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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1부] '주님을 압니다' 하면서도

20130728 청파교회 1부 예배 설교 

 

‘주님을 압니다’ 하면서도

 

<호세아 8장 1-6절>

 

1. "나팔을 불어서 비상경보를 알려라! 이스라엘 백성이 나의 언약을 깨뜨리고, 내가 가르쳐 준 율법을 어겼으므로, 적군이 독수리처럼 나 주의 집을 덮칠 것이다.

2. '우리의 하나님, 우리 이스라엘이 주님을 압니다.' 하고 나에게 호소하면서도,

3. 복된 생활을 뿌리치니 적군에게 쫓길 것이다.

4. 이스라엘이 왕들을 세웠으나, 나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다. 통치자들을 세웠으나, 그 또한 내가 모르는 일이다. 은과 금을 녹여서 신상들을 만들어 세웠으나, 마침내 망하고야 말 것이다.

5. 사마리아 사람들아, 나는 너희의 송아지 우상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들 때문에 나의 분노가 활활 타오른다. 너희가 언제 깨끗해지겠느냐?

6. 이스라엘에서 우상이 나오다니! 송아지 신상은 대장장이가 만든 것일 뿐, 그것은 신이 아니다. 사마리아의 신상 송아지는 산산조각날 것이다.

 

[Lumix gx9 / 14mm]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저는 지난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송파지방 생명나무교회 청소년부 수련회를 도와주러 다녀왔습니다. 제 동기가 사역하고 있는 교회인데, 제가 아니면 안 된다고, 굳이 제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여 도와주러 다녀왔습니다. 그 친구와 저는 같은 청소년부 전도사지만, 손님으로 간 교회에서 저는 그저 이방인 전도사일 뿐이었습니다. 다른 교회 청소년부 친구들을 만나고 나니, 우리 교회 중고등부 학생들이 얼마나 그립던지 전도사님의 이 깊은 마음을 아려나 모르겠습니다.

 

그 교회 청소년부 수련회 주제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고백’이었고, 중심말씀은 마태복음 16장16절 “주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였습니다. 이러한 고백을 한 인물은 시몬 베드로였는데, 저는 그보다 바로 앞 구절 15절 말씀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 앞에 잠시 머물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했던 그 질문이 마치 저에게 하는 질문 같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안 다는 것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를 다른 사람에게 설명한다는 것, 누군가에 대해 말한다는 것의 기본전제는 ‘앎’입니다. 안다는 것이지요. 자신이 아는 범위 안에서 그 사람에 대해 말하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 중고등부 친구들은 좋아하는 연예인들이 있을 텐데, 그 연예인을 누군가에게 소개하려면 자신이 듣고 본 정보, 그리고 만났던 경험과 같이 그 사람에 대한 ‘충만한 묵상’을 통하여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알 수는 없습니다. 만약 알지 못했던 사실을 알게 된다면 우리의 ‘앎’은 바뀌게 될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의 고백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물론 그의 고백은 기독교 역사에 길이 남을 모범 답안의 고백이 되었지만, 이 또한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과 직접 만난 고백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기독교신앙의 근원적인 질문과도 같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 앞에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 살아오며 내가 경험하고 만난 예수님이겠지요, 후에 삶이 더 무르익어 예수님의 다른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면 우리의 고백은 또다시 달라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이성과 감성이 새로운 ‘앎’에 도달하게 된다면 이러한 ‘앎’은 우리를 더 넓고 깊은 길로 안내해 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북왕국 이스라엘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은 호세아입니다. ‘구원’이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호세아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죄를 꾸짖고 그들의 회개를 외친 이스라엘 최대의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이사야보다는 조금 전에 활동했고, 아모스보다는 조금 후에 활동한 인물입니다. (아모스►호세아►이사야) 

 

호세아가 활동하던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임에도 불구하고, 이방세력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성전에는 이방세력으로부터 얻어낸 제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는 ‘송아지 우상’이 세워져 있었으며, 입술로만 외치는 형식적인 제사, 예배만 남아있었습니다. 성전건축과 성전의 예술적인 웅장함은 교회를 괴물과 같이 바꿔놓기 시작했고, 그곳에 거하는 이들을 교만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는 마치 창세기(11:1-9)에 나오는 바벨탑 사건을 보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예언자의 설교는 멸시되기 일쑤였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민족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북왕국 이스라엘은 언제나 되풀이해서 하나님을 안다고 확언했습니다. 그 민족은 하나님이 주신 의무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고백은 경건한 말로만 머무는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삶으로 보이는 순종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호세아 8장을 통해 보여 지는 하나님은 몹시 격양되어 보입니다. 분노에 가득 찬 하나님은 당장이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려하시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늘 그러하듯이 당신의 분노해소를 위한 것이 아니라, 어서 어둠의 길에서 돌아서기를 바라는 부모의 안타까운 심정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좀 더 주의 깊게 보고자 하는 구절은 2절과 3절입니다. 다시 한 번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하나님, 우리 이스라엘의 주님을 압니다.’하고 나에게 호소하면서도 복된 생활을 뿌리치니 적군에게 쫓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앎이 삶으로 이어지지 않자 그들의 앎은 허공을 맴도는 추상적인 앎이 되었습니다. 관념화된 하나님은 그저 경전 속에 머무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한 ‘앎’을 삶 속에서 제대로 풀어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앎’이 잘못된 ‘앎’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안다고 고백했지만 혹시 안다는 것이 잘못된 앎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이 우리의 삶을 무의식중에 이끌어간다면, 바르게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자크 라캉의 세 가지 기준 

 

우리는 살아가다보면 점점 더 확실한 것이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특히 인생이라는 것 자체가 그러합니다. 여러분들은 얼마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정말 나에 대해서 완벽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남은 모르고 나만 아는 내 모습을 스스로 안다고 하여서, 나 자신을 다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얼마 전, 지인과 차 한 잔을 하며 이런 질문은 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지 물었었습니다. ‘사람들 앞에 보여 지는 나’와 ‘혼자 있을 때의 나’중에 언제가 진짜 자신의 모습에 가까운지 물어봤습니다. 그러자 그 분은 당연하다는 듯이 ‘혼자 있을 때의 나’가 원래의 자신에 가깝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물론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프랑스 철학가이자 정신분석가인 ‘자크 라캉(Jacques Lacan)’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세 가지로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세계를 일러 ‘상징계’라고 불렀고, 우리의 생각과 환상 속에 머무는 세계를 ‘상상계’라고 불렀으며, ‘상징계’와 ‘상상계’에 속하지 않는 실재의 우리 모습이 드러나는 세계를 ‘실재계’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에 나 자신을 대입해보면 굉장히 흥미로워집니다. 주위사람들이 ‘너는 이런 사람이다.’라고 부르는 것을 ‘상징계의 나’라고 부른다면,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는 ‘상상계의 나’가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들이 보는 나와 내가 보는 나에 속하지 않는 ‘실재계의 나’가 있게 되는 것이지요. 간단히 요약하여 말씀드린 것이지만, 지금 말씀드린 이 이야기는 수많은 철학가들과 신학자들이 오랜 시간과 수많은 사례를 통하여 발견한 사실이기도 합니다. 내 본래의 모습을 아는 것도 이렇게 험난한데. 온 인류와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인식하고 안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진에 찍힌 나, 사진을 찍는 나 

 

우리는 가끔 사진에 찍힌 나를 보게 됩니다.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고 찍힌 사진을 보다보면 ‘내가 원래 저렇게 생겼었나?’, ‘내가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지?’, ‘나는 왜 저렇게 비딱하고 구부정하고 있지?’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을 겁니다. 우리 중고등부 친구들과 젊은 분들은 셀프 카메라 찍는 것을 좋아하실 겁니다. 감히 남에게 보여주기 민망한 오직 자기 만족 용 셀카 사진들이 있을 겁니다. 셀카에 찍힌 자신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이만한 모델과 외모가 없을 겁니다. 곧 연예계에 데뷔해도 될 만큼 그렇게 예쁘고 잘 생길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셀카 속 자신의 모습은 진짜 내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의식적이고 만들어진 내 모습일 뿐입니다. 인정하기 싫지만 자신도 모른 채 찍힌 사진 속의 내 모습이 진짜 내 모습에 가깝습니다. 평소의 매우 일상적인 내 모습인 것입니다. 나는 모르는, 나만 모르는 내 모습을 나 아닌 다른 모든 사람들(타자)은 알고 있는 내 모습인 것입니다.

 

‘주님을 압니다.’라는 고백의 한계성 

 

조금 전,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님을 압니다. 하나님을 압니다.’라는 고백을 들었습니다. 나를 찾는 과정이 한평생일턴데, 내 옆에 있는 친구를 안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우리의 인식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인 것입니다. 물론 각자의 삶을 통해 마주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금 자신이 아는 것의 전부일 테지만, 그 ‘앎’이란 늘 불완전한 상태임이 분명합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올바로 알았다면 그들을 위한 통치자를 세우거나, 은과 금을 녹여 송아지 신상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전도서에 나타난 솔로몬의 고백이 더 솔직하고 정직한 고백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두고서, 나는 깨달은 바가 있다. 그것은 아무도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뜻을 찾아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사람은 그 뜻을 찾지 못한다. 혹 지혜 있는 사람이 안다고 주장할지도 모르지만, 그 사람도 정말 그 뜻을 알 수는 없는 것이다.” (전도서 8장17절)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는 솔로몬의 고백. 아무리 애를 쓰고 써 봐도 사람은 그 뜻을 알지 못하겠다는 그의 고백이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알지만, 모르는 듯이

 

말씀 도입부에 했던 질문을 여러분들은 기억하실 겁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해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막16:15)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은 누구시며, 예수님은 또 누구십니까? 지금 세상의 많은 크리스찬들은 이 질문 앞에 답을 내리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완고하여 여백이 없는 확신보다, 차라리 흔들리며 의심하고 살아가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불안함을 못 견디는 것이 인간의 한계임을 어찌하겠습니까.

 

1부 예배에 참석하신 여러분. 특히 중고등부 친구들.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남들의 입을 통한 고백 말고, 내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그 고백은 세워졌다가도 다시 무너지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번 주 목요일부터 중고등부 친구들은 수련회를 떠나게 됩니다. 낯선 장소에서 낯선 친구들을 만나며 내 신앙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 한번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주님을 압니다.’하면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삶을 살고 계시진 않습니까? 스스로는 ‘하나님을 압니다.’하면서도 교회 밖에서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당신은 정말 하나님을 아는 것 맞습니까?’라는 안타까움의 말들을 듣고 계시진 않습니까? 한 주간 무더위 가운데 지쳐계신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적셔주시는 한 주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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