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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작가야의 일상 에세이

[에세이] 두 갈래의 길, 추상력-상상력

 

두 갈래의 길. 사람에게는 두 갈래의 길이 있다. 한 길은 성실과 근면의 길이다. 이 길을 걷는 이들은 힘이 있다. 정해진 길을 걷되 크게 벗어나는 일이 없다. 도덕은 주로 이들의 편이다. 

 

다른 한 길은 게으름과 망설임의 길이다. 이 길을 걷는 자들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경쟁에서 주로 뒤처지는 것처럼 보이고 잠잠히 있다가 크게 사고를 치기도 한다. 예술은 주로 이들의 편이다. 

 

가까이 있는 벗들을 떠올려본다. 그들은 성실하며 근면하다. 힘 있게 자신의 길을 간다. 시간은 그들의 편이다. 그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빈 틈 없이 메운다. 그래서 삶이 탄탄한 편이다.

 

자신을 타자화시켜 본다. 그는 자주 게으르고 판단이 더디다. 많은 것을 고려한다. 주저함이 많다. 시간이 많다 하여 알차게 채우지 않는다. 삶은 느슨하고 때론 위태로워 보인다. 

 

성실하고 근면한 이들은 위기 앞에 속수무책이다. 한 길로 모든 삶의 척도로 삼았기에 위기 앞에 분노한다. 임기응변에 미숙하다. 새로운 방식을 상상하기 어려워한다. 정해진 틀 안에서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씨름하는 힘이 있다. 

 

게으르고 망설임이 많은 이들 또한 위기 앞에 속수무책이다. 지금 걷는 길이 삶의 전부라고 생각하질 않아 위기 앞에 여유는 있으나 딱히 다른 대안은 없다. 이들도 임기응변에 미숙하다. 하지만 자기 가능성을 믿진 않지만 가끔 틀 밖에서 사고한다. 

 

상상력이 가능하며 동시에 삶을 힘 있게 살아가는 방법은 없는 걸까. 메모장을 뒤적이다 오랜만에 신영복 선생님의 글과 만났다. 선생님께서는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는 두 가지 능력을 향상하기 위함인데, 추상력과 상상력을 유연하게 구사하고 적절히 조화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는 이 두 가지 능력, 즉 문사철의 추상력과 시서화의 상상력을 유연하게 구사하고 적절히 조화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입니다. 옛날 사람들도 문사철과 시서화를 함께 연마했습니다. 이성 훈련과 감성 훈련을 아울러 연마하게 됐습니다. 중요한 것은 추상력과 상상력 하나하나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이 둘을 적절히 배합하여 구사할 수 있는 유연함입니다. 그런 공부가 쉬운 일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그러한 공부는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고의 문제가 아니라 품성의 문제입니다." (신영복, <담론>, 돌베개, p.53)

 

성실과 근면한 모든 이가 문사철의 추상력을 갖췄다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사람 앞에 놓인 길이 두 개의 길이라는 가정하에서 보면, 성실-근면한 이들은 아무래도 이성 훈련이 잘 되어 있는 문사철의 추상력을 상상력에 비해 조금 더 갖췄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게으르고 망설임 많은 이도 시서화의 상상력을 그 누구보다 탁월하게 갖췄다고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성실-근면한 이들에 비해 감성 훈련이 잘 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참 어려운 일이다. 둘 중 하나가 아닌, 추상력과 상상력을 적절히 배합하여 구사할 수 있는 그 유연함만 갖출 수만 있다면, 사람들 사이에 놓인 장벽과 삶의 위기에 훨씬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갑자기 이 글을 왜 쓸까 생각해 보니, 곁에 있는 벗들은 상상력을, 나 자신은 추상력을 더 향상해야 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일단 자야겠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살롱(salon)에서 성경에 담긴 생명과 평화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with 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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