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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쓰임 Note] 생의 시작을 알리는 하나님

20171231 쓰임교회 주일설교 

 

생의 시작을 알리는 하나님 

 

<갈라디아서 4장 4-7절> 

 

4. 그러나 기한이 찼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또한 율법 아래에 놓이게 하셨습니다. 

5. 그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자녀의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6. 그런데 여러분은 자녀이므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을 우리의 마음에 보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 

7. 그러므로 여러분 각 사람은 이제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자녀이면,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아쉬움과 설렘을 주는 마지막 

 

빛으로 오신 주님의 사랑이 이곳에 모인 모든 분들과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2017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어느새 한 해의 마지막 주이자 마지막 날이 되었습니다. 마지막 혹은 끝이란 말은 늘 감회를 새롭게 합니다. 그래서 때론 아쉽고 때론 설렘을 줍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주님께서 여러분께 주시는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한 해를 마무리하며 어느 본문의 말씀을 나누면 좋을까 고민이 됐습니다. 교회력에 주어진 네 개의 본문을 묵상하던 중 갈라디아서의 말씀에 눈이 머물렀습니다. ‘자녀’라는 말 때문에 그러했는데요. 왜 그 단어가 제 시선을 훔쳤나 생각해 보니, 올 한 해 저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게 바로 ‘가족’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매년이 그러했지만, 올해 더 '가족'이 인상이 깊었던 건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 가족 관계를 더 숙고해 봤기 때문입니다. 가족은 내 안에 있는 다양한 감정을 들여다보는 통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 고민의 흔적이 바울의 메시지와 만나자 생각이 더 풍성해졌습니다. 그래서 그 고민의 흔적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바울은 과연 우리를 향해 어떤 존재가 되라고 하는지 그 근거를 제1성서인 구약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연관 지어 생각해 볼까 합니다. 

 

율법의 가치를 인정하는 바울 

 

갈라디아서는 율법과 믿음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돕습니다. 믿음으로 구원함을 받는다는 ‘이신칭의(以信得義)’, ‘이신득의(以信得義)’에 관해 증거 하는 것이 바로 갈라디아서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4장의 말씀도 그와 관련된 부분입니다. 4장에서 바울은 종과 자녀에 관한 대비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밝힙니다. 

 

그래서 그는 4장 4절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기한이 찼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또한 율법 아래에 놓이게 하셨습니다.” 이 말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율법의 가치를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갈라디아서를 읽을 때 조심해야 하는 것은 갈라디아서는 무조건 율법의 폐기를 외치는 그런 성경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율법을 통해 복음의 본질로 나아갑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이 증언하는 대로 오셨습니다. 그는 여자의 몸 즉, 마리아의 몸을 통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땅에서 불쑥 솟아난 어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참 하나님의 참 사람의 모습 그 원초적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율법의 가치를 인정하며 믿음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의 가치를 인정하는 이 4절의 말씀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을 시사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사건’ 즉, ‘인카네이션(incarnation) 사건’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의 근거를 5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읽어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속량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자녀의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4절에서 바울은 예수가 여자의 몸을 통해 이 땅에 온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를 두고 예수를 율법 아래 놓이게 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이해와 공감의 깊은 차원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와 공감 ‘성육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을 모두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셨던 신영복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입장의 동일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관계의 최고 형태는 '입장의 동일함'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누군가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처한 상황에 서봐야 잘 알 수 있다는 말인데요. 이 말을 하나님과 우리 관계에 가져와 보면 어떻게 될까요? 인간의 상황에 처해보지 않는 존재가 인간의 상황을 이해한다? 물론 하나님 입장에서 꼭 그래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하는 그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을 입혀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오늘 본문은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을 속량’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속량’이라는 말은 달리말해, 죄를 사해준다는 의미를 넘어 인간에 대한 ‘이해’, 인간에 대한 깊은 ‘공감’이 가능해졌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기에 성육신 사건은 신이 인간을 향한 사랑의 가장 최대치를 보여준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이 인간과 동일한 입장에 처해졌기 때문입니다. 

 

종이 자녀가 된 사건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이번에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우리에게’ 전해진 아주 중요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존재의 변화 혹은 존재의 발견이라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 앞에 우리가 ‘자녀’가 된 사건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 이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종이 자녀가 된 사건’, 이건 그야말로 불가능한 일이 가능케 된 사건입니다. 예수가 살던 당시도 노예와 종이 있었습니다. 종의 신분으로 태어나거나 종이 되어버린 사람은 절대 신분의 변화를 이룰 수 없었습니다. 신분 상승은 불가능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는 사회적 환경이나 구조가 신분의 변화를 일절 차단시킨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예와 종은 정해진 운명을 살아야 했습니다. 실제가 그러할진대, 믿음 하나만으로 신분이 바뀐다? 이건 엄청난 역사적 진술이자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종에서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은 어떤 변화를 겪었다는 말이 됩니까? 자녀이자 상속자가 된다는 건 대체 어떤 변화가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까? 질문이 좀 난해해 보입니다. 그래서 다시 묻습니다. 자녀는 누구입니까? 또 상속자라 함은 어떤 역할을 부여받았다는 말이 됩니까? 

 

솔직한 대화를 지속할 수 있는 용기 

 

하나님은 '인간 존재의 뿌리’가 되시는 분입니다. 삶의 근원이자 사람이 숨 쉬는 삶의 토대라는 말입니다. 이를 가족과의 관계로 풀어보면 어떻게 될까요? 이런 표현이 가능할 겁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내가 한없이 수용되고 또 생명을 부여받은 존재로써 이 땅에 설 자리가 마련된다는 것? 이런 표현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최근 읽은 한 소설에서 가족과의 관계를 돌아보게 하는 한 대목을 보았습니다. 이는 곧 부모와 건강한 관계를 맺은 자녀가 세상에 나아가 어떤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지에 관해 간접적으로 보여줬습니다. 해당 부분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책 제목은 알랭 드 보통이 쓴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입니다. 

 

“의사 전달을 잘하는 기본 요건은 자신의 성격 중 더 문제가 되거나 더 특이한 면이 있더라도 그 때문에 당황하지 않는 능력이다. 의사 전달을 잘하는 사람은 자신의 분노나 성적 취향 또는 일반적이지 않고 거북할 수 있는 자기 의견에 대해 자신감을 잃거나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고 숙고할 줄 안다. ​ 

 

그들이 명료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수용 가능하다는 대단히 가치 있는 인식을 길러낸 덕분이다. 그들은 적정한 수준의 인내심과 상상력을 발휘하며 자신을 표현할 수단만 갖추고 있다면 다른 사람의 호의를 받을 만하고 또한 받을 수 있다고 능히 믿을 만큼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 

 

의사 전달을 잘하는 이런 사람은 어릴 적, 모든 면에서 적절하고 완벽할 것을 요구하지 않고도 아이를 사랑할 줄 아는 보호자로부터 보살핌을 받는 축복을 누렸음이 분명하다. 그런 부모는 자식이 - 적어도 한동안은 - 가끔 이상하거나, 난폭하거나, 화를 잘 내거나, 심술궂거나, 기이하거나, 슬퍼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수용할 줄 알고 그래도 가족의 사랑이라는 울타리 안에 자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 줄 안다. ​ 그렇게 하여 자녀가 성인이 되고도 고백과 솔직한 대화를 지속할 수 있게끔 하는 용기의 매우 귀중한 원천을 이루어낸다.”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은행나무, p.101-102) 

 

방금 읽어드린 소설에서 한 아이가 부모에게 어떻게 수용되는가에 따라 어떠한 행동 변화를 겪는지 보여줍니다. 행동의 초점을 의사전달에 두고 있는데요. 의사전달을 잘하는 사람은 자신의 성격 중 더 문제가 되거나 특이한 면이 있어도 그 때문에 당황하지 않는 사람이라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의견에 대해 자신감을 잃지 않고 자기혐오에 빠지지 않고 숙고할 줄 압니다. 쉽게 말해 이런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의 호의를 받을 만하고 또 받을 수 있다고 믿을 만큼 자신을 잘 돌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행동하는 아아의 부모는 아마 자녀가 한동안 혹은 가끔 이상하거나, 난폭하거나, 화를 잘 내거나, 심술궂거나, 기이하거나, 슬퍼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수용하며 견딜 줄 알고 그럼에도 가족의 사랑이라는 울타리 안에 자리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부모였을 거라고 말합니다. 

 

본 소설은 그러한 사람이 된 근거를 어렸을 적 가족관계를 통해 보여줍니다. 어렸을 적 아이는 부모로부터 모든 면에서 적절하고 완벽할 것을 요구하지 않고도 아이를 사랑할 줄 아는 보호자로부터 보살핌을 받는 축복을 누렸을 거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성인이 된 자녀가 솔직한 대화를 지속할 수 있게끔 하는 용기의 매우 귀중한 원천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건 

 

물론 방금 이야기만으로 한 사람의 모든 것을 알고 또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소설 속 이 대목이 던져주는 부분은 하나님과 그분의 자녀가 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그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말, 상속자가 되었다는 말을 여기에 대입해 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렇게 봐도 괜찮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우리의 삶이 모든 면에서 적절하고 완벽해야 될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한동안 혹은 가끔 이상하거나, 난폭하거나, 화를 잘 내거나, 심술궂거나, 기이하거나, 슬퍼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하나님께서는 잘 수용해 주시고 그럼에도 하나님 사랑의 울타리 안에 자리할 자격은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믿는 것. 하나님과 우리 자신과의 관계를 이렇게 보아도 괜찮지 않을까요? 이것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말의 구체적 표현 아닐까요? 우리가 계속해서 기도를 한다는 건 이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과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재발견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으로 타자를 향한 사랑까지 

 

사랑하는 쓰임교회 공동체 여러분, 오늘 우리는 2017년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한해의 마지막 주 갈라디아서의 말씀을 나눴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 우리는 이제 종이 아니라 자녀이자 상속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자녀가 되었다는 것,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이었습니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는 것 그리고 이 사랑을 신뢰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과 타인에게 솔직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과 타인에게 솔직해질 수 있는 사람은 존재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접속된 사람이기에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고 그분의 뜻을 삶에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는 데에만 머물지 않고 타자를 향한 사랑으로까지 나아갑니다. 이것이 하나님 사랑의 신비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이때에 우리를 자녀로 불러주신 주님의 뜻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시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새로운 시작을 하라 일러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방황하고 넘어지고 그런 스스로에게 실망할 때도 다시 일어설 용기를 주십니다. 그렇기에 주님과 깊이 접속된 사람은 매일이 새로운 시작일이 될 겁니다. 모든 살아있음의 시작을 알리시는 주님께서 여러분과 늘 함께 하시길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살롱(salon)에서 성경에 담긴 생명과 평화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with 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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