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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흐릿한 세상, 맑은 눈 가지고

20140427 청파교회 1부 예배 설교

 

흐릿한 세상, 맑은 눈 가지고

 

<누가복음 10장 30-36절>

 

30.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두고 갔다.

31.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32. 이와 같이, 레위 사람도 그 곳에 이르러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33.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34.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올리브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다.

35. 다음 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서, 여관 주인에게 주고, 말하기를 '이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Lumix gx9 / 14mm]

요원한 부활

 

최근 인터넷이나 SNS를 이용하다 보면 노랗게 물든 세상을 보게 됩니다. 바로 ‘노란 리본’ 때문에 그렇습니다. 중고등부 친구들과 몇몇 선생님들의 카톡이나 페북 프로필 사진도 그렇게 바뀌어 있었습니다. 저는 왜 ‘노란리본’ 달기 캠페인을 하는지 궁금해서 한번 찾아봤습니다. 유래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전쟁터에 있는 사람의 무사귀환을 바란다는 뜻으로 노란 리본을 나무에 매단 것에서 유래됐다고 합니다. 이는 곧 세월호 실종자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생존자’ 소식은 없었습니다.

 

지난주, 우리는 교회력에 따라 ‘부활절’을 맞이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부활 후 둘째 주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온 국민의 무거운 침묵과 슬픔을 깨뜨릴 주님의 부활은 아직 요원하기만 한 것 같습니다. 지난 주, 2부 예배 설교 때 담임목사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었습니다. “주님도 진도 앞바다, 그 자리에 서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물으며 아이들 곁에 함께 계신다.”라고 말입니다. 한 주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주님은 그 자리에 머물러 계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더 아픈 것은

 

우리는 이 참담한 현실 앞에 슬픔을 감출 길 없지만 더욱 우리의 마음이 아픈 것은 상황을 이렇게까지 방치하고 서로 책임을 묻기에 급급한 이들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회를 바라보며 진실은 무엇이며, 또 무엇을 신뢰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우리들 삶이 복잡해져 감에 마음이 답답하기만 합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말씀이 ‘선한 사마리아인’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비유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복음서 가운데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영이 저자 누가의 마음을 감동케 했기에 이 말씀을 기록했다고 여겨집니다. 역시나 이 말씀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감동케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오늘 본문말씀의 상황은 이러합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종교학자라고 할 수 있는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25)” 그러자 오히려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느냐? 또 너는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26)” 이 질문을 들은 율법교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열정과 간구와 힘과 지성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였고, 또 ‘네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 하였습니다.(27)” 

 

율법교사는 예수님의 질문에 조금은 어이없어하며 답하는 분위기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마치 언어학 박사에게 기억, 니은을 아느냐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율법교사는 율법에 아주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그에게 예수님의 질문은 아주 초등질문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잘 대답하였다. 그럼 그것을 행하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28).”

 

예수님의 권위에 당황한 율법교사는 자신의 곤란함을 빠져나가기 위해 다시 한번 질문합니다. “그러면 선생님은 이웃을 어떻게 정의하겠습니까?(29)” 우리 예수님은 마음도 좋으시지, 비유를 통하여 일일이 그에게 설명해 주기 시작하십니다.

 

그 길로 지나던 세 사람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고 있는데, 도중에 강도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빼앗고 때려 거의 죽게 해 놓고는, 버려두고 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제사장이 같은 길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강도 만난 사람은 살 수 있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은 성전 혹은 교회에서 제사, 예배를 담당하는 권위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 보면 그는 다친 사람을 보고는 방향을 바꿔 다른 쪽으로 비켜갔다고 이야기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어서 같은 길에 레위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레위사람은 구약시대부터 성전을 담당하기 위해 구별된 족속으로 경건함의 상징적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에서 그 또한 부상당한 사람을 피해 갔다고 이야기합니다. 참 이상한 상황의 연속입니다.

 

그 강도 만난 사람은 이제 살아날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같은 길로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갑니다. 당시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으로부터 차별을 받던 민족이었습니다. 유대인들 눈에 사마리아인들은 유대교의 법을 따르지도 않았고, 자신들만의 제의와 공동체를 발전시켜 왔다고 여겨졌기에 차별을 받고 있던 민족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이 살아가던 당시 어떠한 권한도 없고, 보잘것없던 그 사마리아 사람이 유일하게 강도당한 자의 처지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고 오늘 말씀은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은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감아 응급조치를 한 뒤에, 그를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편히 쉬게 해 주었습니다.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다음 날 아침 그는 은화 두 개를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사람을 잘 돌봐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 앞으로 계산해 두십시오.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 이러한 상황 또한 참 이상한 상황입니다. 그 길을 지났던 제사장과 레위사람의 이상함과는 또 다른 이상함입니다.

 

이 이야기를 마치시고 예수님께서는 율법교사에게 묻습니다. “네 생각은 어떠냐? 세 사람 가운데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었겠느냐?(36)” 그는 “친절을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너도 가서 똑같이 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강도는 누구일까?

 

누가복음에 등장한 이 말씀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에 틀림없어 보입니다. 혹시 이 비유의 말씀이 식상하게 들려 마음에 움직임이 없으십니까? 혹 그렇다면 우리도 율법교사와 같진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더 이상 감동과 찔림이 없고 관습적이 되어버렸다면, 이보다 더 위험한 순간은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저 또한 이 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성경말씀의 중심을 두 가지로 요약한다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이웃을 사랑하라는 뜻일 겁니다. 아주 고맙게도 율법교사가 질문을 해주었기에 우리는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웃이란 강도 만난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중고등부 친구 중 누군가 ‘실제로 강도 만난 사람만이 우리의 이웃일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사고의 폭을 넓힐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비유의 말씀이고, 우리는 그 비유를 재해석해야 합니다. ‘강도’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폭행이나 협박 따위로 남의 재물을 빼앗는 도둑. 또는 그런 행위.’ 여기서 ‘폭행’이나 ‘협박’은 쉽게 말해 우리가 원치 않는 방법 혹은 정상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우리에게 가해지는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 ‘재물’이란 우리가 일상을 살아감에 있어 필요한 최소한 혹은 최대한의 소유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강도’라는 의미를 다시 정리해 본다면, ‘강도’란 우리의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과 행복을 빼앗아가는 모든 사람이나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

 

이렇게 정의 내리고 보니까, 우리 주위에는 강도 만난 자들이 참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학교나 교회에서 만나는 친구일 수도 있고, 우리 교회 교인일 수도 있고, 또 대중매체를 통해 만나게 되는 모든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족, 나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이번 세월호 참사를 목도하면서 우리는 희생자들과 그 가족이 누가복음에 등장한 ‘강도 만난 이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점점 밝혀지는 진실들을 보며 우리 또한 ‘강도 만난 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또한 지울 수가 없습니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이 사건을 보며 여전히 이 나라 안에 계층의 격차가 심하다는 것을, 또 재난 앞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누군가에게 책임 전가하기만 급급해하던 국가를 보며 우리의 가슴은 미어졌습니다. 우리가 바로 억울함을 당한 그들의 이웃이 되어주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그들의 이웃이 되어주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그들의 고통에 침묵하고 절제하며 눈물 흘려주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어떤 말도 공허했습니다.

 

이웃이 된다는 것

 

하지만 우리는 거기서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누군가 강도를 만났다면 그를 보며 가여워해야 하고, 곁에 다가가 우리의 주머니를 열어 도와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더 있는데, 그것은 그 마을에 강도가 나타나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도를 잡고, 강도 만난 자를 도와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다시는 강도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문제의 나무만 보는 것이 아니라, 멀리서 문제의 숲을 볼 줄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청파 중고등부 친구의 부모님 한 분은 이 비유를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강도 만난 자 곁에 앉아서 눈물만 흘리지 말고, 나귀에 태워 여관까지 옮겨주고 여관비를 내주고, 강도를 수배하고, 우범지역에 병력을 배치하도록 파출소장을 만나야 한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동병상련의 눈물이다.’ 이 이야기를 접하며 깊이 공감하기도 했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더 큰 고민을 안게 됐습니다. 

 

우리가 살아갈 세상 만들기 

 

우리가 사는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봐서는 안 되겠지만, 갈수록 이 세상이 흐릿하게만 보입니다. 뭐가 진실이며, 뭐가 거짓인지 혼란스럽습니다. 얼마 전, 개봉했던 영화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를 재밌게 봤었습니다. 거기서 주인공 스티브 로저스는 70년 동안 얼음 속에서 잠들어 있다가 깨어납니다. 하지만 새롭게 맞이한 세상은 그를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그가 잠들기 전, 2차 세계대전 당시 ‘히드라’라는 조직을 앞세운 적의 공격은 아군과 적군을 쉽게 구별하게 했고, 지키거나 추구해야 할 정의 또한 명확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 눈을 뜬 그는 “옳은 일을 하고 싶은데 뭐가 옳은 건지 모르겠다. 옛날과 달라졌다”라고 말하며 진실의 실체를 알 수 없음에 당혹해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이 말이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맑은 눈을 가지고

 

말씀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기 위해 맑은 눈을 지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맑은 정신을 지니고 사셨던 주님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하늘의 뜻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기도하셨고, 그 기도의 응답을 받고 나면 행동으로 옮기셨습니다. 갈수록 흐릿해져 가는 이 세상 속에서 주님이 너무도 그립습니다. 우리는 그분 없이 길을 잃기 쉽습니다. 부활주간을 보내고 있는 지금, 주님께서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통해 부활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필요로 하십니다. 중간고사기간을 보내고 있는 요즘, 단기간의 시험공부보다 인생이라는 공부에 더욱 매진하는 여러분들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살롱에서 나누는 말씀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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