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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거룩한 부담감

20131222 청파교회 1부 예배 설교

 

거룩한 부담감

 

<로마서 1장 1-7절>

 

1.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나 바울은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따로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2. 이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으로

3. 그의 아들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아들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으며,

4. 성령으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나타내신 권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확정되신 분이십니다. 그는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5. 우리는 그를 통하여 은혜를 입어 사도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 이름을 전하여 모든 민족이 믿고 순종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6. 여러분도 그들 가운데 들어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7. 나는 로마에 있는 모든 신도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그의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와 평화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

 

북촌의 어느 날

 

좋음과 나쁨 사이의 경계선

 

우리에게는 누구나 생일(生日)이 있습니다. 생일이 없는 사람은 아직 이 땅에 없는 사람이거나 앞으로도 없을 사람일 것입니다. 혹시 여기 계신 분들 중에 12월 생일이신 분 있으신가요? 매년 성탄절 맞이하기 3일 전쯤에 생일을 맞이하다 보니, 학창 시절 내내 학기 중에 있는 친구들의 생일을 챙겨주고 나면, 겨울방학 때문에 정작 제 생일은 챙김 받지 못했었습니다. 참 억울하지만 어디다 하소연할 수도 없었습니다. 부모님의 기대 속에 그날 태어나버린 걸 제 힘으로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도 시간이 흐르다 보니 친구들에게 생일은 챙김 받지 못했어도, 부모님이나 혹은 누군가가 나의 태어남을 기대해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했습니다. 

 

성탄(聖誕)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다

 

올해도 어김없이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매년 맞이하는 성탄절이지만, 그때그때마다 성탄은 나에게 또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거룩한 탄생을 칭하는 ‘성탄’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거룩함으로 다가오는지 함께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사도로 부름 받은 우리들

 

오늘 본문 로마서 1장 1절을 보면 바울 사도는 자신을 세 단계에 걸쳐 소개를 합니다. 첫째 그리스도 예수의 종, 둘째 부르심을 받은 사도, 셋째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따로 세우심을 받은 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교회에 자신의 신분을 자세히 전달합니다. 이는 로마교회가 자신의 개척을 통해 설립되지 않은 교회라는 사실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바울은 자신의 세 번째 소개에서 말한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단편적인 예로 구약의 이사야 7장 14절만 보아도 ‘그러므로 주님께서 친히 다윗 왕실에 한 징조를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입니다.’라고 이야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처녀가 잉태한 그 ‘아들’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났으며, 성령으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나타내신 권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확정된 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이야기를 마친 후, 바울은 마지막으로 그 아들의 이름을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로마교회에 자신이 누구인지와 자신이 하는 일을 밝히는 것은 그가 사도인 것과 자신이 하는 일에 로마교회 성도들을 초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서로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6절을 보면 5절 말씀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를 입은 사도의 직분’은 바울 혼자만의 직분이 아니라 로마교회 성도 모두를 위한 직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모든 이들을 ‘복음’의 일꾼으로 삼으려는 하나님의 계획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사도로 칭함 받는 목회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모든 이들이 ‘사도’이며 모두가 그 일을 위해 부름 받았다는 것을 단편적으로 말해줍니다. 

 

바울의 사도 됨의 근거 ‘복음’, 그리고 ‘성탄’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자신의 사도 됨을 강조하기 위한 부분을 읽으며, 이미 오신 예수님을 기다린다는 것(대림절)과 그의 탄생을 기념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이 땅에 기대를 받고 태어납니다. 특히 부모님의 기대가 그러합니다. 우리가 이름의 뜻을 가지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제 이름은 있을 '재(在)'에 공로 '훈(勳)'자를 쓰는데, 이 땅에서 공로가 있기를 바라는 부모님의 기대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지방에 가면 자녀들이 좋은 학교에 입학했거나 좋은 직장에 취직하면 거리 곳곳에 현수막을 걸어두고 곳곳에 소식을 전합니다. 수도권은 어떨지 모르지만, 제가 태어난 동네에서는 그러했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어릴 때부터 부모와 주위의 기대를 받고 자랐고, 또 자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대는 기대를 받는 사람에게 늘 유쾌함만을 주진 않습니다. 물론 지친 삶에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그런 기대는 누군가의 삶을 속박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대는 강요되기 쉽고 그러다 보면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또한 이런 기대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울은 예수의 탄생은 이미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해 예언되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는 이 땅에 태어나기 전부터 그런 기대를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는 육신으로는 그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의 기대를 받고 자랐지만, 더 근원적인 존재 하나님의 기대를 받고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을 보면 "예수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사명을 받고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도 우리와 같은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기대가 항상 기쁘지만은 않았을 겁니다. 피하고 싶을 때도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그는 날마다 기도하고 날마다 묻고 듣기를 반복했을 겁니다. 그러한 과정이 없었더라면 예수는 확신보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태어난 목적과 이유를 알고 그 삶을 끝내 살아내셨습니다. 하늘로부터의 기대가 무엇인지 알고 나서도 예수님은 그 길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 ‘하늘의 기대’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고난’이었고, 세상의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그의 탄생은 곧 거룩한 죽음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후에 그러한 받아들임이 곧 부활의 영광으로 나타났긴 했지만 말입니다. 본문 4절의 표현을 빌려 본다면, 이러한 받아들임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곧 하나님의 아들로 확정’되게 한 것입니다. 

 

 

하늘에 맡겨진 아들 예수와 우리의 일생

 

이번에는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의 입장에서 그의 부모였던 요셉과 마리아에게로 돌려봤으면 합니다. 사실 부모의 입장에서 예수인생의 끝을 미리 알았다면, 욥과 같이 이런 말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텐데(욥 3:3)” 자기 자녀의 죽음을 보고 이런 마음을 갖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이러한 생각과 마음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가 사는 삶에 대해 그의 육신의 부모들이 했던 말들은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온전히 하늘의 뜻에 맡긴 듯 보입니다. 레바논의 작가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은 자녀들에게 대해 이렇게 정의합니다. 

 

그대들의 아이라고 해서 그대들의 아이는 아닌 것. 

아이들이란 스스로 갈망하는 삶의 딸이며 아들인 것. 

그대들을 거쳐 왔을 뿐 그대들에게서 온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비록 지금 그대들과 함께 있을지라도 아이들이란 그대들 소유가 아닌 것을. 

 

그대들은 아이들에게 사랑을 줄 순 있으나 그대들의 생각마저 줄 순 없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아이들 자신의 생각을 가졌으므로. 

그대들은 아이들에게 육신의 집을 줄 순 있으나 영혼의 집마저 줄 순 없다. 

왜냐하면 아이들의 영혼은 내일의 집에 살고 있으므로. 

그대들은 결코 찾아갈 수 없는, 꿈속에서도 가 볼 수 없는 내일의 집에. 

 

그대들이 아이들같이 되려고 애쓰되 아이들을 그대들같이 만들려 애쓰진 말라. 

왜냐하면 삶이란 결코 뒤로 되돌아가지 않으며, 어제에 머물지도 않는 것이므로. 

 

(칼릴 지브란, <예언자>, 문예출판사, p.23-25)

 

칼릴 지브란이라는 작가의 말이 예수님께서 사셨던 삶을 겨냥해서 했던 말은 아니었겠지만, 이는 마치 그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의 마음을 대변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일생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아직 부모가 되어보지 못한 저이기에 그게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머리 이상으로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미 부모의 자리에 서 계신 분들은 이 일의 무게를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예수님께서 진정 자신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보이지 않는 부모님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받아들임’과 부모의 ‘맡김’

 

그렇다면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삶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바울 사도는 “우리는 예수를 통하여 은혜를 입어 사도의 직분을 받았다(5절)”고 말합니다. 이어 우리 모두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되었다(6절)”고 말합니다. 즉 이곳에 모인 청파 공동체 모두는 ‘사도로써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합당한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믿음은 삶을 통해 드러나야 합니다. 먼저 예수님처럼 우리도 자신의 삶을 온전히 긍정하며 맡겨진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미 자신의 길을 발견해서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분들도 계실 테고, 중고등부 학생들처럼 그 길을 찾아가는 과정인 친구들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삶, 사명이란 교회 내에서의 것일 수도 있고, 직업이나 학교, 가정이나 사회와 관련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가끔 혹은 자주 피하고 싶어 하는 바로 그것이 우리가 살아내야 할 하나님의 요청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모로서, 혹은 교회학교를 담당하는 교사로서 자녀들과 학생들을 자유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방치시킨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되, 나머지의 것들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어쩌면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습니다. 

 

성탄발표회

 

처음부터 의도하고 말씀을 준비한 것은 아니지만, 준비하다 보니 ‘기쁘다 구주 오셨네(새 찬송가 115장).’라는 찬송의 가사보다는 마치 ‘십자가를 질 수 있나(새 찬송가 461장)’라는 찬송의 가사처럼 설교가 무거워졌습니다. 예수님 오심은 구원받았다는 감격 때문에 기쁨으로 충만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마냥 기뻐만 할 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어떻게 사셨는지, 그리고 그의 부모의 삶이 어떠하였을지 우리가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오후에 성탄발표회가 있습니다. 시대가 아무리 각박해져도 여전히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자신이 ‘태어난 날’이 돌아온다는 것은 설렘과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오늘 있을 성탄발표회만큼은 예수님 탄생을 기쁘게 축하해 드리고, 각자의 삶의 자리로 돌아가서는 ‘거룩한 부담감’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셨으면 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

안녕하세요.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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