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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하나님과 그대

20140126 청파교회 1부 예배 설교

 

하나님과 그대

 

<마가복음 19-12절>

 

9. 그 무렵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오셔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10. 예수께서 물속에서 막 올라오시는데,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는 것을 보셨다.

11. 그리고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

12. 그리고 곧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다

 

[Lumix gx9 / 14mm]

 

재속 수행 공동체 탐문

 

제가 가끔 설교 중에 말씀드리기도 했습니다만, 몇 해 전부터 꾸준히 참석하던 책모임이 있었습니다. 목회자 몇 분과 신학생 몇 명이 책을 읽어가며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고, 이 시대를 읽어내기 위한 훈련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달부터 그 모임의 모습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우리의 모임을 '재속(在俗) 수행공동체 탐문'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조금 어려운 말로 들릴 수 있지만, 쉽게 이야기하자면 이런 겁니다. 우리는 누구나 이 세상에 몸을 담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 세상이 요구하는 대로, 세상이 시키는 일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늘의 뜻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고 함께 살아내 보자는 말입니다

 

물론 실패하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잘 못되었다거나 나쁘다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함께 견뎌주고 버텨주는 공동체가 있기에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고민과 삶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며, 자신의 삶에만 어려움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를 위해 기도합니다. 지금은 시작하는 단계라 이 모임이 각자의 삶에 어떤 결을 만들어 낼지 모르겠습니다만, 기대가 되는 건 사실입니다.

 

그러다 문득, 청파교회 구석구석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혹시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주말식구는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누군가의 완벽함과 강함에 이끌리기보다는 연약함과 불완전함 속에 훨씬 깊은 관계를 맺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약함을 누군가에게 보이기를 싫어하고 자존심 상하는 일로 여기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하나님 나라를 앞당기는 것은 가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가 시작하는 것임을 알고 나부터 자신을 열어 보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친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한 가지 질문을 드릴까 합니다. 여러분들은 누군가가 친구로 느껴질 때는 언제인가요? 나이의 많고 적음이 아니어도 친구로 느껴지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좀 더 구체적인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서로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친구가 되고 싶다는 생각만으로는 절대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 속으로 그 사람을 초대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 사람을 위해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더 잘 알고 친해지려면 그와 함께 어느 정도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형식적인 관계보다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바란다면, 당연히 개인적으로 만날 기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누군가 우리의 관심을 끄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해 궁금한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봄으로써 얼마든지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관심을 끄는 사람이 유명한 연예인이나 역사적인 인물이라면, 우리는 그를 대중매체와 같은 인터넷이나 책을 통해 접할 수 있습니다. (월리엄A. 베리, 하느님과 그대〉, 가톨릭 출판사, p.28-29)

 

하나님과 친해지는 방식

 

저는 하나님과 친해지는 방식도 이와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성경이나 신학 혹은 신앙서적을 읽음으로써 하나님에 관해서 배웠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독서는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어울려 지내시는지 알고 싶어, 단지 그분을 멀리서 지켜보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성경을 읽는 것과 독서를 한다는 것이 절대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드셨기에 인간관계의 속성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친해지고 관계 맺는 방식도 사람과 사람이 관계 맺는 방식과 유사합니다. 다른 사람을 잘 알려면 이를 위해 노력하는 시간이 필요하듯이, 하나님을 잘 알고자 한다면 이를 위해 노력하는 시간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그 분을 알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하면 될까요?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윌리엄A. 베리가 말하길 하나님과 함께 시간 보내기를 갈망하는 한, 그 시간에 무엇을 하든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를테면, 새 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과 똑같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 친구와 같이 걷기도 하고, 저녁을 먹을 수도 있으며, 영화를 볼 수도 있고, 함께 뛰어놀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서로 상대방을 하나씩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읽을 수도 있고, 침묵 할 수도 있고, 숲 속을 거닐 수도 있고, 음악을 들을 수도 있고, 편한 의자에 앉아 커피 한잔을 할 수도 있고, 목욕을 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나 스스로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기를 바라고 있음을 아는 한, 우리는 하나님과 의식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고, 따라서 이 모든 상황은 기도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월리엄A. 베리, 하느님과 그대〉, 가톨릭출판사, p.30) 하나님과 친해지는 방법에는 정답이 없고, 다양한 해답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 맺기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公生涯)는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사실 저는 본격적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시작한 예수님의 삶이 반드시 공생애라고 정의 내려진 이 시기부터였다는 것을 유쾌하게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대부분 감춰져있긴 합니다만, 저는 성경에 감춰져있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들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기 위해 예수에게 정말 중요한 시기였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렇게 본다면 예수의 모든 생애가 공생애였을 것입니다.

 

아무튼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공생애는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오늘 말씀을 본다면, 이는 마치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고백으로 보여 지기도 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1:11).” 하나님의 사랑 고백은 일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과 가까워지고 싶었고 매우 친밀해지길 원하셨습니다. 이후에 예수님도 자신의 삶을 드려 아버지 하나님의 그 사랑에 보답했습니다.

 

윌리엄A. 베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그토록 어여삐 여기신 가장 깊은 이유가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아마 예수님께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가깝게 하나님께 다가가 그분을 맞이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그 누구보다도 있는 힘껏 노력을 다해 하나님께 당신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시도록 해 드렸고, 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큼 당신을 원 없이 사랑하시도록 해 드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곧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다.

 

하지만 이런 하나님의 사랑고백이 있고나서 이어지는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라는 말씀에 이어 그리고 곧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다.’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우리에게 펼쳐진 삶도 이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넘치도록 사랑을 주시고 계시지만, 그 사랑이 곧 쉽고 편한 삶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든든한 사랑을 등에 지고, 광야로 가셨습니다. 어쩌면 예수님 본인의 의지보다 하나님의 의지로 광야에 갔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우리의 삶은 광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등에 업고 끈임 없는 유혹에 맞서 살아야 합니다. 그 광야의 삶은 자신의 개인적인 삶일 수도 있지만, 텅 비고 아득히 넓은 들에 홀로 서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우리 이웃의 삶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광야의 신비는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광야가 각자 떨어져 있을 때는 한 없이 허전하고 외로운 곳이지만, 단 한사람이라도 그 광야위에 함께 서 있어준다면 그곳은 광야가 아니라 푸른 초원이 될 수 있습니다.

 

자비한 사람은 늘 아파하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이라는 광야 속에서도 자비로운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자비한 사람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요? 몇 가지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공적인 권력에 스러진 사람들 때문에 울고, 수해를 만난 이웃들 때문에 웁니다. 가속화되는 무기경쟁을 보며 울고, 서로를 깎아내리지 못해 안달인 정치인들을 보며 웁니다. 외로운 죄의식에 갇혀 살고 있는 이들 때문에 울고, 마구 파헤쳐진 강바닥을 보고 웁니다.

 

하지만 자바한 사람은 그저 무기력하게 울기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그런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자기를 역사의 제단 위에 제물로 내놓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다른 이들의 목을 조르지 않습니다. 자기의 생각으로, 권위로, 삶의 방식으로, 종교적 신념으로 다른 이의 목을 조르지 않습니다. (김기석, 삶이 메시지다〉, 포이에마, p.69-70) 자비한 사람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그대

 

오늘 말씀 서두에 하나님과 관계 맺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향해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지금 우리를 향해서도 끊임없는 사랑을 고백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매일 하나님과 친밀하게 지내고 계십니까? 아니, 친밀하게 지내고자 하는 마음은 있으신지요? 사실 이 질문은 여러분들에게 드리기에 앞서 먼저 저를 향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대라는 말은 듣는 이가 친구나 아랫사람인 경우, 그 사람을 높여 이르는 대명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를 극진히 높여주시며 당신의 삶으로 초대하고 계십니다. 2014년 한해, 하나님과 친구처럼 가까워져서 그분이 요청하는 삶의 자리에 늘 계시는 여러분들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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