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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하나님을 알아가는 길

20151101 쓰임교회 주일설교

 

하나님을 알아가는 길

 

<시편 146편>

 

1. 할렐루야.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2. 내가 평생토록 주님을 찬양하며 내가 살아 있는 한, 내 하나님을 찬양하겠다.

3. 너희는 힘 있는 고관을 의지하지 말며,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라.

4. 사람은 숨 한 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니, 그가 세운 모든 계획이 바로 그 날로 다 사라지고 만다.

5.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고 자기의 하나님이신 주님께 희망을 거는 사람은, 복이 있다.

6. 주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시며,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며,

7. 억눌린 사람을 위해 공의로 재판하시며,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감옥에 갇힌 죄수를 석방시켜 주시며

8. 눈먼 사람에게 눈을 뜨게 해주시고,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의인을 사랑하시고,

9. 나그네를 지켜 주시고, 고아와 과부를 도와주시지만 악인의 길은 멸망으로 이끄신다.

10. 시온아, 주님께서 영원히 다스리신다! 나의 하나님께서 대대로 다스리신다! 할렐루야.

 

‘시’의 중요성

 

오늘 이렇게 쓰임교회 오신 여러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들은 ‘시’를 좋아하십니까? 학창시절 배웠던 시 중에 기억나는 시라고는 윤동주의 ‘서시’ 정도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시를 접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어도 관심을 갖지 못했었습니다. 최근 ‘시’의 중요성에 대해 말씀하시는 분들을 만났었는데, 한 책에서 ‘시’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시는 언어를 뛰어넘고 사실을 뛰어넘는 진실의 창조인 셈입니다.” 

 

신영복, 〈담론〉, 돌베개, p.30

 

조금 어려운 말인 듯 하지만 무슨 말이냐면, ‘시’ 안에서 단어는 본래의 의미를 벗어나 자유롭게 사용되기도 하고 또 ‘시’ 안에는 여러 가지 비유나 은유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또 다른 메시지가 있다는 말입니다. 시는 짧은 문장 안에 다양한 의미와 상징을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시’를 많이 접한다는 것은 그만큼 다양한 관점을 갖고 폭넓은 사고와 감수성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말일 것입니다. 저도 그게 잘 안되지만 제가 좋아하는 시집부터 사볼까 합니다. 

 

시편을 읽는 우리의 자세

 

오늘 본문을 오랜만에 ‘시편’으로 정해봤습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겠지만 시편을 하나의 문학 장르로 구분해본다면 ‘시’에 속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시편을 읽을 때 우리는 시를 쓰게 된 저자의 상황 혹은 시대, 저자의 마음을 상상해 보면 더욱 좋습니다. 

 

시편 146편의 저자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의 상황만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혹자는 본 시편이 쓰여 진 시기가 바벨론 포로기 이후라고하기도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오늘의 시편은 주님을 찬양하면서 시작이 됩니다. 시인은 평생, 살아 있는 한 주님을 찬양하겠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시를 읽는 독자들을 향해 이 땅에 힘 있는 자들이나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한번 숨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기에 사람이 세운 계획은 그 날로 다 사라지고 만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도움으로 삼고 그분께 희망을 맡기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빛에 잇대어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게 참 쉽지가 않아서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신앙을 여정이라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나 봅니다. 단숨에 어떤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 그것이 신앙인 듯합니다. 쌓이는 것, 축척되는 것이겠지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이어 후반부인 6절부터는 시인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먼저 시인은 하나님은 하늘과 땅, 바다 속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시고 영원히 신의를 지키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립을 말해주고자 함이 아니라 저자가 하나님을 느끼고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인 것입니다. 그의 가슴에서 울려 퍼지는 감동이 하나님을 고백하는 고백의 방식인 것이지요. 그에게 하나님은 그 어떤 존재보다 크고 위대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한번 하신 약속은 지키시는 그런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런 신의의 하나님은 다음 구절에서 구체적으로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억눌린 사람을 위해 공의로 재판하시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감옥에  갇힌 죄수를 석방시켜주시며, 눈먼 사람에게 눈을 뜨게 해 주시고,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의인을 사랑하시고 나그네를 지켜주시고, 고아와 과부를 도와주시며 악인의 길을 멸망으로 이끄신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후반부를 읽다보면 왠지 시인의 상황이 그려지는 것 같지 않으십니까? 그가 있는 자리가 마치 약자의 자리라고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아무래도 시인은 어려운 고난의 상황에 놓여있는 듯 보입니다. 

 

다시 돌아가 본다면 시인의 입을 통해 알 수 있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억눌려 있는 사람들을 위한 공의로운 재판관이시고, 굶주려 먹을 것이 없는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감옥에 갇힌 자들을 해방시켜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눈이 먼 사람들이 눈을 뜨게 하시고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을 일으켜 세우시는 분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공의롭고 정의로우신 하나님인 것입니다. 

 

성서가 쓰여 질 당시와 지금은 시간적인 간격이 크지만 상황은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부와 권력의 소수 독점은 여전한 듯 보이고 힘없고 가난한 자들은 여전히 설자리를 찾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상황 속에 땅과 하늘을 새롭게 만드실 분이셔야 했습니다. 

 

우리를 필요로 하시는 하나님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았다면 그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또 어떠해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홀로 일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믿겠다고 다짐한 이들을 통해 이야기(역사)를 써나가십니다. 

 

먼저 주위를 둘러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위에 억울함 속에 살아가는 이들은 없는지, 물질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들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들 곁에 함께 서 있는 게 가장 좋은 일이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라도 그들을 위한 크고 작은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 부당한 이들과 맞설 수도 있고 우리의 지갑을 열어 그들과 나눌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은 크고 위대한 일을 통해서가 아니라 작고 사소한 일을 통해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마음이 움직이는 일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누구에게도 강요해서는 안 되고 마치 하나님을 돕는 정답을 아는 듯 이야기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함께 찾아가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어떠한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누군가를 돕는 일과 동시에 자신을 돌봐야 합니다. 이 말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고, 또 자신에게 없는 것을 남에게 주려고 애쓰다 축척된 힘이 고갈될 위험이 있는 자신을 돌볼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교사들의 교사’라고 일컬어지는 파커 파머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자기를 돌보는 것이 결코 이기적인 행동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나의 유일한 재능, 이 땅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할 재능을 잘 관리하는 책무일 뿐이다. 아무 때라도 우리는 참 자아에 귀 기울이고 그것이 원하는 보살핌을 줄 수 있다. 자기 스스로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만나는 많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파커 파머,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p.59

 

하나님을 알아가는 길

 

여러분, 하나님을 알아가는 길은 세상을 달리 보려는 눈을 갖게 될 때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스스로 알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주위의 일들로 인해 알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방식이던 간에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여러분들을 그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이름 없이 그의 길을 걷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내면의 빛과 내면 교사의 가르침에 따라 삶을 사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와 같이 감춰진 부분도 많고 드러난 부분도 많은 분이십니다. 오늘 시편에서는 그분은 공의와 정의의 하나님이셨지요. 여러분들은 성서를 토대로 만난 하나님과 일상의 평범한 삶에서 만난 하나님을 잘 마주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절대 거칠거나 서두르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늘의 말씀 잘 기억하며 한 주 살아가는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

안녕하세요.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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