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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1부]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20131124 청파교회 1부 예배 설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누가복음 23장 33-43절>

 

33. 그들은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서,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달고, 그 죄수들도 그렇게 하였는데, 한 사람은 그의 오른쪽에, 한 사람은 그의 왼쪽에 달았다.

34. [그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제비를 뽑아서,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

35. 백성은 서서 바라보고 있었고, 지도자들은 비웃으며 말하였다. "이 자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그가 택하심을 받은 분이라면, 자기나 구원하라지."

36. 병정들도 예수를 조롱하였는데, 그들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신 포도주를 들이대면서,

37. 말하였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면, 너나 구원하여 보아라."

38. 예수의 머리 위에는 "이는 유대인의 왕이다" 이렇게 쓴 죄패가 붙어 있었다.

39. 예수와 함께 달려 있는 죄수 가운데 하나도 그를 모독하며 말하였다. "너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여라."

40.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다. "똑같은 처형을 받고 있는 주제에, 너는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41. 우리야 우리가 저지른 일 때문에 그에 마땅한 벌을 받고 있으니 당연하지만, 이분은 아무것도 잘못한 일이 없다." 그리고 나서 그는 예수께 말하였다.

42. "예수님,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43.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Lumix gx9 / 20mm]

추억이 있다는 것

 

여러분들은 추억할만한 것들이 있으신가요? 지난 시간을 떠올리며 ‘그 때가 좋았었는데’, ‘그 땐 그랬었지’라는 추억 말입니다. 무슨 추억이 있을까라고 생각되어지는 중고등부 친구들에게도 유치원의 시절, 초등학교의 시절들처럼 추억할 만한 순간들이 있을 겁니다. 

 

아니면 오랫동안 보지 못했지만 자신의 추억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신가요? 그 사람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지거나, 정신이 맑아지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물론 안 좋은 추억이나 사람도 있긴 하겠지만 말입니다. 이런 추억들이 쌓여 우리의 기억이 되고, 또 우리의 삶이 되는 것 같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와 두 죄수

 

오늘 본문말씀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순절이나 고난주간에 나올 법한 본문이긴 하지만 이 본문을 택하게 된 이유는 (42절의) 짧은 한 구절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왕도 아닌데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함 받는다는 이유’로, 또 ‘당시 권력과 종교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그 시대와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받고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 때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마 27:33, 요 19:17)에는 골고다라고 쓰여 있는 이 ‘해골’이라는 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십니다. 그리고 왼편과 오른편에 한 명씩 죄수들이 함께 못 박혀 있습니다. 예수님은 도와줄 이 하나 없는 십자가 위에서 많이 외로웠을 겁니다. 자신을 따르겠다던 제자들은 모두 떠나고 몇 명의 여인들만 멀리서 예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멸시하고 천대하는 자들을 향해 저주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욕하는 지도자들과 병정들 속에서 예수는 초연한 듯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34절)." 끝까지 자신을 버린 이들을 안고 계십니다. 그 때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죄수 하나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너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여라(39절).” 

 

사실 이 말이 고통을 견디기 힘든 나머지 구해주기를 바라고 한 말인지, 아니면 예수를 조롱할 생각으로 한 말인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예수님은 아무 답변도 하지 않습니다. 예수가 그 말을 옛날 광야에서 겪은 악마의 유혹처럼 생각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엔도 슈사큐, <예수의 생애>, 분도출판사, p.183)

 

죄수의 말을 듣다가, 다른 죄수 하나가 이렇게 말합니다. “똑같은 처형을 받고 있는 주제에, 너는 하나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우리가 저지른 일 때문에 그에 마땅한 벌을 받고 있으니 당연하지만, 이분은 아무것도 잘못한 일이 없다(40-41절).” 그러고 나서 이렇게 이어서 말합니다. “예수님,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42절).” 이 죄수의 고백을 듣고 있노라면 어떻게 이 상황에서 예수님을 주님이라 고백하고, 또 십자가에 달린 무력한 그를 향해 자신의 믿음을 드러낼 수 있는지 참 신비하고 놀랍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는 자의 마지막 바람이 그러한 믿음의 고백으로 이어졌던 것일까요? 아니면 단순히 누구라도 의지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어지는 예수님의 답변을 보면 죄수의 고백이 단순한 고백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43절).”라고 말씀하시며 그를 끝내 품어 안으십니다. 

 

한 죄인의 고백

 

제가 서두에서 오늘 본문을 선택하게 된 이유가 한 구절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었습니다. 그건 42절 죄수의 고백인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때문입니다. 나를 기억해 달라는 말은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는 당부이기도 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나라’가 마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집과 같다면.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려고 문을 여시다 “아, 나를 기억해 달라는 이가 있었어.”라며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손을 잡고 그 문에 들어갈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라는 말은 마치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라는 말과 같아 보입니다. 하늘의 법으로 보았을 때, 이는 죄수의 고백이라기보다 구원받은 영혼의 고백이었습니다. 우리는 앞이 막막하고, 빛이 보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믿는 믿음을 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죄수라 일컬어지는 그 사람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는 걸까요? 우리의 삶을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기억나는 누군가 있다는 것

 

저는 ‘기억하다, 추억하다.’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지금 계절에 맞는 느낌이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얼마 전 읽은 책에서 재밌는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책의 저자가 텔레비전에서 경주에 있는 양동마을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기자는 올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그 조용한 시골 마을로 관광객들이 몰려들고 있으나, 제대로 된 부대시설과 볼거리가 없어서 대부분 마을만 둘러보고 황급히 발길을 돌린다면서 대책이 시급하다고 전했다고 합니다. 이 기자의 보도를 들은 책의 저자는, 옛 정취가 고스란히 보존됐다는 이유로 (세계)문화유산이 된 마을에 무슨 부대시설과 볼거리냐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고요하고 적적한 마을에 가서도 그리운 사람 하나 떠올리지 못하고 황급히 발길을 돌려야 하는 사람들을 보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정말 시급한 대책이 필요하다며 나라에서 이분들에게 그리운 사람 하나씩 만들어달라고 요청하더군요. (김연수, <우리가 보낸 순간>, 마음산책)

 

여러분들에게도 이렇게 그리운 사람이나 그리운 순간이 있으십니까? 저도 가끔 잘 나가던 초등학교 시절이 그립기도 합니다. 그러다 문득 ‘나는 얼마나 그분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 받는 이들 가운데에서 우리를 하염없이 그리워하고 계시는데, 우리는 그분을 등지고 살아가진 않나 모르겠습니다. 

 

상황은 바뀐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죄수를 꾸짖은 또 다른 죄수는 ‘주님께서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자신을 기억해’ 주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에 대한 답변으로 예수님께서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43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저자는 여기까지만 예수님과 죄수들의 대화를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를 우리는 쉽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국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고, 죄수들 또한 같은 죽음을 맞이했을 겁니다. 사실 상황을 보면 바뀐 것은 없습니다. ‘죄인의 바람’과 ‘예수님의 응답’은 그 당시 현실에서는 실현되지 못했을 겁니다. 저는 신앙에 있어서 이 부분이 참 중요한 지점이란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기대가 어긋나도, 우리의 기도와 바람이 응답되지 않더라도, 당장 우리 눈앞에 현실이 달라지지 않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고서 살아가는 삶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게 교회 안에서 말하는 ‘믿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믿는 다고 말로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믿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믿고서 그렇게 사는 것! 그것이 참 믿음일 것입니다. 

 

대림절을 기다리며

 

다음 주부터 교회는, 예수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라는 의미의 ‘대림절’로 지킵니다. ‘대림절’이라는 말은 ‘강림절’, ‘대강절’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는 것이 마치 강력한 권세를 가진 이가 이 땅에 내려온다고 생각해서 ‘강림절’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강림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 교회가 지키고 있는 ‘대림절’이라는 표현이 훨씬 더 깊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마음과 의지와 상관없이 커다란 존재가 나에게 다가온다는 의미보다 간절한 기다림 속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기다린다는 것이 훨씬 의미 있어 보입니다. 나에게 닥쳐온 어떤 강압적인 힘 혹은 은총을 경험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주체적인 사람이 되어 나 스스로 예수님을 기억하며, 그분이 오심을 기다리는 것이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이란 생각이 듭니다. 

 

내가 기억해야 할 것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이 그리워지는 계절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성탄을 준비하는 교회도 그러하고, 지금 이 시대도 그러합니다. 예수님께서 사셨던 그 삶이 그리워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삶 속에서 얼마나 예수님을 기억하고 살며, 또 내 기대가 꺾인 상황 속에서도 얼마나 예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지 돌아봤으면 합니다. 한 죄수가 예수님을 향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나를 기억해 달라’고 말했던 것은 정말 큰 믿음입니다. 그 죄수에게 현재 처해져 있는 예수님의 상황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또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것은 결코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는 뜻이기도 하다고 했습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충고’보다 ‘무관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을 만나면 그분이 나를 모른다 할까 두렵기도 합니다. 

 

다음 주면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이 계절에 예수님 탄생의 기쁨과 동시에 그분께서 살아온 삶을 기억하며 차분함 또한 잃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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