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임 Note] 마음 아파하시는 주님

2015. 11. 15. 12:03Note

20151115 쓰임교회 주일설교
 
마음 아파하시는 주님
 
<요엘 2장 21-27절>

 

21. 땅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주님께서 큰 일을 하셨다. 22.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 광야에 풀이 무성할 것이다. 나무마다 열매를 맺고,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도 저마다 열매를 맺을 것이다. 23. 시온에 사는 사람들아, 주 너희의 하나님과 더불어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주님께서 너희를 변호하여 가을비를 내리셨다. 비를 흡족하게 내려주셨으니, 옛날처럼 가을비와 봄비를 내려 주셨다. 24. 이제 타작 마당에는 곡식이 가득 쌓이고,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을 짜는 틀마다 포도주와 기름이 넘칠 것이다. 25. "메뚜기와 누리가 썰어 먹고 황충과 풀무치가 삼켜 버린 그 여러 해의 손해를, 내가 너희에게 보상해 주겠다. 그 엄청난 메뚜기 군대를 너희에게 보내어 공격하게 한 것은 바로 나다. 26. 이제 너희가 마음껏 먹고, 배부를 것이다.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한 주 너희의 하나님의 이름을 너희가 찬양할 것이다. 나의 백성이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27. 이스라엘아, 이제 너희는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너희 가운데 있다는 것과,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라는 것과, 나 말고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의 백성이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아파할 줄 모르는 세상
 
쓰임교회 오신 여러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어제 서울광장과 광화문 일대에서 있었던 대규모 집회를 생각하자니 이 아침, 반갑게 인사할 수만은 없는 것 같습니다. ‘민중총궐기대회’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이 집회 참가자는 약 10만여 명으로 추산됐습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반대 집회 이후 7년여 만에 최대 규모로 진행된 집회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들은 정부가 추진하는 노동개혁과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반대하며 청년실업, 쌀값 폭락, 빈민 문제 등의 해결책 마련을 요구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런데 SNS와 여기저기서 올라오는 기사를 보고 있자니, 저는 지금 이 시대가 퇴행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시민이 주인이라는 민주 공화국의 이름이 무색할 만큼 이 나라는 국민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거대한 힘으로 억누르려 합니다. 청와대로 향하려는 집회 참가자들을 향해 경찰들은 무자비하게 물대포를 발사했습니다. 그러다 69세 노인 한 분은 물대포에 맞아 결국 쓰러지셨고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위급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물론 어느 한쪽만 잘했고 어느 한쪽만 잘못했다 이야기 하는 건 아닙니다. 싸움이라는 것도 비슷한 힘과 서로가 싸우고자 하는 의지가 있을 때 성립하는 것이지, 강력한 물대포와 맨손이 어찌 정당한 대립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약자들이 왜 모이는지 들으려하지 않는 기득권, 그저 모니터 앞에서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는 정치인들, 손에 총과 칼 한 자루 없는 맨몸을 향해 무자비하게 물대포를 쏘는 경찰들. 우리는 자꾸만 공감의 마음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째서 이렇게 서로의 ‘아픔’에 대해 잊게 된 것일까요? 왜 우리는 누군가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고 공감하지 못하는 되는 것일까요? 어제 하루의 일을 지켜보자니 화가 나고 가슴이 아픕니다. 

 

서론의 이야기가 너무 정치적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바로 어제 저녁에 일어난 일이라 어제의 일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조금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오늘 본문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요엘을 통한 이스라엘의 부활
 
오늘 본문은 <요엘>입니다. 요엘이 포함된 구약의 예언서는 역사의 비극을 통해 하나님이 무엇을 의도하시는지 생생하게 증언합니다. 이사야에서부터 말라기까지 포함된 예언서는 주전 721년 앗시리아의 위협에서 '이스라엘의 죽음'을 읽은 예언자들과 주전 587년 바빌로니아의 위협에서 '유다의 죽음'을 확인하는 예언자들, 마지막으로 주전 528년을 전후한 시대를 배경으로 '이스라엘의 부활'을 선포하는 예언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왕대일,『구약성서 이해 열마당』, p211)

 

 그 가운데 요엘은 지상 최후의 날에 대한 다짐을 합니다. 주께서 심판하시는 날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 주실 것을 이야기 합니다. (위의 책, p218) 그래서 오늘 본문을 읽다보면 희망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주께서 황폐해진 광야에 풀이 무성하고, 나무마다 열매를 맺고,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도 저마다 열매를 맺게 해 주실 것(22)이라고 요엘은 말합니다. 
 
그리고 비를 흡족히 내려 타작마당에 곡식이 가득하고 포도주와 기름이 넘칠 것(23-24)이라 이야기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주께서 너희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그들과 함께 할 것(27)임을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의 부활이 이제 시작된 것입니다. 
 
물론 ‘죽음’을 맞이했던 이스라엘이 ‘부활’을 기대하게 된 건 하나님 스스로가 마음을 돌이켜서 그런 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살기 위해서는 예언자들의 말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호 6:3)는 것과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암 5:4, 6)는 것과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욜 2:13)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워야 합니다(미 6:8). (위의 책, p217) 다시 말해 이스라엘 백성은 변화되어야 다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요엘로 돌아오겠습니다. 요엘은 이스라엘에 희망을 전합니다. 다시 희망을 꿈꾸게 합니다. 하지만 이런 예언자의 말은, 즉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마음의 배경은 백성들을 향한 ‘아파하심’입니다. 바로 앞 단락 1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땅이 당한 일로 인해 마음 아파하시고, 당신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셨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입니다. 사람의 일 때문에 가슴 아파하시는 분입니다.
 
다양한 하나님의 이미지

 

여러분, 우리가 갖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는 다양합니다. 특히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던 분들은 어떤 교육을 받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이미지가 제한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본 하나님은 아파하는 이들을 보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런 하나님입니다. 소박한 시골에 살면서 손자와 손녀가 우는 것을 보고 어떻게든 타이르려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은 느낌의 하나님입니다. 
 
당신의 백성들의 웃음과 울음소리에 귀 기울이시고 마음이 약해 벌하시려는 마음을 돌이키는 그런 분입니다. 줏대 없는 하나님을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불의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꾸짖으시지만 돌이키고자 하는 자에게는 한 없이 자비하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아파하시는 하나님

 

여러분,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을 보면 하나님은 ‘나 말고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27)’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살다보면 자연스레 독선적이고 독단적인 것에 대해 거부반응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이 유일하다고 하는 개념이 어떤 이들에게는 신앙을 지키는 강력한 무기가 되지만, 또 어떤 이들에게는 반감의 마음을 갖게 하는 개념일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유일한 신이라고 믿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과학적인 근거로 신의 존재 유무를 파악하거나 또 세상에 어떤 신들이 있는지 모두 조사하여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또 여러분이 하나님을 유일한 신이라고 믿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많이 닮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기뻐할 줄도 알고 슬퍼할 줄도 알며 아파할 줄도 알고 화를 낼 줄도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감정을 갖고 계신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사람들 곁에 다가오고 싶으셨는지 자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 사람들과 함께 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 이러한 성향을 지닌 신은 하나님이 유일하다고 믿습니다. 유별나거나 특별한 것을 바라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참 사람됨’을 회복하기를 바라는 분, 지극히 평범하면서고 따뜻하고 정의롭기에 저는 그 분을 유일한 신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특히 사람들의 삶에 관여하며 많이 아파하시는 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도 그러했고 이방인들을 향해도 그러했으며 지금을 살아가는 이들을 보면서도 많이 아파하십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어제와 같이 광화문 광장에서 정당한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다 힘의 논리를 넘어서지 못하는 이들을 보며 가슴 아파하시고, 맹목적 신념으로 파리에서 폭탄테러를 저지른 자들을 보며 통곡하시고, 또 그로인해 무고하게 죽음을 맞이한 이들을 보며 한없는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파하시는 분이시지만 그 아픔을 지켜만 보고 계시진 않으십니다. 아픔을 없애기 위해, 아픔을 치료하기 위해 함께 일할 사람을 찾으십니다. 어려운 걸 요구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주위를 둘러보며 설 자리를 잃은 자들이 있다면 그들의 설 땅이 되어주고 외로움과 고독 속에 살아가는 이들 곁에 머물고 나의 물질을 나누는 것. 그런 것들을, 그 작고 사소한 일부터 시작하기를 바라십니다. 

 

간절한 염원을 담은 기도는 상황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더불어 그 상황을 바라보는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도 기도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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