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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고난주간] 나에게 찾아온 낯선 손님

20130330 청파교회 고난주간 기도회 설교

 

나에게 찾아온 낯선 손님

 

<요한복음 19장 38-42절> 

 

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39.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40.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41.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42. 이 날은 유대인의 준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Lumix gx9 / 20mm]

The Guest House _ Rumi 


어느 덧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된 사순절 여정의 마지막이 다가 왔습니다. 부활절을 하루 앞 둔 오늘. 여러분의 하루는 어떠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고난주간을 시작하며 우연히 만난 한편의 시가 있었습니다. 들어보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 시를 읽어드리고자 합니다. 페르시아(터키)에 살았던 ‘루미’라는 시인의 ‘여행자의 집’ 혹은 ‘받아들임’이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여행자의 집(The Guest House)> - Rumi

 

인간이라는 존재는 여인숙 또는 여행자의 집과 같다.
매일 아침 새로운 손님이 도착한다.

 

기쁨, 절망, 슬픔
그리고 약간의 순간적인 깨달음도
예기치 않은 방문객처럼 찾아온다.

 

그 모두를 환영하고 맞아들여라.
설령 그들이 슬픔의 군중이어서
그대의 집을 난폭하게 쓸어가 버리고
가구들을 몽땅 휩쓸고 가더라도
그렇다 하여도 각각의 손님을 존중하라.

 

그들은 어떤 새로운 기쁨을 주기 위해
그대를 청소하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어두운 생각, 부끄러움, 후회가 찾아오거든
그들을 문에서 웃으며 맞이해라.
그리고 그들을 집 안으로 초대해라.
누가 들어오든 감사하게 여기라.

 

모든 손님은 저 멀리에서 보낸
안내자들이니까 말이다.

 

부활절을 하루 앞 둔 오늘, 여러분은 여러분 각자에게 찾아온 손님들을 어떻게 맞아들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많은 생각과 많은 감정들, 혹은 너무나도 평범했던 일상들과 함께 보내고 오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의 하루는 어떠했을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내면에 들려오는 목소리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바로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가장 먼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등장합니다. 그는 아리마대 출신으로 공의회 의원이었으며 누가복음에 의하면(눅23:50)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착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예수의 죽음 이후,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도 되는지 빌라도에게 찾아가 묻습니다. ① 죽음으로 내 몰리던 예수를 보며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아리마대 요셉은, ② 예수의 죽음과 자신이 연류 되는 게 무서워 도망쳤던 그 요셉은 예수의 죽음 이후, 다시 그를 찾아오게 됩니다.

 

 왜 그는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일까요?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가 땅에서 들려서 올라갈 때에, 나는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어 올 것이다”(요12:32)라는 말의 예언 성취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시선을 요셉 개인에게로 돌려보고자 합니다. 과연 그는 어떠한 상황에 놓여있었을까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그를 불편하게 하지 않았겠습니까? 외로이 죽음으로 내 몰리던 예수를 외면했던 자신의 모습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애타게 기다렸던 그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던 예수를 결정적인 순간 모른 채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혼란과 실망 속에 빠져들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 다음 장면입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그 자리에 주저 앉아있지만 않았습니다. 자신의 나약함과 대면했던 그는 스스로에게 실망하며 그 현실을 외면했던 것이 아니라,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빌라도에게 찾아가 예수의 시신을 거두게 하여 달라고 부탁한 후, 직접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리게 됩니다(38절). 무엇이 그를 그렇게까지 행동하게 했을까요? 그는 끝까지 모른 척 할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의 죽음에 끝까지 연류 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엇이 두려움에 잡혀있던 그를 다시 일어서게 했을까요? 바로 자기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외면했던 예수에게 가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내면의 음성을 들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마치 출애굽기의 한 장면처럼 떨기에 붙었던 불(출3:2)과 같은 뜨거운 불꽃에 점화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를 가만히 두지 않는 마음의 불편함이 그를 움직이게 했습니다.

 

그 다음 등장하는 니고데모(39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 밤 중에 예수를 찾아가 예수를 일러 하나님이 보내신 이라고 고백(요3:1-15)했던 그도 예수의 죽음 앞에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도 어째서인가 예수께 다시 나아옵니다. 더군다나 그는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백 근(백 리트라이)쯤 가지고 왔습니다. 백근은 약 33킬로그램 정도 되는 무게인데, 이 정도의 양은 왕의 장례에만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수의 장례’가 곧 ‘왕의 장례’에 합당한 것이라고 보여주었습니다(R. Brown. John, p960). 이렇듯 니고데모도 예수의 죽음 이후에 자기 내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예수께 가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내면의 음성과 변화의 시작


우리는 살아가며 나를 움직이는 내면의 음성과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내 삶을 새로 구성하게 하는 ‘진실’과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혹은 나를 몹시 불편하게 하여 내가 소중히 여기던 것들을 뒤흔드는 순간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경험, 감정, 생각들은 자신이 갇혀 살던 세상과는 너무도 낯선 것이기에 모른 채 하며 망각 속으로 흘려보내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변화’란, 바로 이러한 작지만 큰 지점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너무 낯설어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그 무엇,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삶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또 다른 삶의 영역이 있음을 경험하게 되는 것.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여겨 뒤돌아섰지만, 끝끝내 나를 돌아 세우려는 내면의 요청들이 바로 하나님께 이끄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두려움을 이겨내고 예수의 시신을 거두었던 것과 같이 말입니다.

 

예수의 얼굴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는 예수의 죽음을 통해 무엇을 보고 느끼게 되었던 것일까요? 어떤 내면의 소리와 마주쳤기에 스스로 외면했던 예수에게 다시 돌아갔던 것일까요? 잠시 그 상황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나와 함께 다른 세상을 꿈꾸던 이가 있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과는 다른 그 무엇을 가르치는 선생이 있었습니다. 그곳을 우리는 하나님 나라라고 불렀습니다. 그 세상에는 높고 낮음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꿈을 불어넣어주신 그 분이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그것도 십자가 달려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이젠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하지만 그를 저버렸다는 심적 고통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예수의 고통스러운 얼굴을 잊을 수 없습니다.’ 예수의 죽음이 가져오는 알 수 없는 내적인 꿈틀거림이 생긴 것입니다.

 

 당시 예수의 죽음을 통해 보여 진 요셉과 니고데모의 경험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일상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 주위에서도 쓰러져가고 있는, 끊어질듯 한 숨소리로 우리를 부르는 예수의 음성이 들리진 않나 돌아봐야 합니다. 나의 편안한 삶 속에 불현 듯 닥쳐온 세상의 아픔들, 그리고 죽음의 숨소리들. 평소에 쉽게 외면해 버렸던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우리를 부르는 세상의 아픔은 저 먼 곳에서 들려오는 신기루와 같은 아픔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잠깐 아팠지만 금방 사라져버리고 마는 아픔들. 당장 내 앞의 놓인 일 때문에, 다른 이의 아픔은 늘 뒷전으로 생각했던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그 아픔이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와 함께 아파하기에는 우리의 심장이 너무 굳어버린 것은 아닐까 두렵기도 합니다.

 

 바로 옆에 있는 이들의 아픔


최근 들어 제 주위에 아픈 이들의 소식이 자주 들려옵니다. 지인들이 직접 다치거나 아픈 분들도 있고, 또 지인들의 부모님들이 많이 아프시거나 사고를 당한 소식이 들려옵니다. 우리는 TV를 통해서나 주위 사람들을 통해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의 아픈 소식을 전해 듣곤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아픔이 나에게 고스란히 전해지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마치 먼 나라 이야기 같아 보이기만 합니다. 안타까운 일인 건 사실이지만 함께 아파하거나, 직접 도움의 손길을 내밀거나, 간절한 기도의 자리까지 그 일들을 가지고 오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바로 옆에 있는 이들의 아픔은 어떠합니까? 나와 직접 관계를 맺고 있고, 나와 공간을 함께 점유하고 있고,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이들의 아픔과 고통은 어떠합니까? 쉽게 외면할 수 없고 또 남의 일로만 볼 수 없습니다. 최근 지인들의 아픈 소식은 저 또한 아프게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의 고난과 아픔은 우리에게 먼 나라 이야기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스스로에게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활은 불편한 것과 낯선 것을 받아들임으로부터 시작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된 40일 간의 여정은 마치 인생의 축소판처럼 보입니다. 아직 제 스스로 인생을 논하기엔 턱없이 모자란 삶이지만 그렇게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순절, 고난주간을 지내며 예수의 고난이 마치 인생의 다양함을 보여주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많이 아파하셨습니다. 아파하시다 돌아가셨습니다. 비록 죽음 후에 그를 통해 하나님을 만난 이들이 찾아왔지만, 예수님은 참 아프셨을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 주위에선 아파하는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아파하는 작은 그 음성을 듣는 것이 어쩌면 하나님의 가장 큰 부르심인지도 모릅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이들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는 것부터 시작하길 바랍니다. 그러면 이 세상의 아픔도 우리 모두와 연결되어 있음을 경험하게 되실 겁니다.

 

 부활절을 하루 앞 둔 오늘, 우리에게 낯섦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부름에 삶으로 반응하시길 바랍니다. 두려움을 이기고 예수님께 나아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요셉과 니고데모처럼 우리 내면에 주어진 불편함, 낯섦 들을 반갑게 맞아들이길 바랍니다. 그러한 받아들임으로부터 부활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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