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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1부] 고난이 없었더라면

20130623 청파교회 1부 예배 설교 

 

고난이 없었더라면 

 

<창세기 2115~19절> 

 

15. 가죽부대에 담아 온 물이 다 떨어지니, 하갈은 아이를 덤불 아래에 뉘어 놓고서

16. "아이가 죽어 가는 꼴을 차마 볼 수가 없구나!" 하면서, 화살 한 바탕 거리만큼 떨어져서, 주저앉았다. 그 여인은 아이쪽을 바라보고 앉아서, 소리를 내어 울었다.

17. 하나님이 그 아이가 우는 소리를 들으셨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천사가 하갈을 부르며 말하였다. "하갈아, 어찌 된 일이냐? 무서워하지 말아라. 아이가 저기에 누워서 우는 저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다.

18. 아이를 안아 일으키고, 달래어라. 내가 저 아이에게서 큰 민족이 나오게 하겠다."

19.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니, 하갈이 샘을 발견하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담아다가 아이에게 먹였다.

 

[Lumix gx9 / 20mm]

하나님과의 접속 

 

우리는 살아가다보면 다양한 경험을 통해 하나님과 만납니다. 여러분들은 일상에서 어떻게 하나님과 만나고 계십니까? 혹시 하나님과 만나는 특별한 공간이나 구별된 시간이 있으십니까? 아니면 특별한 순간, 상황들을 통하여 하나님과 접속하고 계십니까?

 

몇 해 전, 저는 조금 흥미로운 경험을 했었습니다. 마치 전혀 아닐 것 같은 순간으로부터 하나님이 출현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전에 사역하던 교회에서의 일이었습니다. 토요일 저녁, 주일 준비로 한창 분주해 있었습니다. 저는 그 때 제발, 바쁘니 아무도 나를 터치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라는 심정이었습니다. 

 

근데 참 하늘도 무심하시지, 꼭 그 때! 굳이 그 때! 사무실로 손님이 찾아옵니다. 선한 웃음으로 저에게 다가온 그 분은 저희 부서 선생님이셨습니다. 사실 정신없이 바쁘기도 했고, 나름 가깝게 지내던 선생님이셔서 낯선 방문에 성의 없이 대했던 건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순간 내가 대체 뭐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습니다. 맡겨진 일의 경중(輕重)을 따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적어도 하나님의 일에 사람보다 중요한 게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던 일을 멈추고 그 분의 낯선 초대에 응답했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그 분이 가고 나서도 여전히 해야 할 일은 밀려있었지만, 아직도 그 때의 깨달음이 선명합니다. 뭔가 신비로운 이야기를 할 거라 생각하신 분들도 계셨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신비로운 경험보다는 매우 일상적이고 평범한 삶을 통해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평범하면서도 낯설게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의 감정과 무관한 하나님

 

그럼 여기에 앉아계시는 선생님들과 중고등부 학생들, 1부 예배를 드리는 분들은 언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끼십니까? 어느 순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강렬하게 느끼십니까? 사실 하나님을 느낀다는 건 내 감정의 좋고 나쁨과는 무관합니다. 감정에 휩싸인 사람이 어떤 상황과 문제를 객관적으로 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땅의 기초를 놓고’(38:4)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놓고’(10:30) 계신 분은 우리 감정에 따라 요동치는 분은 아닙니다. 물론 이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감정 따위를 전혀 개의치 않으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품어 안아주시지만, 다만 우리가 좋고 나쁨의 감정 상태로 하나님을 보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고 가슴 아픈 일은 우리가 기쁘고 즐거울 때보다, 상황이 어려울 때 더 하나님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충만함에 있을 때보다 근원적인 상실이 닥쳐왔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더 찾게 됩니다. 인정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사실이 그러합니다. 

 

아픔을 통해 하나님 만나기 

 

개인적인 경험을 객관화 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주로 하나님을 느끼는 순간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먼저 주위의 고난을 보았을 때 그러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다보면 세상이 아파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정의와 평화가 없는 세상을 바라보며 가슴이 무너질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또 한 번 무너집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자비와 도움을 구하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침묵 속에 원망할 때도 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세상의 상실을 통해 불현 듯 우리에게 존재감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또 우리는 언제 하나님을 느낍니까? ‘자신이 고난을 당했을 때입니다. 하루하루 평범하게 살아가다가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불현 듯 닥친 삶의 위기들이 있습니다. 우리 중고등부 친구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인생이 펼쳐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스스로 삶을 계획해 나가지만, 수많은 실패와 좌절들 겪게 됩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지만, 준비되지 못한 삶에 갑자기 닥친 실패는 실패는 좌절의 어머니, 상실의 어머니가 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쁘고 즐거울 때 하나님을 찾기도 합니다. 시험을 잘 봤을 때, 대학에 합격했을 때, 직장에 취직을 했을 때, 아이를 출산했을 때, 또는 시합에서 승리를 거뒀을 때 등등 기쁨의 순간에 신앙인들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찾기도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러한 성취 뒤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은 어려움이 있던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엄청난 수고와 노력, 희생 등 고통스럽기까지 한 순간들을 지나온 후에야 얻을 수 있는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순수한 기쁨과 즐거움은 있을 수 있을까, 어떠한 요구와 기대 없이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판단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돌아봤을 때, 우리는 고난 중에 하나님과의 접속 빈도가 훨씬 높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의 하나님 

 

오늘 함께 살펴본 창세기 말씀에는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등장합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듯이 하갈은 애굽사람으로 아브라함의 종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처인 사라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하갈을 첩으로 삼게 됩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 (아브라함&하갈)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하지만 이스마엘이 후에 사라가 낳은 아들 이삭을 조롱하므로 사라가 하갈과 이스마엘 두 모자를 내쫓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두 모자의 축출을 본인은 원치 않았기에 아브라함은 걱정되는 마음에 먹거리와 마실 물을 챙겨 보냅니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가져온 먹거리와 마실 물은 모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곳엔 울음소리만 가득했습니다. ‘살 희망조차 사라져 지쳐 쓰러진 자식을 그저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는 어머니의 피맺힌 울음소리, 어디에서도 위로의 눈길이나 손길을 찾을 수 없어 더욱 처연한 그 울음소리, 그리고 엄마의 울음에 전염되어 슬피 우는 이스마엘의 울음소리.’ (김기석, <삶이 메시지다>, 포이에마, p.42) 이 소리만이 브엘세바 빈들에 가득했습니다. 더 이상 어떤 희망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가운데 이어지는 창세기 저자의 한 문장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이의 우는 소리를 들으셨다(21:17).’ 이 한마디보다 더 위로가 되는 말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들으셨다고 합니다. 후에,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하갈을 위로하고 아이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하갈의 눈이 밝아 샘을 발견하고 아이를 다시 먹이게 됩니다. 하갈에게 닥친 고난은 하나님의 한 마디 말과 접속되면서 새 힘을 얻게 됩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 만나기 

 

성경 속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하나님은 위기와 고난 가운데 자주 등장하십니다. 하나님은 고난과 역경을 통하여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성경 속 인물들은 삶의 상실을 통해 하나님을 찾습니다. 사람은 아무래도 기쁘고 즐거울 때보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 하나님을 더 찾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보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삶의 희망이 모두 사라진 그 때에 하나님은 큰 은총으로 다가옵니다. 어쩌면 우리의 자아가 벼랑 끝에 서 있을 때라야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대는 그 한 사람을 가졌습니까? 

 

그렇다면 주위에 고난을 당한 이들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고난이 닥쳤을 때 이를 이겨내기 위해 큰 해결책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나를 온전히 받아들여주는 한 사람이 있으면 우리는 어떠한 위기도 견뎌낼 수 있습니다. 물론 주체적으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필요도 있지만, 나무들이 서로 기대어 자라듯이 사람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정을 동반한 진정한 관계나 공동체가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됩니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아주 흥미로운 기사를 접했습니다. 아이폰을 사용하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아이폰 음성 인식 기능인 시리(Siri)가 있습니다. 시리를 실행하고 음성으로 질문을 하면 그에 맞는 적절한 답변을 해줍니다. 벌써 많은 국가의 언어를 인식할 수 있게 개발해 놓았지만, 사용자의 질문에 적절한 답변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시리가 가야할 길이 멀어 보입니다.

 

그 기사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시리에게 살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터놓는다면 어떤 대답을 할까? 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기사였습니다. (<지디넷코리아>, 이재운 기자, 2013.06.20) 이용자가 "다리에서 뛰어내리려 한다(I'm going to jump off a bridge)"고 말하자 시리는 "만약 자살할 생각이라면, 일단 국립 자살예방전화에 전화해서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고 대답한다고 합니다. 이어 해당 전화번호를 안내하며 "당신을 위해 전화를 걸까요(Shall I call for you?)"라며 전화 상담을 권한다고 합니다. 

 

시리가 많이 발전하며 친절해지긴 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좀 전의 같은 질문을 하면 '근처에 있는 가까운 다리를 안내해주겠다'며 뛰어내릴 수 있는 다리 목록을 보여줬다고 합니다. "나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I don't want to live anymore)"라는 말에 대해선 "그래, 그러자(OK, then)"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참 재밌는 기사였지만, 뭔가 씁쓸한 마음은 지울 수 없었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쳐도 내 마음하나 시원하게 터놓고 이야기 할 단 한사람이 없는 건 아닌지 우려가 됐습니다. 오죽하면 휴대전화에 힘든 마음을 털어놓고 있으니 말입니다. 

 

고난이 없었더라면 

 

말씀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을 정하며 두 가지 생각이 교차했습니다. 하나는 고난이 없었더라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과 다른 하나는 고난이 없었더라면 하나님과 깊이 만날 수 없었을 텐데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같은 제목 뒤에 어떤 문장을 붙이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전혀 달라졌습니다.

 

1부 예배에 참석하신 분들과 중고등부 학생들은 오늘의 말씀 제목 뒤에 어떤 말을 이어 붙이시겠습니까? 고난은 피할 수 없지만, 고난에 대처하는 우리의 삶의 자세는 바꿀 수 있습니다. 늘 그러했지만 오늘 말씀준비도 제 삶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제게 닥친 어려움이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과정임을 생각하며 감사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크고 작은 삶의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지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

안녕하세요.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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