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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e

[쓰임 Note] 제 눈으로 주님을 봅니다

by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2015. 10. 25.

20151025 쓰임교회 주일설교

 

제 눈으로 주님을 봅니다

 

<욥기 42장 1-6절>

 

1.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2. 주님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3.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4.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내게 대답하여라" 하셨습니다.

5.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6.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소문이라는 것의 허구성

 

오늘 이렇게 쓰임교회 오신 여러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반갑습니다. 한 주간 잘들 지내셨는지요?

 

사람들이 빈번하게 모인 곳에 꼭 생기는 것이 있습니다. 뭐 사랑이라든가 (어떤 일을 진행할 수 있는) 열정, (아픔이 있는 이들을 향한) 위로, 사람 사는 냄새 등과 같이 긍정적인 것들도 발생하지만 그다지 좋지 않은 것도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런 부정적인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자기 자랑이라든가 모임의 폐쇄성, 서로간의 시기와 질투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이것의 발생을 피하기가 참 힘든데 이것이 바로 ‘소문’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그곳에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하셨지만(마18:20), 그곳엔 주님뿐만 아니라 ‘소문’이라는 주인도 함께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소문이라는 것이 ‘들려오는 떠도는 말’이라는 의미이듯이 정확한 자료를 토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문은 그저 소문일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과 속 시원한 논쟁을 펼친 욥

 

오늘 본문말씀은 ‘욥기’입니다. 교회력에 따르다보니 지지난주에도 설교본문이 욥기였는데, 오늘 다시 본문으로 욥기를 택하게 된 것은 욥이 했던 한 문장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설교제목과도 연관이 있는데요, 바로 5절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바로 이 구절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이미 잘 알고 계시겠지만 ‘욥기’는 구약에 담긴 하나의 문학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깊이 있고 의미 있는 결이 많이 새겨진 작품입니다. 욥기를 간단히 요약하면 이러합니다.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 욥에게 닥친 고난과 그 고난을 대하는 욥의 태도, 그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세 친구와 욥의 변론, 엘리후의 중재, 그리고 하나님의 크신 위엄 등이 담겨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본문은 ‘욥기’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이미 욥과 세 친구의 논쟁은 끝이 났고 엘리후의 중재 또한 끝난 상황입니다. 또 하나님의 섬세하고 위대한 섭리도 충분히 이야기 되고 난 이후입니다. 그러고 나서 욥이 오늘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2-3).” 

 

욥은 하나님과의 속 시원한 논쟁(?)을 통해 하나님의 크심과 자신의 작음을 느꼈습니다. 사실 저는 욥이 하나님께 혼이 났어도 그런 욥이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믿음 좋은 모습만 보이려고 진짜 마음을 감추기만 했고 자기 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엘리바스, 빌닷, 소발 이 세 친구 때문이긴 했지만 그래도 속 시원하게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다는 것에 제가 오히려 마음이 시원했습니다. 

 

욥기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 더 알 수는 없지만 왠지 이후의 욥과 하나님의 관계는 이전과는 달라졌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이나 부부가 크고 작은 일로 다투고 나서 오해가 풀리면 갖게 되는 마음의 평온함이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인격적인 분이시라면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는 관계이기도 합니다. 

 

귀로만 들었던 것에서 직접 눈으로 본 욥

 

서두에서 말씀 드렸듯이 5절에서 욥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에 신앙의 핵심이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설교를 시작할 때, ‘소문’이라는 것에 대해 말씀을 드렸었는데요. ‘소문’은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기 보다는 명확하지 않고 떠도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혹시 우리의 신앙도 소문의 상태와 같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누군가 말해주고 전해준 하나님의 이미지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말씀을 듣거나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도 올더스게잇 거리를 걷다 로마서 주석 서문을 ‘듣고’ 회심했던 사건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한 단계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체험 혹은 경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누군가 전해준 이야기만 듣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크고 작은 경험들을 통해 느끼고 발견하셨을 것입니다. 

 

감리교 신학의 특징: 성서, 전통, 이성, 경험

 

어제 개인적으로 참석했던 세미나에서 들었던 이야기입니다만, 감리교는 성공회의 신학을 토대로 시작되었기에 세 가지의 특성을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성서’이고 다른 하나는 ‘전통’ 다른 하나는 ‘이성’입니다. 여기에 감리교는 하나의 특성이 더 필요한데 그것이 무엇이냐면 바로 ‘체험(경험)’이 바탕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서, 전통, 이성 그리고 체험. 이 네 가지가 감리교를 대표하는 상징인 것입니다. 

 

물론 개인적인 체험이나 경험을 이야기할 때는 늘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체험과 경험을 객관화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생김새와 품성이 정말 다양하듯이 우리가 만난 하나님 또한 서로 비슷한듯하나 다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의 경험을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신앙만이 옳고 위대하며 다른 이들의 신앙은 그렇지 않아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이나 체험이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개인적인 ‘사건’이 하나님과 나 자신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뜻밖의 고난에 휘청거리거나 흔들릴지언정 넘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에 있어서 경험이 바탕이 된다는 건 그만큼 우리가 몸으로 주님의 길을 걷고 있다는 증거이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제 눈으로 주님을 봅니다

 

이것이 오늘 욥이 하나님께 말한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라는 말의 진의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지금까지 귀로 듣던 것에서 눈으로 보게 된 주님, 그는 비로소 하나님을 직접 경험했던 것입니다. 

 

한 달 전쯤 만남을 정리했던 한 친구를 생각하다가 문득 오늘의 말씀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종교라는 것, 신앙이라는 것 때문에 만났었고 신앙이라는 것 때문에 헤어졌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 언제, 어느 순간이 될지 도무지 예상할 수 없습니다. 믿음을 갖게 하는 방법을 알면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을 모두 전도하고도 남았겠지요? 

 

다만 그 친구를 생각하며 못내 아쉬운 것은, 삶의 환경이 바뀌면서 삶을 새롭게 보게 만든 그 신앙을 옆에서 지지해주고 흔들리는 것을 함께 견뎌주고 서로 보듬어 줬던 공동의 멤버들이 없어지며 끝내 버티지 못했다는 아쉬움입니다.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욥이 하나님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는 그 정도의 경험은 아니었어도 ‘그 친구가 하나님과 주체적인 관계를 맺을 수만 있었다만 끝이 달랐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조금 개인적인 이야기로 빠졌는데요,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소문이라는 것이 정확한 정보를 보증하지 못하듯이, 우리 신앙의 토대도 들리는 이야기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신과 하나님의 직접적인 관계는 무척 중요합니다. 그러한 경험과 체험이 스스로를 주체적인 신앙인으로 성장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개인적인 경험을 남을 판단하는 잣대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작고 사소한 부분을 참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평범한 일상 가운데에서 작고 사소하게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다가오실 것입니다. 종교개혁주일이기도 한 오늘, 작고 사소한 일들 속에서 크고 보람된 일들을 발견하는 작은 일상의 개혁을 일으켜보시기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어떤 이들과의 만남이, 어떤 분들과의 만남이 기다려지고 기대하게 되는 이 단순한 마음도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라고 확신하게 됩니다. 오늘의 만남을 만들어주시고 당신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많은 것들을 잊고 살지만, 잊혀 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우리 각자가 경험했던 일들일 것입니다. 주님과 만난 그 따스했던 경험들이 지금의 우리를 있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당신을 느끼고 체험했던 경험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게 만듭니다. 주님을 만난 이 경험들을 소중히 간직하되 우리의 경험으로 누군가의 믿음을 재촉하지 않게 하시고 불안하여 흔들리는 이들 곁에 묵묵히 머물며 그들의 버팀목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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