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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작가야의 일상 에세이

[에세이] 사색하고 기다리고 단식하는 이

북촌 <비화림>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에는 재밌는 구절이 반복되어 나타난다. 그중 하나가 싯다르타와 카말라가 나누는 대화이다. 카말라는 자신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옷, 신발, 돈'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세 가지는 싯다르타에게 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를 찾게 되면 그때가 돼서야 다시 자신을 찾아오라고 말한다. 싯다르타는 카말라에게 묻는다. 어디로 가야 그 세 가지를 가장 신속하게 얻을 수 있냐고 말이다. 그러자 카말라는 말한다.

 

"이보세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알고 싶어하지요. 당신이 배운 일을 하셔야지요. 그리고 그 대가로 돈과 신발과 옷을 얻도록 해야지요. 가난한 사람이 돈을 손에 쥐는 데는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어요. 도대체 당신은 무슨 일을 할 수 있지요?"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민음사, p.87)

 

그녀는 냉정했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카말라만큼 대담하고 솔직했다. 그는 당황하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사색을 할 줄 아오. 나는 기다릴 줄 아오. 나는 단식할 줄 아오." (위의 책, p.87) 물질로 상징되는 '옷, 신발, 돈'이 있냐는 말에 그는 '사색, 기다림, 단식'이 있다고 답한다. 참 어이가 없다. 이보다 더한 동문서답이 어디 있겠는가. 어느 하나 겹치는 게 없는데, 저렇게 당당하다니.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사실이 담겨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다. 모든 것을 얻을 수 없고,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없다. 우리는 결코 신이 아니기에 돈, 건물, 지식, 땅, 사람, 건강, 명예 등 모든 것을 동시에 가질 수 없다. 다시 사랑의 관점으로 돌아와 보자. 그럼 우린 사랑하는 대상이 바라고 원하는 것이 없다고 하여 그냥 주눅 들어 물러서고 말 것인가? 싯다르타의 대범함은 솔직함에 있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자신의 능력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상대에게 당당할 수 있었다. 아니, 당당해 보였다고 해야 하나? 그는 당장 옷, 신발, 돈은 없지만, 그가 그동안 갈고닦은 자신의 것, 자신의 능력인 사색과 기다림, 단식을 할 줄 안다고 말했다. 제삼자가 보기엔 이보다 더 우스운 답은 없다. 하지만 싯다르타의 답변에는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자신에게 없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 한 존재의 단단함이 나타난 것이다. 

 

북촌 <비화림>

저녁을 먹고 식당을 나오는 데 친구 여자에게 물었다. 나는 어떻게 하면 여성에게 매력 있는 남자가 될 수 있겠냐고 말이다. 네가 보기에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녀는 고민하며 걸었다. 그러다 여성들이 많이 나오는 독서 모임이나 영화 모임을 찾아보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다. 처음 봤을 때 눈에 띄는 사람이 있고, 처음엔 눈에 잘 안 들어오지만 볼수록 괜찮은 남자가 있는데, 나는 후자에 가깝다고 말했다. 내가 저녁을 사 칭찬해 준 건가? 아무튼. 결국 남들보다 외모도 뛰어나지 않고 별로 말주변도 없고 조심성 많은 나에게, 내가 평소 관심 있어하고, 함께 어울릴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서 그동안 쌓아둔 매력을 보여주라고 말하는 듯했다. (물론 실제로 모임에 나가면 또 다른 문제들이 발생하곤 했다)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는 어렵다. 서먹하고 어색하다. 집 근처에 다다랐을 때, 아버지께 전화가 왔다. 책을 잘 받았고 아버지 인간 되게 하려고 좋은 책 보내줬다며 고맙다고 하셨다. 물론 한 잔 하시고 기분 좋은 상태로 전화를 주신 것이다. 최근 며칠이 아주 지낼만하다고 하셨다. 내가 보내준 세 권의 책을 집이랑 회사에서 읽으며 외로움을 덜 느끼게 되었다고 하셨다. 

 

신기했다. 기분이 묘했다. 이미, 많은 돈을 벌어 아버지께 인정받는 것은 글렀다고 생각했다. 예쁜 며느리와 사랑스러운 손자, 손녀는 언제야 안겨드릴지 여전히 미지수다. 그래서 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 내가 관심 있는 일로 아버지께 다가갔다. 아버지께서 지난 휴가 때, 넌지시 던진 '책이나 사 보내라'는 그 말 한마디를 잊지 않고 고심하여 세 권의 책을 보낸 것이다. 너무 직접적으로 '아버지가 이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드러나지 않게 고민하고 고민해 책을 추린 것이다. 다행이었다. 모든 책을 마음에 들어 하셨고, 느낀 점이 많다고 하셨다. 물론 아버지의 변덕은 언제-어디서-어떤 방식으로 발현될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 경험을 통해,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내가 관심 있는 일로 부모님께 다가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싯다르타는 말했다. "나는 사색할 줄 아오. 나는 기다릴 줄 아오. 나는 단식할 줄을 아오."

그리고 나는 말한다. "나는 책을 좋아하오. 나는 성찰할 줄 아오. 나는 다시 시작할 줄 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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