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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사람의 마음을 보다

20151108 쓰임교회 주일설교

 

사람의 마음을 보다

 

<마가복음 12장 38-44절>

 

38. 예수께서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39.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

40.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41. 예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아서,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을 넣는가를 보고 계셨다. 많이 넣는 부자가 여럿 있었다.

42.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은 와서, 렙돈 두 닢 곧 한 고드란트를 넣었다.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곁에 불러 놓고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헌금함에 돈을 넣은 사람들 가운데, 이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44. 모두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떼어 넣었지만, 이 과부는 가난한 가운데서 가진 것 모두 곧 자기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Lumix gx9 / 14mm]

가을비 소식이 생기를 가져다주길

 

오늘 쓰임교회 오신 여러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반갑습니다. 

 

금요일 밤부터 내리던 비가 오늘까지 오고 있습니다. 비 소식이 월요일까지 있는데, 이번 가을비로 가물었던 땅이 생기를 되찾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논과 밭을 터전으로 삼고 있는 농부들의 마음까지 활기를 찾았으면 참 좋겠습니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의 소중함을 잊지 말았으면 하는 요즘입니다. 

 

예수와 율법학자의 간격

 

오늘 말씀은 마가복음입니다. 마가복음 12장은 율법학자들의 질문과 예수의 응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28절을 보면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율법학자들은 진리를 알고자 하거나 참 도(道)를 깨우치고자 예수께 묻는 것이 아니라 ‘대답을 잘하는’ 예수를 골탕 먹이기 위함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율법학자와 같이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이들에게 근본 없는, 아니 근본 없어 보이는 예수의 자신감은 늘 눈의 가시였습니다.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합니다. 이 사회는 여전히 학연, 지연, 혈연을 중심에 두고 사람을 대합니다. 뿌리나 근본이 없어 보이는 이들의 등장은 늘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합니다. 사회에서 이러한 것들을 바로 잡는 것이 여러 가지가 얽혀 있어 어려움이 많다면, 그 시작을 교회에서부터 해 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세상과 다른 가치관이 존재하는 곳, 그곳이 교회이고 그것이 교회의 존재목적이라 생각합니다. 

 

따라서는 안 될, 율법학자들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 본다면, 오늘 본문에서 예수는 회중 들 앞에서 율법학자들을 대놓고 비판하기 시작합니다.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을 이렇게 묘사하십니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잔치에서는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한 집안의 재산)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38-40).” 

 

예수의 말을 요약해 보면, 율법학자는 한 마디로 절대 따라서는 안 될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드러내 보이기 위해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했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다니며 인사받기를 좋아했으며, 예배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했고, 대부분의 모임에서는 섬김을 받는 자리에 앉기를 좋아했습니다. 이 부분을 읽는데 자꾸 지금의 ‘정치인들’이 떠오르는 건 너무 예민한 상상일까요? 사실 이보다 더 큰 위기는 교회 안의 목회자나 성도들도 이런 모습을 많이 닮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화 <사도>를 보고

 

몇 일전, 영화 <사도>를 보았습니다. 이미 보신 분들도 계실 텐데요, 영화는 정조와 그의 아들 사도세자에 관한 슬픈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영화라는 것이 해석이 다양해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저에게 있어 가장 가슴 아팠던 부분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기대와 기대에 부응하려고 노력하다 좌절하고 마는 아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부딪치는 장면이 여럿 있었지만, 그 가운데 몇 번 반복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예법’을 사람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아버지를 향해 아들 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있고 예법이 있는 것이지, 어떻게 예법이 있고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까?” 하지만 결국 예법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는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사람보다 우선 됐던 율법과 예법

 

며칠 전 이 영화를 봐서 그런지 몰라도 오늘 본문의 율법학자들의 태도가 더 사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율법이 세워질 때는 분명 ‘사람’이 우선 됐을 겁니다. 사람을 중심에 두고 하나님의 사랑을 그려갔을 겁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사람의 욕망이 하나님의 사랑을 넘어서게 되면서 율법의 본질이 퇴색됐던 것입니다. 

 

영화에서도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예법이 세워질 때 사람의 존엄성이 매우 중요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도라는 것에 얽매이다 보니 사람은 사라지고 법만 남았던 것입니다. 확실히 주객이 전도되어 버렸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헌금한 렙돈 두 닢(한 고드란트)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율법학자들에 대해 말씀을 하신 후에, 그는 헌금함 맞은쪽에 앉아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을 넣는가를 보고 계셨습니다. 예수께서 지켜보는 가운데 돈을 많이 넣는 부자가 여럿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돈 두 닢, 한 고드란트를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이 화폐의 단위가 어느 정도인지 잘 감이 안 오는데요. ‘지금의 800원에서 천 원이다’라고 하는 이들도 있고 ‘만원’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렙돈’은 그리스의 최소 동전 단위였고, ‘고드란트’는 로마의 최소 청동화였다고 합니다. 현재로 환산된 금액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매우 적은 금액인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번에는 제자들을 불러놓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헌금함에 돈을 넣은 사람들 가운데, 이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모두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떼어 넣었지만, 이 과부는 가난한 가운데서 가진 것 모두 곧 자기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43-44)." 

 

이 부분을 읽는데, 순간 멈칫했습니다. 과부가 드린 헌금이 자기 생활비 전부였다는 말씀을 읽고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저 과부만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도 예수께서 말한 넉넉한 데서 얼마씩 떼어서만 헌금하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제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던 중, 계속 마음이 불편한 상태로 생각해봤습니다. ‘정말 예수께서 원하시는 게 내가 가진 생활비 전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일까?’, ‘난 그럼 뭘 먹고살지?’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예수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그러자 예수는 율법이나 예법이 그러하듯이, ‘금액적인 부분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회에서 자주 사용하는 ‘중심’이라는 말이 그것이겠지요. 

 

사람을 보다

 

사람의 마음을 본다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를 읽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율법학자들을 비난한 것도 그들이 사람됨을 잃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없고 율법만 남았습니다. 사랑은 없고 규범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부자들의 헌금액수에 미치지 못했던 과부의 적은 돈을 칭찬했던 것은 과부의 마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에게 있어서 금액의 절대적인 기준은 없었습니다. 헌금을 드렸던 이의 마음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예수에게 남은 것은 가난한 과부의 마음, 마음을 드린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영화 <사도>를 설교 중에 인용했으니 설교의 마지막은 극중 영화의 대사로 마무리해 볼까 합니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가 쌓인 사도세자는 자신의 아버지 영조를 죽이려 경희궁으로 갑니다. 그러다 아버지와 자신의 아들 세손이 나누는 얘기를 문 밖에서 듣게 됩니다. 영조는 세손에게 사도세자의 어머니(생모)의 회갑연에서 왕과 중전에게만 하는 사배(四拜)를 올린 이유를 묻습니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어머니에게 올린 사배가 예법에 어긋난다며 세손을 추궁합니다. 

 

그때 어린 세손은 사람이 있고 예법이 있는 것이라며 공자의 말을 인용합니다. 예법의 말단을 보지 말고 그 마음을 보라 했다며, 그날 자신의 아비 사도세자의 ‘마음’을 보았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다는 것, 사람의 마음을 느낀다는 것, 사람의 진심을 안다는 건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시행착오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아마 예수께서도 사람의 마음을 알게 되는데 단번에 되진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 때문에 우여곡절을 많이 겪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에게는 기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사람을 알고 자신을 알며 인내하고 사랑하는 법을 알기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그 길을 걷는 우리도 그래야겠지요. 사람을 사랑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기도의 시간은 중요합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더라도 꾸준히 기도한다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과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마음’을 드리느냐가 중요합니다. 평범한 일상의 기도를 드려보시기 바랍니다. 

 

11월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더 추워질 것 같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잘 아시겠지만 요즘만큼 사람 사랑하기 어려운 시절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사람 사랑하는 그 지난하고 수고로운 길을 함께 걸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BibleSalon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살롱에서 나누는 말씀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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