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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1부] 다시 보게 된다는 것

20120826 청파 1부 예배 설교

 

다시 보게 된다는 것

 

<사도행전 9장10-19절>
 

10. 그런데 다마스쿠스에는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있었다.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서 "아나니아야!" 하고 부르시니, 아나니아가 "주님,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1.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서 '곧은 길'이라 부르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사울이라는 다소 사람을 찾아라. 그는 지금 기도하고 있다. 

12. 그는 [환상 속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손을 얹어 시력을 회복시켜 주는 것을 보았다." 

13. 아나니아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해를 끼쳤는지를, 나는 많은 사람에게서 들었습니다. 

14. 그리고 그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잡아 갈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아 가지고, 여기에 와 있습니다." 15.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그는 내 이름을 이방 사람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가
고 갈, 내가 택한 내 그릇이다.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지를, 내가 그에게 보여주려고 한다." 

17. 그래서 아나니아가 떠나서,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손을 얹고 "형제 사울이여, 그대가 오는 도중에 그대에게 나타나신 주 예수께서 나를 보내셨소. 그것은 그대가 시력을 회복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도록 하시려는 것이오" 하고 말하였다. 

18.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고, 그는 시력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서 세례를 받고 

19. 음식을 먹고 힘을 얻었다. 사울은 며칠 동안 다마스쿠스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지냈다. 

[Lumix gx9 / 20mm]

설교자로의 부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이곳에 가득하길 바랍니다. 대중 앞에 선다는 것은 늘 부담되는 일입니다. 하물며 설교자로 부름 받아 신앙 공동체 앞에 선다는 것은 더 큰 부담과 긴장을 가져옵니다. 왜냐하면 내게 주어진 삶을 꼼꼼히 돌아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걸어온 발자취의 흔적을 톱아보는 것과 같아 보입니다. 
 

또한 설교 자리로의 부름은 반복되는 일상을 정성스레 들여다보게 합니다.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사람들에게 깊은 관심을 갖게 만들었고, 소소하게 나누는 삶의 이야기들에 더 귀를 기울이게 했으며, 눈으로 보는 모든 것들을 마음에 담으려 애쓰게 했습니다. 설교자로 선 저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매일을 이러한 자세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인생은 훨씬 더 풍요로워질 텐데 말입니다.

 

다시보기 TV 프로그램
 
현재 저는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할머니와 살고 있습니다. 할머니께 서울생활의 소소한 유익함이라도 드리고자 집에 TV를 두었습니다. TV를 집에 두고 있다 보니 없었던 시스템의 변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모두 잘 알고 있듯이, TV는 정규방송과 케이블을 통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각자의 선호에 맞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존 TV의 단점은 한번 놓친 프로그램은 다시 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정규시간을 놓치면 재방송을 할 때까지 놓친 프로그램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프로그램 어떤 것이든 자신이 원할 때 볼 수 있는 ‘다시보기’ 시
스템이 도입됐습니다. 물론 인터넷 상에는 그 이전부터 ‘다시보기’가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말입니다.

 

다양한 이유가 있었겠지만, 보통 우리가 TV 프로그램이든 영화든 ‘다시 본다는 것’은 바쁜 일상 때문에 보지 못하고 놓쳤었거나, 자신에게 주었던 어떤 유익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자 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9장에도 자신의 삶을 다시 보게 된 인물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울입니다. 그는 지난 삶에서 놓쳤던 부분들을 예수로 인해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유익이 아닌 하나님의 유익에 동참하게 됩니다.

 
살기등등한 사울
 
사도행전에는 회개 이전의 사울을 표현하는 몇 개의 구절이 나옵니다. ‘사울은 스데반이 죽임 당한 것을 마땅하게 여겼다(행8:1)’, ‘사울은 교회를 없애려고 날뛰었다(행8:3)’,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위협하면서, 살기를 띠고 있었다(행9:1).’ 그는 예수를 전하는 자라면 누구라도 상관없이 없애기 위해 살기가 등등한 인물이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 이전에는 사울이 다마스쿠스(다메섹)로 향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대제사장들에게 다마스쿠스에 있는 여러 회당에 편지를 보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편지의 내용은 성서에 기록되어있진 않지만 아마 자신이 하는 행동의 합법성을 마련하기 위한 내용이었을 것입니다. 그 ‘도’를 믿는 사람 즉,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은 닥치는 대로 묶어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올 수 있는 합법성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사울은 다마스쿠스로 향하기 바로 전까지도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확고함에는 의심 따위는 전혀 없었습니다.

 
사울의 회개
 
스스로 의로움에 가득 찬 사울은 목적달성을 위해 다마스쿠스로 향합니다. 거의 목적지에 이르렀을 때, 하늘에서 환한 빛이 그를 둘러쌓습니다. 그리고선 그에게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이는 예수의 음성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지만 아무 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 날 이후, 사울은 사흘 동안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흘은 그에게 있어 굉장히 중요한 시간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의 전존재가 흔들리는 시간이었습니다. 기존에 자신이 믿어왔던 모든 가치관과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진리가 그의 앞에 도래한 것입니다. 사울에게 이 3일은 굉장히 길고도 깊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였던 정경옥 교수가 1930년대에 쓴 <그는 이렇게 살았다>라는 책을 보면 당시 사울의 상황에 잇대어 볼 수 있는 글귀가 나옵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공부하던 것을 생각하여 본다. 내가 어려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부모나 선생님들이 훈계도 하시고 꾸지람도 하시고 심지어 종아리를 때리시기도 하여서 나는 마지못해서 글을 배웠었다. 그러다가 내가 차차 철이 들어서는 내가 앞으로 무슨 벌이라도 하여서 먹고 살 일을 생각하여 좀 더 성의를 가지고 공부를 하였다. 부모나 선생님이 하라고 하니까 억지로 배워서 얻은 글은 암통(暗通)의 지식이었다. 벌이를 하여서 먹고 살아 나갈 수단으로 배운 글은 도구의 지식이었다. 그러나 내가 삼십이 거의 다 되어 갈 때에 어느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야 비로소 나는 글맛을 알았었다. 진리 그것이 참으로 귀하게 보였고 진리 그것을 붙들려고 마음을 쏟아 보기도 하였다. 이렇게 몸을 던져서 모든 것을 잊고 진리를 친히 만나보려고 열중하였을 때에 얻은 지식은 나의 뼈가 되고 살이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친지(親知)의 지식이었다. 내가 이제 실제 사회에 나선 후로는 옛적 순진한 열성을 잃었다. 그러나 지금도 옛날 그 시대가 그립다. 밤이 지나가는 것을 모르고 밥 때를 잊어버리고 진리 그것만을 찾느라고 순정을 쏟던 그 시대가 언제나 다시 돌아오려는가? 나는 그 때를 동경하여 마지않는다.” 

 
(정경옥, <그는 이렇게 살았다>, 삼원서원)

 
정경옥 교수는 밤이 지나가는 것도 모르고, 밥 때도 잊으며 ‘진리’ 그것만을 찾으려 했던 그 때를 추억하고 있습니다. 아마 사울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예수를 만난 사울은 밤낮 사흘을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잊어가면서 자신의 확장을 이루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예수를 만난 이들의 변화는 반드시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비늘이 떨어져 나가고
 
이러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울에게 ‘아나니아’라는 인물이 다가옵니다. 환상 중에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에게 사울의 잃어버린 시력을 회복시켜 주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이 예수 믿는 자들에게 해를 끼치고,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를 잡아간다는 소문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다시 묻습니다. 하지만 예수의 대답은 단호하며 결의에 차 있었습니다. 이전 사울의 삶이 어떠했을 지라도 그는 예수가 택한 ‘그릇’(15절)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판단에 우선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하겠습니다.

 
드디어 아나니아를 만난 사울에게 직접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사울의 눈에서 ‘비늘’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고 시력을 회복(18절)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그는 세례를 받고 또 음식을 먹으며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다시 보게 된 사울
 
사울이 회심하게 된 사건은 사도행전에 세 번이나 나올 정도로 중요한 사건입니다(9:1-19; 22:3-21; 26:4-23). 그의 회심은 이방인 선교의 장을 본격적으로 여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회심 이후 사울은 다마스쿠스와 예루살렘에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사울 또한 유대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지만 그는 회심사건 이후, 3차 선교여행에 이르기까지 세계 곳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비늘’이 벗겨진 그의 눈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놓여있는 장벽을 허물고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이전과 전혀 다른 삶이 되었습니다. 


다시 보게 된다는 것

 
우리는 흔히 ‘예수를 만났다’, ‘신앙생활 한다.’라는 말을 듣곤 합니다. 과연 예수를 만났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신앙생활이란 그렇지 않은 삶과 어떻게 달라야 하는 것일까요? 영어성경(NIV)을 보면 사울의 눈에서 떨어져 나간 ‘비늘’을 scale(스켈)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를 찾아보면 ‘비늘’이라는 뜻 외에 ‘눈에 끼어 흐리게 하는 것’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마치 사울의 눈은 ‘눈에 끼어 흐리게 하는 비늘’로 덮여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보아야 할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욕망에 사로잡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만났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보여주는 것을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런 예수가 보여주는 일상의 점철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결국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읽은 새번역 성서에는 사울이 ‘시력을 회복하였다(18절)’라고 쓰여 있습니다. 하지만 개역개정을 보면 사울이 ‘다시 보게 된지라(18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만큼은 개역개정의 말씀이 더 가슴 깊숙이 다가옵니다. 단순히 시력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다시 보게 되는 눈을 가져야 합니다.

 
전에 보는 것을 넘어서
 
우리는 누구나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나 어딘가에 속해있습니다. 한 나라에 속해있고, 한 사회에 속해있으며, 한 가정에 속해있고, 한 학교, 한 교회, 한 회사 그리고 나 스스로 등 수많은 것들 속에 속해있는 구성원입니다. 우리는 어딘가에 속해있기에 그 너머를 볼 눈을 갖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안하며 외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내가 잘못 된 것은 아닐까 불안해하며, 나만 혼자된 것 같은 외로움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만난 이들, 예수를 주(主)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눈에 씌워진 비늘을 벗겨내야 합니다. 신앙인들은 이 눈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럼 ‘다시 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통하여 당연하게 여기던 일상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일상에 틈을 마련하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동유럽의 기적’이라 불리는 슬라보예 지젝의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이란 책을 보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곳 슬로베니아, 독일, 프랑스, 영국 등의 대학에서 교육과 관련하여 이루어지는 개혁을 보면 아주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대학이란 모름지기 국가나 기업 등과 관련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전문가를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것은 인간이 사유하는 능력과는 무관한 것들입니다. 진정한 사유란 무엇입니까? 사유라는 것의 일차적인 단계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진정한 문제 상황인가”, “이것이 문제를 드러내는 올바른 방법인가”,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결론에 도달했는가” 등의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사유한다는 것은 그 이상의 것들, 즉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슬라보예 지젝,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궁리, p.98-99)

 

신앙이란 모름지기 질문을 통해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또 성서가 던지는 질문에 답하며 우리의 삶을 가야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걷는 길을 매일 주님 앞에 비춰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를 만났던 사울이 다시 보게 된 것처럼, 예수를 만난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다시 보고 있는 지 스스로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그 눈을 갖기 위해서
 
모태로부터 시작된 저의 신앙생활은 어느 덧, 30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누군가 ‘30년 정도 믿음생활을 했으면 그 믿음이 대단하시겠네요?’ 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모호한 웃음으로 밖에 대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만난 주님을 요즘 새로 만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저의 신앙생활을 그래프로 그려본다면 20대 중반부터 크게 요동치게 그려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나의 편협한 생각의 틀이 확장되는 것이 꽤나 고통스럽고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비상소집을 하는 듯 저를 급히 부르시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힘든 여정이 되겠지만 피하고 싶진 않습니다. 그 길을 갈 때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함께 걸어가는 길
 
말씀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은 세상을 ‘다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비늘이 벗겨진 눈’으로 내 옆에 있는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다시 보게 된다는 것’은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마치 사울이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사흘을 지냈던 것처럼 성숙의 시간을 보내야만 합니다. 그 길이 힘들다하여 외면하지 말고 반드시 거쳐 가십시오. 아무쪼록 ‘다시 보게 된 그 눈’을 가지고 또 지금 내 옆에 있는 바로 그 친구의 손을 꼭 붙잡고 주님이 부르실 그 날까지 걸어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기도합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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