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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설교] 삶을 공부하다

20130324 청파교회 1부 예배 설교

 

삶을 공부하다

 
<본문: 이사야 50:4-9a>
 
4. 주 하나님께서 나를 학자처럼 말할 수 있게 하셔서, 지친 사람을 말로 격려할 수 있게 하신다. 아침마다 나를 깨우쳐 주신다. 내 귀를 깨우치시어 학자처럼 알아듣게 하신다.
5. 주 하나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셨으므로, 나는 주님께 거역하지도 않았고, 등을 돌리지도 않았다.
6. 나는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겼고, 내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겼다. 내게 침을 뱉고 나를 모욕하여도 내가 그것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7.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니, 그들이 나를 모욕하여도 마음 상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각오하고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 냈다. 내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겠다는 것을 내가 아는 까닭은,  
8. 나를 의롭다 하신 분이 가까이에 계시기 때문이다. 누가 감히 나와 다투겠는가! 함께 법정에 나서 보자. 나를 고소할 자가 누구냐? 나를 고발할 자가 있으면 하게 하여라.
9.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실 것이니, 그 누가 나에게 죄가 있다 하겠느냐? 그들이 모두 옷처럼 해어지고, 좀에게 먹힐 것이다. 

 


관계 맺는 다는 것


서로 관계를 맺어간다는 것은 참 흥미로운 일인 것 같습니다. 작년 여름, 8월 즈음이었나요. 1부 예배 설교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그 때, 이 자리에 섰을 때,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제 말은 눈에 들어올 만큼 훈남, 훈녀분들이 없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만큼 아는 분들이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특히 중고등부 학생들은 더욱 그러했습니다. 마치 불특정해 보이는 다수와 말씀을 나누는듯한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을 넘어 서로 알아가고 관계를 맺어 가다보니 흐릿했던 여러분들의 얼굴이 선명해 지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서로를 알아간다는 것, 관계를 맺어간다는 것은 단순하지만 참 놀라운 일인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며 어떤 말씀을 나눌까 고민하고 고민했습니다. 제 생각과 일상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매 순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재조명해 본다는 것. 이러한 작업은 보람과 후회, 감사와 원망과 같은 다양한 생각과 감정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이것이 곧 삶의 의미를 돌아보는 것, 삶을 공부하는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 속 이사야


사실 시간을 돌이켜보면 성경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 습득은 교회학교 시절에 많이 이루어졌던 것 같습니다. 성경학교 때 밥을 얻어먹기 위해 외웠던 성경구절들, 공과공부시간 선생님과 지겹도록 읽고 듣고 나눴던 말씀들이 기억에 많이 새겨져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중고등부 학생들을 위해 간단한 성경문제를 내보려합니다.

 
① 이사야는 구약에 있을까요, 신약에 있을까요?        구약
② 이사야 전과 후에 나오는 성경은 무엇일까요?        전) 아가 / 후) 예레미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이사야서의 이사야는 ‘예언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 예언자는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요? 예언자란 진리와 정의를 외치고자 군중 앞에 외롭게 서는 자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전해야 했던 사람이었지요. 예언자는 자기 사명을 억눌리고, 상처받고, 애통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이였습니다. 이사야도 그런 예언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학자의 입과 학자의 귀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은 소위 ‘종의 노래들’이라고도 불립니다. 그래서 ‘나’로 표현된 것은 이사야 예언자의 선포이기도 하지만, 종 된 이들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4절 말씀에서 하나님의 종은 자신의 입과 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4. 주 하나님께서 나를 학자처럼 말할 수 있게 하셔서, 지친 사람을 말로 격려할 수 있게 하신다. 아침마다 나를 깨우쳐 주신다. 내 귀를 깨우치시어 학자처럼 알아듣게 하신다. 5. 주 하나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셨으므로, 나는 주님께 거역하지도 않았고, 등을 돌리지도 않았다.’ 이사야가 만난 하나님은 자신이 하는 말과 듣는 말의 주인이었습니다. 자신이 학자처럼 말할 수 있게 하셨고, 학자처럼 듣게 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의 말은 지친 사람들, 지금으로 말하면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격려하게 하였고, 그의 귀를 깨우쳐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학자처럼 말하고, 학자처럼 듣는다.’에서 ‘학자’는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이 말은 히브리어로 ‘리무딤’이라고 하는데, 풀이해보면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럼 이사야가 학자처럼 말하고 듣는다는 것은 가르침을 받은 사람답게 말하고, 가르침을 받은 사람답게 듣는다는 말이겠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 우리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을 통하여 말을 해야 하고, 또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하늘의 가르침을 받고 또 받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말과 들어야 할 말은 무엇이어야겠습니까?
 
공부하는 인간


요즘 공부에 대한 연구가 다시 활발히 일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도 방송 중에 있지만, 최근 『공부하는 인간』 이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이 매주 목요일 밤 5회에 걸쳐 방송이 되고 있습니다. 아마 다음 주가 마지막 방송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얼핏 듣기에 이 프로그램을 기획한 분이 우리 교회를 다닌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습니다. 어쨌든) 본 프로그램 기획 의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현재의 인류는 세계 공통적으로 공부에 대한 열정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경제적, 문화적, 인종적 차이를 넘어 공부에 대한 보편적 열정은 어디에서부터 시작 되었는가! 질문을 던집니다. 인류는 왜 공부를 시작했는지, 공부를 하는 목적은 무엇인지, 다양한 문화권의 공부의 목적과 기원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한 의도였다고 합니다. 사실 저는 이 프로그램을 아직 보진 못하고 다운만 받아놓았습니다. 하지만 주위에서 들리는 얘기와 또 그 프로그램을 보고나서 올라온 후기들을 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만 있던 공부에 대한 시각이 굉장히 좁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공부, 대입만을 목표로 삼는 실체 없는 공부, 성공과 스펙만을 쌓기 위한 공부 등. 우리는 공부에 대한 인식이 너무 좁아왔습니다. 

 
신영복 선생과의 대화

 

얼마 전, 예전부터 마음속으로 흠모하고 있던, 성공회대학교 교수로 계신 신영복 선생님을 만나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평소부터 선생님의 글과 삶을 통해 깊은 감명을 받고 있던 터라 한번 뵙고 싶어 그 자리에 자원해서 갔습니다. 과연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실까 기대하며 그 강의에 참석했는데, 선생님이 준비하신 강의의 제목 또한 『공부란 무엇인가』였습니다. 그 순간, ‘요새 공부에 대한 연구가 대세긴 대세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의를 들으며 저는 머리를 끄덕거리거나, 그 말을 곱씹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공부(工夫)에 대한 한자어를 아시는지요? 장인 ‘공(工)’자에 아비 ‘부(夫)’자입니다. ‘공(工)’자를 머릿속에 떠올려보십시오. 알파벳 아이(I)와 비슷한 이 ‘공(工)’자는 도구 혹은 연장의 모양을 취하고 있습니다. 또한 ‘공(工)’자의 모양은 하늘과 땅을 이어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도구 혹은 연장은 하늘과 땅의 조화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또 ‘부(夫)’자는 남편 혹은 사내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두 한자어를 합쳐보면 공부(工夫)는 도구를 들고 있는 건강한 사내를 일컫게 됩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공부(工夫)란 쟁기를 들고 서 있는 사내, 즉 농사짓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농사짓는다고 하면서 앉아서 머리만 굴려서는 안 되겠지요. 공부(工夫)는 그런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과 매우 밀접한 것, 천지를 통합적으로 인식하는 것, 몸으로 실천하는 행위 자체가 공부(工夫)의 진정한 의미인 것입니다.
 
이러한 공부(工夫)에 대한 글자해석은 선생님의 강의 서두에 들었던 내용입니다. 기존에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을 전복해서 사고하는 것.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방식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명, 평화, 정의 들음 / 따스한, 바로잡는 말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우리는 이사야를 통해 표현되어진 종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학자처럼 말하고, 학자처럼 귀를 열어주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인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말과 들어야 할 말은 무엇이어야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 마음에 심어주신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회복하는 것, 평화 없음에 대해 가슴 아파 하는 것, 정의롭지 못한 세상을 바라보며 나의 삶을 바꿔가는 것.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바로 옆에 있는 이들의 삶, 바로 옆에 있는 친구들의 삶, 처음부터 출발점이 달랐던 이들의 삶, 삶이 한 순간에 무너져 의지할 곳 없는 이들의 삶. 그리고 자연! 이러한 이들의 아픔에, 고통에 우리는 귀 기울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 그들 곁에 다가가 건 낼 따스한 말 한마디! 가르침을 받은 사람답게 그 말들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말이지 않겠습니까? 더불어 우리는 정의롭지 못한 세상을 바로 잡을 말 한마디도 필요합니다. 모두가 ‘예!’ 하는 세상 속에서 ‘아니오!’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마치 이사야의 순종이 평안을 나타내지 않는 것(사50:6-9)처럼 말입니다. 그렇다고 겁먹지 마십시오. 이사야의 고백처럼 지금 하나님께서는 ‘나’를 도우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요16:33)’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공부벌레 예수님


그러고 보면 예수님은 정말 공부벌레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이라는 쟁기를 들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 몸으로 세상의 아픈 모든 것들을 품었습니다. 기도하며 아픈 것들을 품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 늘 간구하셨습니다. 공부의 ‘공(工)’자가 하늘과 땅의 조화를 나타내는 것처럼 우리는 세계에 대한 인식을 올바로 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불편한 진실을 직면하는 것이 공부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사셨던 예루살렘을 넘어, 로마제국의 지배아래 있는 세상의 불편한 진실과 직면하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머물지 않고,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까지 하면서 하늘의 뜻을 이 땅위에 펼치기 위해 사셨습니다. 그는 삶을 공부하셨습니다. 아니, 그 분의 삶 자체가 공부였습니다.

 
나와 함께 공부하자!


지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열심히 공부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나와 함께 공부하자고 문 밖에서 두드리고 계십니다. 진정한 공부의 시작은 세상과 사람에 대한 올바른 인식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우리에게 더 큰 공부의 시작은 바로 하나님을 올바로 인식하는 것부터입니다.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것이 잘못 됐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와 더불어 우리에게 더 큰 공부의 여정이 남아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부는 평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께 올바른 공부법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내 입과, 눈과 귀를 깨우쳐달라고 말입니다.

 
사순절 학기 기말고사


오늘 우리는 사순절 여정 중 마지막, 고난주간에 들어섰습니다. 어쩌면 오늘부터 시작되는 일주일은 우리에게 사순절 학기의 마무리 기말고사 기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기간 하나님을 통해 입을 열고, 그 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길 바랍니다. 한 주간 공부다운 공부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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