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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1부] 허락받은 축제와 고난

20140622 청파교회 1부 예배 설교

 

허락받은 축제와 고난

 

<전도서 9장 7-9절>

 

7. 지금은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을 좋게 보아 주시니, 너는 가서 즐거이 음식을 먹고, 기쁜 마음으로 포도주를 마셔라.

8. 너는 언제나 옷을 깨끗하게 입고, 머리에는 기름을 발라라.

9. 너의 헛된 모든 날, 하나님이 세상에서 너에게 주신 덧없는 모든 날에 너는 너의 사랑하는 아내와 더불어 즐거움을 누려라. 그것은 네가 사는 동안에, 세상에서 애쓴 수고로 받는 몫이다. 

 

[Lumix gx9 / 14mm]

당신은 어른이십니까?

 

주중에 개인적으로 참여하는 기도모임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 모임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멤버 한 명이 시인과의 대화 자리에 참석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시인은 이번 세월호 사건에 대한 어른들의 미안한 마음을 간결한 문장으로 진심을 담아 썼고, 대화의 자리에 모인 학생들에게 그 시를 읽어주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께도 한번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목은 <숨 쉬기도 미안한 사월>이고, 시인은 ‘함민복’입니다.

 

배가 더 기울까봐 끝까지 / 솟아오르는 쪽을 누르고 있으려 / 옷장에 매달려서도 / 움직이지 말라는 방송을 믿으며 / 나 혼자를 버리고 / 다 같이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 갈등을 물리쳤을, 공포를 견디었을 / 바보같이 착한 생명들아! 이 학년들아 // 그대들 앞에 이런 어처구니없음을  / 가능케 한 우리 모두는 / 우리들의 시간은, 우리들의 세월은 / 침묵도, 반성도 부끄러운 죄다 // 쏟아져 들어오는 깜깜한 물을 / 밀어냈을 가녀린 손가락들 / 나는 괜찮다고 바깥세상을 안심시켜 주던 / 가족들 목소리가 여운으로 남은 / 핸드폰을 다급히 품고 / 물속에서 마지막으로 불러 보았을 / 공기방울 글씨 // 엄마, 아빠, 사랑해 // 아, 이 공기, 숨 쉬기도 미안한 사월

 

시인은 이 시를 읽고 나서, 어른들의 잘못이 크고, 어른들이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한 학생이 용기를 내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그럼 시인께서는 본인이 어른이라고 생각하세요?” 아주 날카로운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 앞에 시인은 망설일 수밖에 없었고, 그곳에 함께 있던 다른 어른들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고 합니다. 수많은 익명의 어른 속에 숨어있던 한 사람의 어른이 출현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마치 ‘신 앞에 선 단독자’와 같습니다. 사실 저를 포함해 이곳에 모인 우리 어른들도 어떤 식으로든 이 질문 앞에 답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당장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각자의 삶을 두고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른과 어린이의 차이

 

기도모임에서 이 질문을 두고 생각을 하던 중, 또 다른 질문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럼 어른과 어린이의 차이는 뭘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른과 어린이의 차이 말입니다. 여러 가지 재밌는 말들이 오고가던 중, 기억에 남는 한 대답이 있었습니다. 어른과 어린이를 구분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차이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면 ‘어린이는 어른이 되고 싶어 하고, 어른은 더 이상 어른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 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곳에 중고등부 친구들이 있긴 하지만, 이미 자신이 어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나는 정말 어릴 때 되고 싶었던 바로 그 어른의 모습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쩌면 어릴 때 생각했던 그 어른은 우리가 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되어지는 과정 속에만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의 몸이 어른과 같더라도 어린 아이와 같은 생각에 머물 필요가 있고, 우리가 어린 아이와 같다고 생각하더라도 성숙해져 갈 어른이 되기를 기대한다면 우리는 이미 어른이 됐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두 가지의 긴장상태에서 늘 머물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양립할 수 없는 것들 사이에 머물기

 

신앙인의 삶은 늘 이런 긴장관계 속에 있어야만 합니다.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두 가지 사이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여백이 없는 믿음이 오히려 화가 되듯이, 적절한 의심도 필요합니다. 또 우리는 눈을 감고 집중해 기도해야 하지만, 가끔은 눈을 뜨고 세상을 응시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사실 예수님만큼 다양한 삶을 살아내셨던 분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머릿속에 그려보면 한 가지 이미지에 사로잡히게 되곤 합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님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십자가’, '희생‘, '고난', '고통’, ‘보혈’과 같이 힘든 삶을 사셨던 분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물론 그렇게 살지 않으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그와 정반대되는 삶을 살기도 하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삶을 사셨지만, 인생을 ‘축제’와 같이 즐기기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즐기셨다. 

 

우리도 별명이 있듯이, 예수님도 별명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별명은 무엇이었을까요? 여러 가지 별명이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자’입니다. 들어보신 분도 계시겠지만, 참 낯선 별명입니다. 하지만 이 말이 예수께서 과음, 과식하며 무절제한 생활을 했다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축복을 충분히 누렸다는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고 들었던 본문은 ‘전도서’입니다. 전도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기록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솔로몬 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바로 지혜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부와 명예를 구하기보다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지혜만이 아니라 부와 명예도 함께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기록했다는 ‘전도서’는 어째 분위기가 이상합니다. 첫 구절부터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전1:2)’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삶에 의욕을 완전히 상실한 것처럼 보입니다. 인생은 더 이상 살만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도서의 저자는 단순히 허무주의에 빠져있는 게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 없이 살아갔던 인생에 대해 마음을 담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의 전체적은 분위기가 어두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함께 살펴볼 본문의 분위기는 조금 달라 보입니다. <현대어 성경>이 훨씬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아 이 버전으로 다시 한 번 읽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즐겁게 매일 밥을 먹고 기분 좋게 네 포도주를 마셔라!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렇게 살도록 정해놓으시고 그것을 좋아하고 계신다. 옷은 항상 깨끗하게 입고 머리에는 향기로운 기름을 발라 언제나 축제날 같은 인생을 살아라. 짧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아라.(전9:7-9)’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하던 전도서가 뜬금없이 축제 타령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낯설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이(토니 캠폴로)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지배적인 이미지 중의 하나가 잔치와 축제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저자는 오늘 본문을 통해 ‘언제나 축제날 같은 인생을 살아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적극 수용하고 싶지만, 다른 한편으론 ‘그래도 되나?’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잔치가 중단되지 않도록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이적을 베푼 것도 모자라 가는 곳마다 죄인들과 흥겨운 파티를 열었습니다. 또 그의 가르침도 축제의 비유로 가득했습니다. 돌아온 탕자의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잔치를 열었고, 잃어버린 양과 드라크마를 되찾은 이들도 잔치를 즐겼다고 가르쳤습니다. / 박총, <내 삶을 바꾼 한 구절>, 포이에마, p.165

 

어느 책에서 예수님이 사셨던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당시 정치는 타락했고 경제는 파탄했다. 절대 다수의 백성들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희망을 주어야 할 종교는 시장통보다 더 더러웠고, 사두개파나 바리새파 같은 지도자들은 권력과 신앙적 나르시시즘에 도취돼 있었다. / 위의 책, p.166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건 무엇일까요? 무너진 삶의 터전을 재건하도록 돕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들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기운을 북돋아 줄 필요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노예와 같은 삶을 사는 그들에게 찾아와 한바탕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분이 가는 곳마다 파티가 열리고 축제가 시작됐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언제나 축제날 같은 인생을 살라’는 전도서의 말은 훨씬 잘 와 닿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충분히 누리고 즐길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자발적인 고난

 

하지만 축제의 삶과 더불어 우리가 살아내야 할 또 다른 삶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난을 동반한 삶입니다. 하지만 이 고난은 제가 지난 설교 때 말씀 드린 ‘주어지는 고난’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맞이하는 고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병든 세상을 보며 아파하셨듯이, 우리도 마땅히 병든 세상을 보며 아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억울한 이들의 입과 걸을 수 없는 이들의 발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2천 년 전 고통 받던 이들의 목소리가 여전히 우리 귓가에 맴돌고 있습니다. 

 

저는 얼마 전, 2006년 개봉한 영화 <괴물>을 새롭게 해석한 글을 봤습니다. 괴물이라는 영화 다들 한 번쯤은 보셨을 겁니다. 처음 봤을 때는 비현실적인 SF영화 정도로 여기고 봤습니다. 그런데 영화에 등장한 캐릭터들은 대부분 비유를 해 놓은 거였고, 그 캐릭터에 특정한 대상들을 넣어보니 영화가 새롭게 읽혔습니다. 거대한 힘 앞에 억울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습니다. 잠시 영화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한강둔치에서 매점을 하던 한 가족이 있었습니다. 그 가족은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평범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한강에 나타납니다. 한강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필사적으로 도망가던 주인공의 딸이 괴물에게 잡혀 유유히 사라집니다. 갑작스런 괴물의 출현으로 한강은 모두 폐쇄되고 도시전체는 마비가 됩니다. 많은 이들이 생명을 잃었고 주인공의 가족도 딸이 죽었다고 생각해 합동분향소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있지도 않은 바이러스에 전염됐을지도 모른다는 미국의 발표만 믿고 정부는 피해자 가족들에게 소독약을 뿌려대기까지 합니다. 그 때 마침 죽었다고 생각했던 딸에게 전화가 옵니다. 아직 살아 있을 딸을 찾기 위해 정부에 도움을 청하지만 어느 누구도 믿지 않고 도와주려 하지 않습니다. 그 때부터 주인공 가족의 외로운 싸움이 시작됩니다. 피해자의 가족을 범죄자로 취급하는 거대한 힘을 피해가며 딸아이를 찾아내지만 결국 지체된 시간으로 아이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남은 가족들은 세상을 달리보기 시작합니다. 

 

이 <괴물>이라는 영화가 세월호 사건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이상 억울한 이들이 없도록 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고난은 억울한 이들의 편이 되어주는 ‘자발적인 고난’이어야 합니다. 이들의 편이 되어주다 보면 고난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이 고난은 하늘로부터 주어질 영광과 은총에 비할 것이 못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슬피 우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던 예수님은 하나님을 맞이하지 않은 도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눅19:41-44). 우리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생명과 평화가 없음을 보며 이렇게 슬퍼한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축제와 고난이 함께 하는 삶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 머물러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 될 수 없어 보이는 것들 사이에 서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매일의 삶을 축제처럼 즐기기를 원하십니다. 매일 매일 마음껏 축제의 노래를 부르십시오. 그리고 더불어 우리의 눈을 주위로 돌려 보십시오. 이웃의 아픔과 세상의 아픔에 우리의 마음 향하게 하십시오. 우리가 머물러야 하는 곳은 축제와 고난의 자리, 그 어디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절 후 제2주이기도 하지만, 순교자기념주일이기도 합니다. 매 순간 함께하시는 성령님과 함께 축제로서의 일상과 / 또 순교자들이 걸어간 고난의 일상의 긴장 사이에서 / 때로는 위태하고 때로는 스릴 만점인 파도타기를 하십시오. 그러면 우리 일상은 훨씬 풍성하게 될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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