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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희망 사용설명서

20140525 청파교회 1부 예배 설교 

 

희망 사용설명서

 

<베드로전서 3장 13-17절>

 

13. 그러므로 여러분이 열심으로 선한 일을 하면, 누가 여러분을 해치겠습니까?
14. 그러나 정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의 위협을 무서워하지 말며, 흔들리지 마십시오.
15. 다만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거룩하게 대하십시오. 여러분이 가진 희망을 설명하여 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답변할 수 있게 준비를 해 두십시오.

16. 그러나 온유함과 두려운 마음으로 답변하십시오. 선한 양심을 가지십시오. 그리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여러분의 선한 행실을 욕하는 사람들이, 여러분을 헐뜯는 그 일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17.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뜻이라면,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이, 악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보다 낫습니다.

 

[Lumix gx9 / 14mm]

청소년 설교의 어려움

 

놀러가기 좋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교회로 발걸음을 향하신 여러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설교를 하는 것 못지않게 설교를 준비하는 일도 참 어렵습니다. 준비해 보신 선생님들과 목회자분들은 잘 아시리라 봅니다. 연령대에 맞춰 설교를 준비해야 하는데, 그 중에 교회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설교는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특히 중고등부를 위한 설교가 그러한데요. 왜냐하면 이 친구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자극적인 뭔가’가 항상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자극적인 것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 좋아하는 만큼 그만큼 조심스러운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한번 자극적인 것에 맛을 들이면, 그 자극에서 빠져나오기가 무척 어렵기 때문입니다.

 

자극적인 것의 조심성

 

저는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을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 한 번도 빠짐없이 챙겨보고 있습니다. 최근 무한도전에서는 선거철을 맞아, 향후 10년간 무한도전을 이끌어갈 리더를 뽑기 위한 선거를 하고 있습니다. 멤버들은 캐릭터를 살려 자신들만의 선거유세를 합니다. 거침없는 선거 공방을 주고받는 가운데, 특별히 유재석 후보가 노홍철 후보를 겨냥해 했던 말이 기억났습니다. 자신이 당선되면 숨겨져 있는 멤버들의 사생활과 가족을 공개하겠다는 노홍철 후보를 향해 유재석 후보는 ‘자극적인 것만으로 10년을 이끌어 갈 순 없습니다.’라고 강력하게 이야기합니다. 저도 노후보의 선거공약에 흔들리고 있었는데, 유후보의 그 한마디에 이상하게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무슨 예능에 그렇게 열을 올리며 보느냐 웃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자극적인 것만으로 무한도전 10년을 이끌어 갈 수 없다.’는 그 말이 이상하게도 저 자신을 돌아보게 했습니다.

 

 삶이 무료하고 지루할 때, 우리는 자극적인 그 무엇을 찾습니다. 그래서 불같은 금요일을 뜻하는 ‘불금’이라는 말이 생겼고, 인생역전의 ‘복권’도 생겼고, 목적 없이 떠나는 ‘여행’에 대한 동경도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자극적인 것이 삶을 원활히 돌아가게 만드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자극은 계속해서 더 큰 자극을 필요로 합니다.

 

 사실 제가 담임목사님을 잘 몰랐던 시절, 우연히 목사님의 책을 읽고 위로받았던 것이 바로 그 부분이었습니다. 책들의 제목이 보여주듯이, ‘일상순례자’, ‘삶이 메시지다’는 하나님의 은혜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 속에 숨어있다는 진리를 가리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배시간에 자신의 시선을 바닥과 마주하고 있는 우리 중고등부 친구들의 머리를 들게 하기위해 설교에 자극적인 이야기를 많이 섞고 싶은 유혹도 받지만, 다시 마음을 고쳐먹게 됩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진리는 평범한 일상과 이야기 속에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들이 받을 고난

 

오늘 본문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베드로전서’의 저자는 예수의 12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베드로의 권위를 활용하기 위해 그의 이름으로 기록되었을 뿐, 실제 저자는 알 수 없다는데 학자들의 의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의 실제 저자가 누구이던 간에, 그는 오늘 본문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겪게 될 고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고난을 받다”는 단어가 신약성서 전체에 42번 사용되는데, 그 중에서 12번이 베드로전서에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당시 교회는 고난과 박해의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의 저자가 본 서신을 보냈을 때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 믿는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고, 그것이 옳습니다. 우리는 가끔 번잡한 도심을 벗어나 조용한 공간을 찾긴 하지만, 그것이 믿지 않는 사람들을 피해 사는 삶을 동경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믿지 않는 이들의 삶과는 아무래도 다릅니다. 달라야 합니다. 물론 성서에 기록된 하나님을 만나진 못했지만, 그분의 정신에 잇대어 사는 이들도 많이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진리와 참된 가치는 이 세상이 가리키고 또 가르치는 가치와는 많이 다릅니다. 그러다보면 신앙인들은 주위로부터 고난을 당하기 십상입니다. 그들이 사는 모습은 이 세상과 어울리지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신앙인들을 향해 베드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정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말며, 흔들리지 마십시오.” 사실 우리는 고난이 두려워 ‘정의로운 일’을 피하거나 못 본채 합니다. 따돌림 받는 친구를 못 본채 하고, 굶주리고 있는 친구를 향해 함께 손가락질 합니다. 힘의 논리에 익숙해져버린 우리는, 세월호를 뒤집어 버린 거대한 힘 앞에 침묵하고 몸을 사리고 있습니다. 솔직히 고난만큼 두려운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했고, 예수의 정신과 만났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이 자리에 나와 앉아 있습니다. 요새 저만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주님께서는 이제 앉아있지만 말고, 일어서라고 하시는 듯합니다. 이제는 아주 작은 것부터 행동해야 할 때라고 느껴집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희망

 

그리고 이어서 베드로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가진 희망을 설명하여 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답변할 수 있게 준비를 해 두십시오. 그러나 온유함과 두려운 마음으로 답변하십시오.” 혹시 우리 친구들은 학교에서 “너 교회 왜 다녀? 예수님 왜 믿어?”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나요? 혹은 선생님들 중에 “그대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라는 질문을 들은 적인 있으신가요? 오늘 본문을 인용해 본다면, ‘내가 가진 희망’에 대해 묻는 사람이 있으신지요? 사실 이 질문에 답하기 이전에, 이런 질문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 우리의 모습을 보고 우리의 신분을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염두 해 두어야 할 것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늘 준비해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는 길에 대해 설명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희망에 대해 당황해 하지 않고, 두려운 마음으로 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는 말이 곧 우리의 존재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말과 행동이 다시 말해 말과 우리의 삶이 다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통해 본 기독교의 ‘희망’

 

그럼 15절의 ‘희망’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어떤 ‘희망’을 가져야 할까요? 질문을 좀 거칠게 해 보자면, 여러분들은 기독교 안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를 다니고는 있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희망을 보고 있습니까? 사실 ‘희망’이란 것은 우리가 앞으로 한 걸음 내딛게 하는 힘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더 이상 살 희망이 없어’라고 말하거나, ‘장래희망이 없어’라는 말을 듣고 있노라면, 그 사람은 더 이상 한 걸음도 내딛을 수 있는 힘이나 의욕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기독교인들의 ‘희망’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시편에서는 많은 구절들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 희망은 오직 주님뿐입니다(시 39:7), 주님께 희망을 거는 사람은 복이 있다(시146:5)”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단 하나, 주님입니다. 하지만 이 희망을 사용하는 구체적인 사용설명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건을 구입하면 사용설명서가 들어있듯이, 희망을 갖고자 한다면 설명서를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희망은 세상이 말하는 희망과 다릅니다. 우리의 희망은 고난과 박해를 동반한 희망입니다. 고난과 박해를 동반한 희망이기 보단, 고난과 박해를 통과해야지만 마주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신앙인의 희망’입니다. 그러나 이 고난과 박해는 가만히 앉아 있으면 다가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행동할 때라야, 우리가 움직일 때라야 다가옵니다. 

 

그래서 ‘신앙인의 희망’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16절에서 “선한 양심을 가지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이 ‘선한 양심’은 다양한 세상 속에서 다양한 생각을 갖게 만듭니다. 모든 상황이 자신의 선한 양심에 부합할 때는 문제될 게 없습니다. 자신의 선한 양심에 어긋날 때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의 믿음은 문제가 발생하는 ‘그 순간’ 나타나야 합니다. 주위의 부조리와 아픔과 상처를 보고 우리의 몸을 움직여 도울지, 아니면 모른 채 할 지 우리는 결정해야 합니다. 그 순간 우리가 양심에 따라 옳은 것을 하려 한다면 고난과 박해는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고난과 박해를 통과해야만 우리는 참 ‘희망’을 말할 수 있고 또 만날 수 있습니다. 서두에 말씀드렸지만, 고난과 박해를 경험했을 때라야 얻을 수 있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보여주는 희망과는 전혀 다른 희망입니다.

 

진정한 회심이 필요한 요즘

 

오늘은 감리교 교회력에 따라 ‘웨슬리 회심기념주일’로 지킵니다. 독실한 성공회 사제였던 존 웨슬리는 동지들과 함께 감리교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1738년 5월24일 영국의 런던 올더스게잇 거리에서 우연히 마르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마음이 뜨거워지는 놀라운 경험을 합니다. 그 ‘회심’을 기점으로 그의 삶은 크게 달라졌습니다. 그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전도했는데, 죽을 때까지 40만km나 여행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인생에 있어 올더스게잇 ‘회심’사건은 감리교도인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줍니다. 300년 전쯤, 웨슬리가 경험한 이 ‘회심’의 사건이 매일 우리가 경험해야 할 사건이지만, 요즘처럼 기독교인들에게, 감리교도들에게 필요한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고난과 박해를 향한 회심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러한 고백이 없다면, 지금 이 시간은 우리에게 낭비의 시간입니다. 하지만 모든 물건에 사용설명서가 있듯이,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에도 사용설명서가 필요합니다. ‘희망’을 갖고 살아가자고 한다면, 고난과 박해는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고난과 박해를 통과해야 우리는 참된 희망과 마주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이 아닌 우리의 삶이 동반돼야 하는 것입니다.

 

‘웨슬리 회심기념주일’로 지키는 오늘! 우리는 우리의 안일한 삶의 방식으로부터 돌아서야 합니다. 주위를 향한 무관심으로부터 돌아서야 합니다. 일상의 회심이 필요합니다. 자극적인 것들을 찾아 눈에 불을 켜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삶 속에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찾아야 합니다. 지금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부터 찾으시길 바랍니다. 중고등부 친구들도 자신이 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노란 아픔으로 물든 세상 속에서, 아주 작은 일이라도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나가는 여러분들 되길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

안녕하세요.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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