을 중심으로 만들어나가는 이들이야말로 어서 빨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경제적 이익을 취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는 이들, 자신의 배불리기에만 급급해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을 모른 채 하는 이들, 계급적 우위에 서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비인간적으로 대하는 이들. 자본의 논리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기도제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버팀목이 되어주는 공동체가 있기에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게 가능한 일인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사실 그 답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정답이란 없는 것 같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한 치의 오차도 없어 완벽한 답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특히 사람에 관한 일이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태어난 우리에게 필요한 답은 각양각색의 답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공통적으로 필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공동체’, ‘신앙공동체’입니다. 사람은 결코 혼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혼자서는 올바로 보기 어렵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모습이든지, 자신의 문제든지 말입니다. 

 

그래서 청파교회라는 공동체가 귀하고, 교회학교 교사라는 공동체가 귀하고, 중고등부라는 공동체가 귀합니다. 지난번에도 말씀 드리긴 했습니다만, 완벽한 공동체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는 필요하고,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는 것은 중요합니다. 

 

힘들고 지쳐있는 이들 옆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갈 길을 몰라 방황하는 이들의 지혜로운 길잡이가 되어주고, 또 맑은 정신으로 누군가의 잘못됨을 바로잡아 줄 수도 있는 이들. 하나님이 보내신 이런 이들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람을 찾기 전에 자신이 먼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짧은 글 하나 읽어드리고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만 태어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변화되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파커 J. 파머, <삶이 내게 말을 걸어 올 때>, 한문화, p.174)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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