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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1부] 작기에 큰 믿음

20130428 청파교회 1부 예배 설교

 

작기의 큰 믿음

 

<여호수아 7장 2-5절>

 

2. 여호수아가 여리고에서 베델 동쪽 벳아웬 곁에 있는 아이 성으로 사람들을 보내면서, 그들에게 올라가서 그 땅을 정탐하라고 지시하니,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 성을 정탐하였다.
3.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돌아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모든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할 필요가 없을 것 같 습니다. 이천 명이나 삼천 명만 올라가도 아이 성을 칠 수 있습니다. 모든 백성이 그 성을 치느라고  다 수고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의 수가 얼마 되지 않습니다."
4. 백성 가운데서 약 삼천 명이 그리로 올라갔다. 그러나 그들은 도리어 아이 성 사람에게 패하여 도망쳐 왔다.
5. 아이 성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을 서른여섯 명쯤 죽이고, 성문 앞에서부터 스바림까지 추격하여 비탈길에서 그들을 쳤으므로, 백성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Lumix gx9 / 20mm]

삶에서 의미 찾기

 

지난 주 1부 예배 설교를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의미해 보이는 삶에서 의미를 발견하라는 전도사님의 그 말씀. 여러분들은 한 주간 잘 실천하셨습니까. 저는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습니다. 예민하게 삶을 들여다보지 않고 흘려보내다보니, 어느새 시간은 저를 앞질러 있었습니다. 특히 중간고사를 보내고 계신 선생님이나 중고등부 학생들의 한 주는 삶의 ‘의미’보다는 삶에 겨우 겨우 ‘의지’하여 살아가진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삶을 충만히 즐긴다는 것, 삶을 꼼꼼히 살아간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반복되는 삶 속 믿음

 

우리의 삶은 반복적이어서 무료하게 느껴지거나 무의미해보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반복적인 삶 속에서 우리의 믿음은 더욱 선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 우리의 믿음은 비범해야 합니다. 호시노 도미히로라는 분의 <일일초>라는 시가 있습니다. 아마 들어보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한번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일초> - 호시노 도미히로 

 

오늘도 한 가지 슬픈 일이 있었다.
오늘도 또 한 가지 기쁜 일이 있었다.

 

웃었다가 울었다가
희망했다가 포기했다가
미워했다가 사랑했다가


그리고 이런 하나하나의 일들을
부드럽게 감싸 주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평범한 일들이 있었다.

 

매일 하루가 그렇다.
다양한 일들과 감정들이 생기지만, 

이러한 복합적인 감정을 잊게 할 ‘평범’한 행복이 있었다.

 

여러분, 믿음이 필요한 순간은 지극히도 ‘평범’한 순간들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러한 순간순간들이 축척되어 더욱 견고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여정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 ‘가나안’을 얻기 위한 여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진행하기 시작합니다. 가장 먼저 그들이 마주한 시험대는 여리고 성이었습니다.

 

제가 교회학교 시절,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이야기는 그림을 통해 많이 보아왔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전투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데리고 매일 여리고성 주위를 한 바퀴씩 돌되, 6일 동안 그렇게 합니다(3절). 그리고 제사장 일곱 명은 숫양 뿔 나팔 일곱 개를 들고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걷습니다. 그러다 7일째 되는 날,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을 일곱 번 돌게 됩니다. 그 후, 제사장들이 나팔을 한 번 길게 불면 그 나팔 소리를 듣고 백성들은 큰 함성을 지릅니다. 그러자 성벽이 무너져 내렸고 어려움 없이 여리고 성을 정복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여리고성 함락을 이룬 바로 그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음 목표를 아이성으로 잡습니다. 여리고성을 함락했다는 승리감에 도취해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이성 함락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기쁨에 도취되어 있는 그 순간, 그들에게 어려움이 닥쳐왔습니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승리에 대한 확신, 믿음은 하나님보다 앞서 있었습니다.

 

아이성에 정탐꾼을 보내고 그들의 보고와 의견에 따라 삼천 명의 군사를 작전에 투입하지만 결과는 참패였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 내부에 있는 결함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자성어 중에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일에는 탈이 많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좋은 일에는 방해가 많이 따른다거나, 좋은 일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많은 풍파를 겪어야 한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삶도 이와 비슷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알기 위해서 그들은 더 많은 풍파를 겪어야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 가운데 있던 유다 지파 사람 ‘아간’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 중에 하나님께 바친 물건을 훔치게 됩니다. 그 사실을 모르고 아이성을 함락하려했던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큰 패배를 얻고 맙니다. 아이(children) 성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른(adult) 이상의 거대한 거인과도 같은 성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6절의 말씀은 ‘여호수아는 슬퍼하면서 옷을 찢고,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서 저녁때까지 있었고, 장로들도 그를 따라 슬픔에 젖어, 머리에 먼지를 뒤집어썼다(수5:6)’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쁨에 취해 하나님을 잊고 말았던 것입니다. 가장 민감해야 할 순간, 그들은 가장 둔감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믿음은 무뎌졌고, 매우 익숙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자신들 옆에 있는 그 ‘아간’이라는 한 사람을 돌아보지 못함으로 참담한 패배를 겪고 말았습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생활도 아이성을 앞에 둔 이스라엘 백성과 같진 않은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너무 무뎌져있거나 습관화되어 있진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냉소적인’ 믿음을 넘어

 

제가 몸담고 있는 기관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을 통해 참석하게 된 작은 책모임이 있습니다. 그곳에 참석한지도 벌써 1년 반이 된 것 같습니다. 모임에는 목사님, 전도사님, 대학생들이 소수로 참석을 합니다. 매주 정해진 양의 책을 읽고 자신의 생각을 나누는 모임입니다. 그 모임을 참석하던 중 어느 날, 저를 몹시 불편하게 하는 이야기와 마주쳤던 기억이 납니다.

 

의식 있고 진보적인 사고를 한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은 합리적인 질문과 답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세워나갑니다. 합리적인 질문을 던지고 이해 가능한 답을 얻고 그 이해의 틀 안에서 자신의 신앙을 다져나갑니다. 이는 건강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이성에 바탕을 둔 ‘합리적’이라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합리적인 질문은 언제든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는 자칫 사람을 ‘냉소적’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냉소적‘이라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이해가 되지 않으면 믿으려 하지 않는 다는 말입니다.머리로 이해되지 않으면 자신의 몸을 움직이려 하지 않습니다. 자기 신앙의 최종적인 판단은 자기 이성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이성, 혹은 합리적인 판단은 반드시 한계에 부딪칩니다. 우리의 이성만으로는 하나님께 닿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과 논쟁하려 했던 욥기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 네가 그처럼 많이 알면, 내 물음에 대답해 보아라(욥38:2-4).” 

 

우리의 이성이 하나님의 지혜를 앞서려고 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내 어떤 판단은 ‘합리성’을 중심으로 행동하되, 또 어떤 것들은 ‘합리성 넘어서’ 온다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 눈에 보여 지는 것이 내가 아는 것의 전부는 아닙니다.

 

이는 여러분들에게 드리는 말씀이기에 앞서 제 앞에 주어진 말씀이었습니다. 어느 순간, 제 믿음은 어디에 있나,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평범한 일상에서 예민하게 자신을 돌아보거나 섬세하게 이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믿음이 머리에만 머물고, 내 몸은 여전히 굳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믿음이 필요한 순간은 너무도 작은일 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전혀 의식할 수 없었습니다. 믿음이 필요한 순간은 큰일 속에 있지 않았습니다.

 

작지만 큰 것이 아니라, 작기에 큰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큰 것, 강한 것, 넓은 것, 많은 것과 같이 바로 눈에 보여 지는 것들로 가치를 판단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게 옳은 것인지는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몇 주 전, 예배를 마치고 사랑방에서 지은이, 다빈이와 나눴던 얘기가 생각납니다. 키가 크고 싶다는 그 친구들의 이야기에 “너희들은 왜 키가 크고 싶고, 또 왜 키가 큰 남자가 좋으니?”라고 물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자 그 친구들은 키가 커야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놀림 받지 않는다고 말하더군요. 덩치가 크면 남들이 함부로 못한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감사하게 제 키를 보고 크다 여겨주시는 분들이 있는데, 제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꼭 키가 크다고 해서 놀림 받지 않거나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키가 큰 부류에 속했던 저를 돌아봤을 때, 크다는 것이 별 실속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습니다. 큰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을 ‘작지만 큰 믿음’으로 할 것인지, ‘작기에 큰 믿음’으로 할 것인지 고민했습니다. 이 두 말은 비슷하게 보이지만 큰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은 것을 크다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당장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을 조금 비틀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변방(邊方)의 믿음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가장자리 지역’이라는 변방(邊方)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신영복 선생님은 우리가 살아온 인류사는 언제나 변방이 역사의 새로운 중심이 되어 왔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리엔트의 변방이었던 그리스·로마, 그리스·로마의 변방이었던 비잔틴, 근대사의 시작이 되었던 네덜란드와 영국 그리고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에 이르기까지 인류 문명은 그 중심지가 부단히 변방으로 이동해 온 역사입니다. (신영복, <변방을 찾아서>, 돌베개, p.25-26).

 

보잘 것 없고, 작게만 여겨지던 변방이라는 공간이 중심을 향해가는 과정을 보며 우리의 믿음생활을 보게 됩니다. 삶의 중심이신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은 변방의 믿음, 다시 말해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작은 믿음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크고 작은 개념은 우리의 그것과는 다릅니다.

 

믿음의 성공은 결과에 있지 않고 과정 속에 있다

 

여러분, 믿음이 필요한 순간은 그리 대단해 보이는 순간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매우 일상적인 삶의 영역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반복해서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하지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성공은 결과에 있지 않고 과정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살아내려는 그 모습만을 보고도 흐뭇해하실 것입니다. 민감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내시길 바랍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극히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 일에도 충실하고, 지극히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 일에도 불의하다(눅16:10)." 부디 한 주간, 우리의 믿음이 순간의 기쁨에 심취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되지 않도록 정신을 맑게 하는 한 주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

안녕하세요.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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