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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1부] 몸과 마음이 하나 되어

20140323 청파교회 1부 예배 설교

 

몸과 마음이 하나 되어

 

<로마서 7장 22-25절>

 

22.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23.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24.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니 나 자신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습니다.

 

[Lumix gx9 / 20mm]

민속놀이 中 줄다리기

 

민속놀이의 계절은 아니지만 한 가지 질문을 드려보려 합니다. 우리가 아는 민속놀이 중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연날리기, 윷놀이, 널뛰기, 쥐불놀이, 씨름, 그네 등 이외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습니다. 그럼 제가 말씀드리는 이 민속놀이는 어떤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비슷한 말로는 견구(牽鉤)ㆍ마두희ㆍ발하(拔河) 등이 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럼 다른 힌트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 사람이 편을 갈라서, 굵은 밧줄을 마주 잡고 당겨서 승부를 겨루는 놀이.’ 바로 ‘줄다리기’입니다. 

 

설교시작부터 왜 줄다리기를 말씀 드렸냐면 ‘줄다리기’가 마치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 같아보였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의 삶이란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 하는 마음과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마음 사이의 끊임없는 줄다리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어느 쪽 힘이 더 센가에 따라 그 승패는 결정 나기 마련입니다.  

 

바울사도의 고민: 율법

 

오늘 우리가 함께 읽고 들었던 로마서는 바울사도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늘 그러하듯이, 이 이야기도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메시지입니다. 요즘 학자들 사이에서 바울사도에 관한 연구가 새롭게 되고 있다고 합니다. 성경에 대한 연구나 성경인물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로마서는 신약성서에 있는 13개의 바울 서신 중에서 가장 긴 것입니다. 바울은 거대도시인 로마로 가서 전도를 하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방문 전, 로마교회 성도들과 영적인 관계를 맺기 원해서 편지를 쓰는데 이것이 바로 이 ‘로마서’입니다. 특별히 로마서 7장은 ‘율법’과 ‘죄’에 관한 바울 자신의 생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율법’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당시에 ‘율법’이란 히브리어 ‘토라’에서 온 말로 ‘교훈’이라는 뜻인데, 보통 십계명을 중심으로 한 모세 5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을 가리키지만, 때로는 구약성서(Old Testment) 전체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율법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중고등부 학생들은 ‘법’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나요? 어겨서는 안 되며, 어겼을 경우에는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하는 그 무엇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긍정적인 느낌을 주기 보다는 뭔가 거부감이 드는 단어가 아닌가요? 사실 구약의 ‘율법’도 법이라, 그러한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마 바울이 살던 시대와 사회에서는 율법이 곧 지금의 국가법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의 본질은 사라져가고 형식만 남아있는 것을 보며 뭔가 바로잡아야 함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율법과 죄의 줄다리기

 

우리는 ‘죄’를 짓게 되면 어떤 마음이 듭니까? 아직 중고등부 친구들은 어떤 생각과 어떤 행동이 죄인지 알기 쉽지 않을 겁니다. 사실 성인이 되어서도 그것을 알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흔히 우리가 죄를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로 구분하기도 합니다만, ‘죄’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그분이 원하시는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그 무엇(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죄라는 것에는 신기한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전에 혹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을 적에는 죄로 여겨지지 않던 것들이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순간부터,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자 하는 순간부터 죄로 여겨지기 시작합니다. 

 

저에게 있어서 먹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제가 말라 보인다하여 잘 먹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저는 먹는 것을 ‘겁나’ 좋아합니다. 이전에는 사실 배가 고프면 제 배만 든든히 채우면 됐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라는 양반은 저에게 이렇게 속삭이고 계시더군요. ‘누군가 떡을 가지고 있는 한 그 누구도 굶주려서는 안 된다’라고 말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신도의 공동생활 성서의 기도서〉 中) 

 

갑자기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왜 하나님이라는 양반은 혼자 잘 지내고 있던 저를 불편하게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들이 쉽게 떠나지 않았습니다. 아마 이곳에 앉아계신 여러분들도 이러한 경험들이 있으셨을 겁니다. 

 

바울 사도도 이와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로마서 7장 9-10절 말씀을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전에는 율법이 없어서 내가 살아 있었는데, 계명이 들어오니까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나를 생명으로 인도해야 할 그 계명이, 도리어 나를 죽음으로 인도한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생명으로 인도해야 할 그 율법이, 오히려 자신을 죽음으로 인도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자신을 기쁘게만 할 줄 알았는데, 자신을 더 불편하게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깨달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과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코 편한 삶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 말입니다. 오히려 우리를 더 불편하게 만듭니다.

 

되고 싶은 나와 지금의 나 

 

여러분들께 질문 한 가지를 더 드리려고 합니다. 아마 중고등부 친구들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의 과정 중에 있을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되고 싶었던 나와 지금의 나’가 같으십니까? ‘나는 나중에 이런 사람이 되어있을 것이고, 이런 일을 하고 있을 것이며, 이런 위치에 있을 것이다’와 같은 것들 말입니다. 이 질문 앞에 놓여있다 보면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삶이 참 많이 어긋나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인생의 무상함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우리가 마음먹은 것과 그것을 몸으로 살아내는 일 사이의 간격이 꽤나 넓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 중에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먹은 일이 삼일이 못 간다는 말입니다. 뭐 어떤 분들은 ‘작심삼일을 삼일마다 반복하면 평생 가는 것 아닌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만, 마음먹은 것을 삶 속에서 살아낸다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몸과 마음의 끈임 없는 줄타기 

 

신앙생활도 이와 유사해 보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은혜를 받고나면, 우리는 온 몸과 마음을 다해 말씀대로 살아갈 것처럼 다짐하지만, 얼마가지 못해 무너져 내리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바울사도는 이를 가리켜 ‘하나님의 법’과 ‘육신의 법’이 다툰다고 이야기합니다. 자신은 선을 행하려 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자신에게 악이 붙어있다고(롬7:22)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 의 마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내 몸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자신의 마음의 법과 맞서 싸우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매번 몸에 있는 법에 지고 마는 자신을 보며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롬7:24)” 바울의 이 말을 그가 지니고 있던 질병(간질)에 대한 말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지만, 이 맥락에서는 자기 몸, ‘육신의 법’에 지고 마는 자기 자신에 대한 한탄의 말이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자신을 구원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만, 결국 그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는 자신이 두 법을 섬기고 있음을 시인합니다. 하지만 이 시인함은 받아들임의 시인함이라기보다는 간절히 벗어나고 싶어 하는 이의 시인함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생각을 몸으로 옮기기 

 

혹시 자신의 생각대로 몸이 따라주지 않던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자신의 생각과 몸이 항상 어긋남을 경험하십니까? 무엇인가 바꿔보기를 다짐했던 분들은 잘 아실 겁니다. 우리는 ‘공부해야지’라는 생각이 공부하는 몸으로 바뀌는 것이 얼마나 오래 걸리는 작업인지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지’라는 생각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몸으로 바뀌는 것이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를, ‘이제는 누구를 만나든지 미워하기 보다는 사랑해야지’라는 생각이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는 몸으로 바뀌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바꾼 다는 것은 우리의 몸을 바꾼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래서 철학자 파스칼은 이렇게까지 급진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신을 믿는 것처럼 성수를 받고 미사를 드릴 때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믿게 된다.” (토니 마이어스,〈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앨피, p.136-137) 

 

쉽게 이야기하면, 우리의 몸이 예배를 드리는 공간에 있을 때, 그 예배의 형식이 내적인 신념, 믿음을 발생시킨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몸이 형식에 지배를 받을 때, 우리는 자연스레 믿음이 생길 수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그만큼 우리의 몸이 가진 영향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대하는 태도는 곧 삶을 대하는 태도이다.

 

저는 요새 생각하는 바를 몸으로 옮기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실감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수요일마다 하는 작은 기도모임에서 매일 아침 20분씩 향심기도를 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를 나무라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만, 아침에 눈을 뜬 바로 그 자리에서 20분이라는 시간을 내서 기도를 한다는 것이 정말 힘들었습니다. 물론 20분 동안 기도를 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내 몸을 기도하기 위한 몸으로 바꾸기까지의 과정이었습니다. 가끔은 비몽사몽 중에 내가 뭐하는 건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어쩔 때는 기도보다 잠을 택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실패를 거듭하며 좌절할 즈음, 저의 정신을 맑게 하는 이야기와 마주쳤습니다. 

 

“기도의 내용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기도를 대하는 자신의 태도는 더 중요하다. 기도가 어느 곳으로 흘러가는지 도무지 알지 못하는 그 순간에도, 기도를 하겠다고 자신의 태도를 바꾼 것은 곧 자신의 삶을 대하는 태도를 나타낸다. 기도를 하겠다고 자신의 몸을 바꿔낸다면 자신의 삶도 바꿔낼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제가 이 말에서 느낀 것은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내가 바뀌지 않으면 다른 어떤 것도 바뀔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깨달음이 내 생각보다 몸을 바꾸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데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사이 

 

말씀을 마무리하도록 하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법을 섬기는 ‘마음’이라는 것과, 죄의 법을 섬기는 ‘육신(몸)’이라는 것을 구분하며 자신의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분들에게 적절한 이야기가 있어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지난 설날 가정예배 순서지에 나왔던 예화입니다. 한 인디언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할애비 속에는 늑대 두 마리가 있단다. 근데 한 마리는 착하고 다른 한 마리는 나쁘지. 착한 늑대는 사랑, 희망, 기쁨, 연민, 용기가 많고 나쁜 늑대는 미움, 짜증, 시기, 질투, 비겁함이 많지. 이 두 마리 늑대가 할애비 속에서 늘 다툰단다.” 손자가 물었습니다. “그럼 할아버지, 누가 이겨요?” 여러분들은 어떤 늑대가 이길 것 같습니까? 할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먹이를 많이 주는 놈이 이기지” 

 

아주 간단한 이야기지만, 깊은 울림이 있었습니다. 

 

사순절을 보내고 계신 여러분! 우리의 생각과 몸은 끊임없이 줄다리기 중입니다. ‘어떤 생각과 마음을 갖느냐’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자 한다면 반드시 ‘훈련’이 필요합니다. 훈련이라 함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반복하는 것이고, 또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예열작업 없이 바로 시행에 옮기는 것입니다. 실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도해 본 사람만이 실패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의 몸과 마음이 ‘하나님의 법’에 언제든지 반응할 수 있도록 살아가는 여러분들 되길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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