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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1부] 가난한 사랑

20130526 청파교회 1부 예배 설교

 

 가난한 사랑

 

<마가복음 8장 34-38절>

 

34.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무리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37. 사람이 제 목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겠느냐?
38. 음란하고 죄가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인자도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Lumix gx9 / 20mm]

사랑하고 계십니까?

 

 주일아침, 조금은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며 말씀을 시작하려합니다. 

 

여러분, 지금 사랑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지금 사랑 진행 중 입니까? 이 질문을 들었을 때, 각자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사람들이 계신지요? 짧지 않은 세월을 함께 하고 있는 ‘가족’이 떠오를 수도 있고, 남자친구 혹은 여자 친구와 같이 ‘애인’이 떠오를 수도 있고, 우리 중고등부 학생들에게는 아이돌 ‘가수’나 ‘영화배우’ 혹은 이 앞에 나와 있는 ‘전도사님’이 떠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랑에 대한 다양한 정의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을 어떤 말로 다시 바꿔 말할 수 있을까요? 매우 구체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파고 들어가면 갈수록 추상적인 단어가 되는 ‘사랑’이란 말은 어떤 말로 바꿀 수 있을까요? 사랑이라는 말에 가까이 다가가고자 노력했던 사람들의 무리가 있습니다. 그 무리들 중 하나가 바로 ‘시인’들입니다. 시인들은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비유와 묘사를 발견하고 또 적용했습니다. 사랑 혹은 사랑하는 사람을 표현하는 시적 표현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꽃, 나비, 산, 햇살, 하늘, 나무와 같은 말들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제가 말씀드린 자연세계 외에도 사랑을 대체한 이보다 더 심오한 비유와 묘사들이 있을 겁니다.

 

그럼 성경말씀 속에서 ‘사랑’을 표현한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기독교에 있어서 하나님의 가장 근본적인 속성은 ‘사랑’입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에 대한 비유는 시편에 많이 등장하지요. 반석, 요새, 피할 바위, 방패, 구원의 뿔, 산성, 목자 등 (시18편2절, 23절) 하나님은 다양한 모습으로 비유되어 나타납니다.

 

더불어 신약 성경에는 ‘사랑’의 중요함에 대한 구절들이 많이 나옵니다. 

 

① 마태복음 22장36절 이후 말씀을 보면 율법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② 또 로마서 13장10절 말씀을 보면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하고 있고, ③ 요한복음 13장34절에서도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④ 그리고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성경구절 중 하나인 고린도전서 13장13절을 보면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사랑’에 관한 성경말씀 중 최고의 사랑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에 담긴 ‘십자가 사랑’입니다. 자기 부정과 자기희생의 최고 결정체인 ‘십자가 사랑’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가장 소중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도록 강제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명’ 자체를 내어준 예수의 십자가 사랑은 가장 큰 사랑인 것입니다. 예수의 사랑이 모든 사랑의 극점(시몬 베유)인 것입니다.

 

여자 친구는 하나님과 같았다

 

제게 가까운 벗이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청파교회를 다녔습니다. 어느 새, 과거형이 되어버렸네요. 그리고 그 친구는 교회학교 교사였습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분이 계신가요? 바로 지난 주 입대를 한 하진채 선생님입니다. 작년 성탄절 전날 저녁, 제가 몸담고 있는 사무실에서 청파교회 청년들의 작은 모임이 있었습니다. 옛 가족은 떠나왔지만, 아직 새 가족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젊은 청년들의 모임에서는 늘 ‘사랑’ 이야기가 모임의 중심이 됩니다. 그 날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다양한 이들의 사랑 이야기를 듣던 중 하진채군의 한 마디 말이 잊혀 지지가 않았습니다. ‘헤어진 전 여자 친구는 본인에게 어떤 존재와 같았는가.’라는 질문을 따로 하지도 않았는데 본인 스스로 말하기를 ‘하나님’과 같은 존재였다라고 말하더군요. 본인 스스로 조금은 불경스러워 보일 수 있을까봐 조심스러워 했지만, 저는 그 말만큼 사랑에 대한 솔직하고 정확한 표현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에 빠진 당신

 

여러분, 사랑에 빠진 혹은 사랑에 빠졌던 자신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어떻습니까? 그 사람이 보고 싶고,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행복합니다. 그 사람이 특별히 자신에게 무엇을 해주어서 그 사람이 보고 싶고 함께 있으면 행복한 것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있음 자체로, 존재자체로 나에게 기쁨이고 설렘인 것입니다. 아직 이런 경험이 없는 중고등부 친구들도 있을 겁니다. 제 학창시절 고호경이라는 가수의 노래 중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처음이었어요. 나에겐. 친구보다 보고 싶고, 엄마보다 사랑한건 처음이었어요.’ 아직 사랑을 모른다고 너무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랑은 불현 듯 찾아와 내 온 몸과 마음을 마비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라는 외로움

 

하지만 사랑에 빠진 사람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시’에 담긴 사랑의 철학적 의미를 발견하려 했던 강신주씨는 사랑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 우리는 상대방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놀라운 사실과 직면하게 됩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치명적인 고독(fatal solitude)’에 빠집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고독이 치명적인 이유는 그것이 자신의 힘으로 결코 치유될 수 없는 성질의 고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직 자신을 사랑에 빠지도록 만든 그 사람만이 그 고독을 치유할 수 있는 법입니다. 음악도, 카페도, 커피도, 심지어 영화도 치명적 고독을 완화시켜 주기는커녕 오히려 가중시킬 뿐입니다. 그 사람이 없는 즐거움은 즐거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사람이 내 곁에 없다는 느낌만을 부각시켜 줍니다. 

(강신주,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동녘, p.110)

 

사랑이 타자를 신으로 만든다.

 

제가 조금 전, 하진채 선생님의 이야기를 예로 들었습니다만, 재미는 사실은 작가며 철학가인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도 『사랑의 단상』이라는 책에서 이와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알 수 없는 대상 때문에 자신을 소모하고 동분서주하는 것은 순전히 종교적인 행위이다. 그 사람을 하나의 해결할 수 없는 수수께끼로 만든다는 것, 곧 그를 신으로 받드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랑하면 할수록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사랑의 행위를 통해 내게 체득하게 되는 지혜는, 그 사람은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글쎄요. 하진채 선생님께서 여기까지 생각해서 했던 말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우리가 하나님을 느끼는 방식, 감각과 비슷하게 경험하게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자녀를 둔 부모님들께서는 사랑에 빠진 자녀들을 보며 너무 나무라지 마셨으면 합니다. 저희 어머님께서 수능을 앞두고 짝사랑에 빠진 저를 몹시 혼내시긴 했지만, 어쩌면 사랑에 빠진 자녀들이 하나님을 잘 느끼기 위한 예행연습을 하는 중인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몸의 실천적 행위, 예수의 십자가

 

하지만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마음의 문제만은 아닐 것입니다. 사랑은 몸으로, 즉 실천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차가운 바람이 부는 어느 겨울날 사랑하는 사람이 추위에 떨고 있으면, 우리는 주저 없이 자신의 겉옷을 벗어 입혀주고 매서운 추위를 스스로 감당합니다.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가장 소중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도록 강제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가난해지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생명’일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최고의 단계는 ‘생명’을 아낌없이 주는 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단계에 직접 오르신 분이 계시지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가복음 8장 후반부는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가운데 활동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과 다시 살아나실 것을 세 번에 걸쳐 이야기합니다. 그 중 오늘 본 8장31절 이후의 말씀은 그 첫 번째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무리들을 불러놓고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이야기 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기 전, 빌립보 가이사랴 마을로 가던 도중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라고 하는지에 대해 먼저 묻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세례자 요한이라 하기도 하고, 엘리야라 하기도 하고, 또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보다 더 중요한 이들의 고백을 알고 싶어 했습니다. 자신과 함께 길을 걷기로 작정했던 제자들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에 베드로가 대표해서 말합니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비밀로 하되, 아무에게도 입 밖에 내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가만히 대답을 듣던 예수님께서는 왜 일반 무리들의 고백보다 제자들의 고백에 민감하게 반응하셨을까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시인하는 것은 당시 로마의 권세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었기에 그러했고, 또 이러한 고백을 한 이들이 자신과 아주 가까이 있는 이들의 고백이었기 때문에 그러했습니다. 로마와 유대사회에 대한 부정은 곧 그들이 살아갈 평범한 삶에 대한 부정이었고, 또 자신들의 목숨과도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고백에 예수님께서 아주 간추린 말로 이야기 하십니다. 그러나 간추려진 이 말속에 예수님의 존재, 삶 전체가 담겨 있었습니다.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제자들의 말로 된 고백은 제자들의 삶의 고백으로 이어져야 했습니다.

 

예수를 따르기로 한 이들의 삶은 세상이 가르치는 삶과 달라야 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이는 무슨 말입니까?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비워내라는 말씀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무슨 말입니까? 지금 말로 풀어본다면, 반복되는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열매를 맺기 위해 썩어질 준비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고, 복음을 위해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무슨 말입니까?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전사들에게 하는 말과도 같아 보입니다. 이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 제자들 앞에 펼쳐질 ‘험난한 삶’에 대한 위로와 용기의 말이기도 하고, 또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기 자신을 버렸던 이의 부활고백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십자가 사랑’을 더욱 뚜렷하게 상기시켜줍니다.

 

가난한 사랑, 우리의 사랑

 

말씀을 마무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잘 와 닿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사랑하는 이를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누군가를 사랑함으로써 자신의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다면, 거기서부터 예수님의 사랑을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가장 좋은 것이 돈이 되어버린 이 시대 속에서,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한 여러분들은 가장 소중한 ‘생명’을 내어주신 ‘십자가 사랑’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로인해 내가 가난한 사랑을 하더라도 그 가난함은 결코 초라한 가난함은 아닐 것입니다. 봄날을 맞은 따스한 성령강림절, 마음껏 사랑을 나누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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