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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성서학당] 성경 인물의 빛과 그림자 : 마리아

20201112 청파교회 목요 <성서학당> : 성경 인물의 빛과 그림자

 

여왕과 야성녀: 마리아

 

 

변화시키는 여성

 

안녕하세요. 여섯 번째 목요 <성서학당>을 시작하겠습니다. 여섯 번째 시간에는 지난번에 말씀드린 대로 ‘에스더’에 이어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 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의 강의 포인트를 미리 말씀드리면, 오늘 우리는 마리아에게서 ‘변화시키는 여성’의 모습을 보아내려고 합니다. 

 

여자의 인생에는 어떤 식으로든 계속 ‘변화’가 일어난다고 하는데요. 그런데 사실 이번 강의의 포인트인 이 ‘변화’라는 개념이 잘 와닿지 않았었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제 나름의 이해를 해봤는데요. 마리아에게 있어서 ‘변화’란 이런 걸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선 여성은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자기의 몸(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자신에게 발생한 일이 무엇이든 간에 일단 모든 것을 수용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 내면에서 어떤 식으로든 소화를 시킵니다. 그 후엔 그것을 다시 내보내는 거죠. 그러니까 저는 이 ‘변화’라는 것이 먼저 상황을 받아들이고, 마음에서 변화를 시킨 뒤, 어떤 식의 변화된 결과물을 내보낸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러니까 ‘변화시키는 마리아’에서 이 ‘변화시키는’이란 표현은 다른 누군가를 의도적으로 변화시킨다는 뜻이 아니라, 내 안에 들어온 것들을 새롭게 ‘변화시킨다.’라는 의미의 ‘변화’인 것입니다. 설명이 더 어려워졌나요? 

 

그렇기에 여성은 삶의 모든 정황을 배움의 기회로 삼을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안셀름 그륀은 말합니다. 

 

태곳적부터 여자는 출생과 죽음, 성장과 노화라는 변화 현상과 관계가 있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생명이 자라고 성장의 여러 단계를 거친다. 원시시대부터 어머니는 변화가 일어나는 그릇에 비유되곤 했다. 원시시대에 변화와 변신의 원형적 상들이 의미하는 것을 지금의 여자들도 비슷하게 경험한다. 여자들의 삶의 영역에서는 끊임없이 변화가 일어난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57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안셀름 그륀은 성경의 인물들 가운데 이 ‘마리아’의 모습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여자의 원형을 발견합니다. 그녀는 여성만이 지닌 그 고유성, 즉 여자로서의 정체성을 받아들였고 자신이 여자임이 기쁘게 여겼습니다. 

 

여러분, 혹시 이탈리아(Italy) 가보셨나요? 저는 운 좋게 2017년에 한 번 다녀왔습니다. 이탈리아를 갈 계획은 아니었는데, 스페인 산티아고(santiago) 순례길을 걸은 후, 무계획에 아주 즉흥적으로 이태리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순례를 마치고 체코에 있다가 진짜 별생각 없이 이탈리아를 가게 되었는데, 체코 프라하 공항에서 만난 한 한국 친구로 인해 바티칸 투어까지 하게 됐습니다. 정말 운이 좋았던 거죠. 

 

위대한 예술 작품 도시인 바티칸에 계획이나 준비 없이 갔기 때문에 그곳에 어떤 위대한 예술 작품들이 있을지 알지 못했고, 또 무엇보다 위대한 작품들을 보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대부분 잊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잊혀지지 않는 작품 하나가 있었는데, 그 작품은 바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였습니다. ‘피에타(Pieta)’는 이탈리아어로 ‘슬픔, 비탄’이라는 뜻입니다. 이 피에타는 십자가 처형 이후 죽은 예수를 품에 안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을 조각한 작품입니다. 젊은 예수의 몸은 축 늘어져 있고, 마리아는 기쁨도 슬픔도 아닌 뭔가 초월한 듯한 시선으로 예수 또는 바닥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바티칸에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뭐라고 형언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떤 수식어도 붙이기 어려운데요. 인간의 손이 아무리 정교하고 섬세하다 해도 마치 진짜 사람을 거푸집 같은 틀에 넣은 것처럼 어떻게 저리도 생동감 있게 만들 수 있는지 감탄만 할 뿐이었습니다. 

 

왜 이 <피에타> 이야기를 드렸냐면, 이 피에타의 모습이 ‘변화시키는’ 마리아의 모습을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닥친 고난과 슬픔, 고통을 피하지 않고 승화시킵니다. 안셀름 그륀은 말합니다. 

 

13세기에 죽은 아들을 품에 안은 어머니를 주제로 한 작품(피에타)이 나왔다. 이 작품은 고난을 겪는 수많은 사람에게 희망의 상이 되었다. 여기서 마리아는 고통을 피해 가지 않고, 짊어지며 변화시키는 어머니로 묘사된다. 이는 사람들에게 자신도 고통을 그렇게 대할 수 있게 해 주고 더 강해지게 했다. 그들은 고통 가운데 주저앉지 않고, 마리아처럼 고통을 겪어 냈다. 그렇게 자신의 고통과 슬픔을 변화시켰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59

 

고통의 모범, 마리아

 

참 모순적이지만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고통’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낳은 가장 고매한 존재가 슬픔의 상징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같은 여성으로써 모든 여성의 슬픔과 고통을 대변합니다. 이것이 마리아의 위대함이라 볼 수 있습니다. 과연 이런 마리아의 모습에서 어떤 힘이 나오는 걸까요? 그륀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피에타의 마리아상은 여자가 살면서 겪는 고통을 상징한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했던 여자, 건강을 잃거나 자기 사명을 포기해야 했던 여자, 사랑하는 것, 소중한 것을 단념해야 했던 여자, 삶의 의지가 된 것을 잃은 여자의 고통을 대신한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59

 

누군가 어떤 아픔을 경험했습니다. 이별했거나 몸이 아프거나 어떤 억울한 일을 겪었습니다. 그 사람은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필요합니다. 만약 여러분이라면 가장 먼저 누구를 찾아가고 싶습니까? 내가 아픔을 겪었는데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을 찾는다면 누구한테 가장 먼저 연락을 하겠습니까? 아마 이 영상을 시청하시는 분들은 믿음이 좋으시기에 하나님을 찾아가실 겁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속마음을 다 털어놓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저처럼 믿음이 약한 사람은 하나님도 떠올리겠지만 더불어 저와 같은 아픔을 겪었던 사람, 제가 겪었던 일을 비슷하게 경험했던 사람을 찾아갈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삶에 우여곡절이 없었던 사람은 힘든 일을 겪어본 사람의 심정을 다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물론 재야(在野)의 고수들은 일이관지(一以貫之)하여 모든 상황을 단번에 다 이해해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비슷한 일을 겪었던 사람이 더 큰 위로와 공감을 해 줄 것 같아 그 사람부터 찾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마리아는 큰 아픔을 경험한 자로써 ‘고통의 모범’, 즉 신앙인들의 고통을 대변하는 이 된 것입니다. 물론 마리아에게도 아들의 죽음음 결코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기나긴 여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함께 있어주신 예수

 

<하갈 이야기> 때도 말씀드렸는데요. ‘절망의 깊이가 곧 영광의 깊이’라고 말씀드렸었습니다. 마리아의 위대함도 비슷한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함부로 얘기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고통에는 배움이 있습니다. 사실 배우고자 하면, 모든 순간에는 배움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시선과 태도가 문제가 될 텐데요. 안셀름 그륀은 말합니다. 

 

마리아는 고통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기나긴 여정일지도 모른다. 마리아가 그랬듯 우리도 고통을 받아들이고 더 이상 고통에 몸부림치지 않는다면, 우리 안에 있는 어떤 것이 변화될 것이다. “이 고통을 견뎌 내기 위해 지금 내가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하고 자문한다면, 우리는 더 발전할 준비가 된 것이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59-160

 

마리아도 참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들을 잃은 이 절망감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그 고통을 자신의 내면에서 승화시켰습니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억울함과 피해 의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깊은 슬픔 속에서도 배울 점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도 혼자 힘만으로 그 어려움을 극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십자가 아래에서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녀에게도 곁에 있어 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안셀름 그륀은 말합니다. 

 

고통 속에서 우리는 고독하고 흔들리며 상처받는다. 그때 우리는 혼자며 누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다. 마리아도 십자가 아래 홀로 있지 않았다. 옆에서 부축해 주는 사람이 있었으며 그 도움을 받아들였다. 고통 속에서는 신뢰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우리 안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신뢰해야 한다. 이 힘을 사용하기를 거부한다면, 희생양으로 남게 된다. 남 탓만 하면서 고통에 매이게 된다. 성숙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60

 

 

사람은 기쁠 때보다 힘들 때 가장 인간다운 면모를 회복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하갈 이야기> 때 ‘희생’보다 ‘기쁨’을 쫓을 필요가 있다고 말씀드리긴 했습니다만, 여기서 말하는 ‘힘든 때, 힘든 순간’은 자신의 통제 밖에서 일어난 일을 겪었을 때를 말합니다. 고통의 순간에 우리는 정말 혼자라는 느낌이 받곤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내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곁에 있다면, 어떤 말한 마디보다도 내 슬픔에 귀를 기울여줄 단 한 사람만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이가 곁에 있다면, 상황은 바뀌지 않겠지만 우리는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됩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일본인 작가가 있습니다. <침묵>, <깊은강>으로도 유명한 ‘엔도 슈사쿠’가 바로 그입니다. ‘사일런스(Silence)’라는 영화로도 제작된 이 <침묵>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읽어드리겠습니다. 

 

'주님, 당신이 언제나 침묵하고 계시는 것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함께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그러나 당신은 유다에게 가라고 말씀하셨었습니다. 가서 네가 하려는 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유다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지금 너에게 성화판을 밟아도 괜찮다고 말한 거와 같이, 유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말한 것이다. 너의 발이 아픈 것처럼 유다의 마음도 아팠으니까.'


엔도 슈사쿠, <침묵>, 바오로딸, 2009, p.329

 

소설 <침묵>에 등장하는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는 어떤 초월적 존재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인간처럼 수많은 한계를 갖고 계시기에 고통을 겪는 자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얼굴이 그려진 ‘성화판(후미에)’을 밟지 않으면 죽을 위기에 처한 이에게 괜찮다고, 자신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을 발로 밟아도 괜찮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죽을 위기에 처한 이를 기적처럼 구해주지는 못하지만, 그의 곁에서 함께 괴로워해주고 있습니다. 엔도 슈사쿠에 등장하는 이 무기력한 예수님은 오히려 우리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기보다 큰 위로와 힘이 되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아마 엔도 슈사쿠도 고통을 당하는 자 옆에서 ‘함께 있어주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강에 앉아 있다. 강변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예수가 젖은 옷을 말리고 있다. 들풀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 풀의 꽃과 같은 인간의 꽃 한 송이 피었다 지는데,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 


정호승, “서울의 예수”

 

무익한 고통은 없다

 

자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줍니다. 시인이자 작가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는 그의 책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나무’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나무’는 “수액을 재촉하지도 않고 봄의 폭풍 한가운데 의연하게 서서, 혹시 여름이 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는 일”없는 존재로 표현됩니다. 여름은 그렇게 아무 걱정 없이 조용히 기다릴 줄 아는 여유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온다며 말입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삶의 예술가들인 것이죠. 릴케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술가는 나무처럼 성장해가는 존재입니다. 수액을 재촉하지도 않고 봄 폭풍의 한가운데에 의연하게 서서 혹시 여름이 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는 일도 없는 나무처럼 말입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여름은 오니까요. 

그러나 여름은 마치 자신들 앞에 영원의 시간이 놓여 있는 듯 아무 걱정도 없이 조용히 그리고 여유 있게 기다리는 참을성 있는 사람들에게만 찾아오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날마다 배우고 있습니다. 나는 오히려 내게 고맙기만 한 고통 속에서 그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인내가 모든 것이라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고려대학교출판부, 2006, p.31-32

 

많은 대가는 ‘인내’를 통해 고통 속에서 희망을 보아냅니다. 정말 그렇지 않나요? 현재 고난의 길에 서 있는 사람은 주변이 잘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저도 그런 경험을 여러 번 해봤습니다. 그럴 때 그 어둠을 통과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 ‘인내’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인내의 시간의 시간 끝에서, 나를 괴롭히던 문제들이 부유하듯 어딘가로 떠내려 간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안셀름 그륀은 말합니다. 

 

자연에서는 죽음과 소멸이 다시 생성으로 이어진다. 이를 우리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고통 속에 있을 때 이 고통도 지나갈 거라는 희망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새롭게 될 것을 믿고 신뢰해야 한다. 희망하고 믿는다면, 고통을 몰아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지금은 힘들지만 머지않아 고통을 깨뜨릴 수 있음을 안다. 나아가 선한 어떤 것으로 변화시킬 수 있음을 견지한다. 희망하고 믿으면 견뎌 낼 수 있다. 해결하도록 돕는 새로운 인식을 기대할 수 있다. 우리를 투명하게 하고, 고통의 새로운 의미에 눈이 열리도록 기도하거나 명상하고 침묵할 수 있다. 나중에 그 고통을 되돌아보면, 귀중한 것을 배웠으며 그 어둠을 통과해 살아냈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음을 깨달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더 성숙해지고, 고통을 긍정적인 힘으로 변화시켰다는 것을 깨닫는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60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죽음은 다음 생명을 위한 밑바탕이 됩니다. 거름이 되는 것이죠. 인간의 삶도 비슷합니다. 내게 무익한 슬픔은 없습니다. 과정의 한복판에 있을 땐 알 수 없습니다.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를 말입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희망의 끈을 놓지만 않는다면, 우리 삶을 가꾸어 가실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내게 그냥 왔다 그냥 가는 경험들은 없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바로 ‘변화의 아이콘’, 즉 고통과 슬픔을 승화시킨 ‘변화의 아이콘’이었습니다. 

 

당혹스런 동정녀의 잉태

 

안셀름 그륀은 마리아의 이 ‘동정녀 잉태’도 하나의 사건으로 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천사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을 임신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는 아직 남자와 동침한 적이 없습니다. 요셉과 약혼은 했지만 아직 혼인의 과정은 거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동정녀의 신분으로 임신을 한다는 건 당혹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이 소식은 기쁨이기 이전에 주위 사람들로부터의 외면과 사회에서의 고립 더 나아가 죽음의 위기와도 연결된 것일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마리아는 하나님의 천사가 전한 그 소식을 ‘자신에게 일어날 사건’으로 받아들이기까지, 다시 말해 자신도 그 일을 자기 스스로 원하기까지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안셀름 그륀은 말합니다. 

 

마리아가 규범을 어기면서 동정녀로 임신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과 조화를 이루어야 했다. 여류 작가 에스더 하딩은 “동정녀는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마리아가 그렇게 한 것은 누구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좋아하도록, 남들의 주목을 받거나 사랑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기가 행하는 것이 옳기 때문에, 그 일이 자신의 내면과 일치하기 때문에 한 것이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62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급진성

 

마리아는 하나님의 천사를 만난 후, 엘리사벳에게로 향합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친척이었습니다. 엘리사벳은 나이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불임으로 고통 받는 여성이었습니다. 하지만 엘리사벳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늙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갖게 됩니다. 마리아는 은총을 입은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임신한 마리아가 임신한 엘리사벳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임신한 두 여자는 서로 인사를 나눕니다. 이 두 여성의 만남은 기독교 역사의 소중한 전통을 만들어 냈습니다. 누가복음에 등장한 이 서로를 위한 축복의 메시지는 교회의 오랜 역사 속에서 계속 불러지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찬가(눅 1:46-55)’와 ‘엘리사벳의 노래(눅 1:39-45)’가 바로 그것입니다. 안셀름 그륀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천사가 전하는 하나님의 메시지에 마리아의 마음이 움직였다. 마리아는 산을 넘어 친척 엘리사벳을 찾아간다. 임신한 두 여자는 서로 인사한다. 그들이 만나 생명의 신비를 깨닫는다. 엘리사벳 안에서 아이가 기쁨으로 뛰놀았다. 그녀는 자신 안의 순수하고 훼손되지 않은 형상과 접촉한다. 마리아는 자기와 백성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행위를 노래하면서 찬미한다.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눅 1:48). 이 구절에 순박한 소녀가 내면에서 느낀 자기 신뢰가 담겨 있다. 마리아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큰일을 행하셨고, 자기를 크게 만드신 것을 안다. 마리아는 모든 가치의 전복을 노래한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63-164

 

우리가 성경의 이야기를 거리를 두고 보기 때문에 은혜롭게(!) 읽을 수 있지만, 사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굉장한 위험에 처한 이들이었습니다. 주위로부터 따사로운 시선을 받을 뿐만 아니라 죽음의 위기도 맞을 수 있었는데요. 나이가 많은 여성이 임신을 하였고, 혼인하지 않은 여인이 임신을 한 것입니다. 이는 당시 법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그보다 어떤 사회의 분위기와 도덕적인 기준에서 벗어났기에 이들은 위험에 처한 인물들이었습니다. 현대에서도 고운 시선을 보내기 어려운 상황인데, 당시 이 사건은 두 여인에게 엄청난 위험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린다 아로슈는 말합니다. 

 

마리아는 자기 비밀을 말할 수 있는 여자 엘리사벳을 만난다. 이런 사이는 오늘날 여자에게도 필요하다. 사회 규범에서 보면 두 여자의 임신은 옳지 않다. 엘리사벳은 너무 늙었고, 마리아는 혼인도 하지 않고 임신했다. 이 둘은 흔들렸고 의심했다. “난 어떻게 될까? 어떻게 해야 하나?” 이 물음이 둘을 결합시켰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서로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판단하지 않았다. 사회가 옳다, 그르다 정한 것에 따라 평가하지 않았다. 나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기 안에 새로운 생명이 자라고 있음을 느낀다. 둘은 자신의 내면을 나누었고,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에게 선한 일을 행하셨다는 사실을 새로이 알았다. 의심과 불안은 기쁨과 환희로 바뀌었다. 이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표현하며 살 수 있게 되었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64

 

서두에도 나눈 이야기지만,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의 유대는 더욱 돈독해집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그러했습니다. 린다 아로슈는 그녀들의 위대함은 ‘사회가 옳다, 그르다 정한 것에 따라 서로를 평가하지 않음’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졌을 때, 특히 내게 어떤 문제가 있다고 여겨졌음에도 누군가에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진다면, 그 둘의 유대는 더욱 돈독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힘으로 문제라고 여겨졌던 것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경계를 벗어난 사고는 불안하고 위태해 보입니다. 그러나 위험이 큰 만큼 깨달음도 클 것입니다. 

 

아들을 떠나보내는 마리아

 

지금 우리는 마리아가 경험한 이야기들을 순서와 상관없이 나누고 있습니다. 첫 번째 나눴던 이야기는 아들을 잃은 어머니 ‘마리아’가 겪은 어떤 ‘상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동정녀 마리아가 잉태했을 때의 어떤 ‘두려움’에 관해 이야기였습니다. 다음으로는 마지막으로 성장해가는 아들 예수를 ‘떠나보내는’ 어머니 마리아의 모습에 관해 이야기 나눠볼까 합니다. 

 

우리는 <1강 : 하와 이야기>를 나누며, 어머니의 중요한 과업 중 하나가 바로 아이를 떠나보내는 일이라고 이야기 나눴었습니다.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어머니는 생애 일부를 어린아이가 독립해서 마침내 그녀에게서 떨어져나가기를 바라는 소망에 바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안셀름 그륀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는데요. 그도 아이가 자신의 길을 가고자 할 때 떠나보내는 것은 어머니에게 가장 힘든 과제라고 말하며, 어머니는 떠난 아이가 돌아올 때 따뜻하게 맞아 주고 그들을 이해해 줄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었습니다. 

 

누가복음 2장 41-52절을 보면, 마리아와 요셉은 어린 예수를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다행히 다시 그를 찾게 되는데, 함께 예배를 드렸던 성전에서 어린 예수를 다시 찾게 됩니다. 하지만 성전에 있던 예수는 뭔가 이전과는 다른 느낌을 주었습니다. 낯선 존재, 뭔가 다른 존재 같았습니다. 그의 모습에서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닌 성인이 되어가는 예수,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청년 예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마리아는 바로 이 모습을 통해, 이제 예수를 떠나보낼 때가 옴을 직감합니다. 안셀름 그륀은 말합니다. 

 

아이가 있는 어머니는 마리아가 열두 살 예수를 통해 경험한 그 걱정과 거절이 무엇인지 안다. 그 나이에는 아이와 어머니 사이에 변화가 일어난다. 아들은 남자로, 딸은 여자로 성장한다. 그들은 자신의 것을 따라가기 위해 어머니에게 떨어져야 한다. 마리아도 다른 어머니들처럼 아들이 자기에게 속하지 않음을 경험해야 했다. 십자가에서 겪어야 할 이별을 거기서 연습하고 이해해야 했다. 어머니들만이 아니다. 모든 여자는 마리아가 그랬듯 자기가 돌보며 키우고 지킨 것이 자기 소유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자유롭게 놓아준다고 사람이나 어떤 일에 쏟은 사랑이 없어지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66

 

여성이 발견한 새로운 가능성

 

마리아는 자기 길을 가는 예수를 자신의 품에서 떠나보내게 됩니다. 우리가 ‘공생애’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그때를 가리킵니다. 이것이 마리아가 경험한 예수와의 ‘1차-이별’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마리아가 아들 예수를 정말로 떠나보내게 되는 것은 바로 십자가에서의 죽음일 것입니다. 이것을 ‘2차-이별’이라 불러도 좋을 듯합니다. 바로 이 ‘2차-이별’이 우리가 초반에 나눈 ‘피에타’ 이야기입니다. 이 부분은 다뤘었으니 넘어가고, 십자가 죽음 이후의 이야기를 나눠보려 합니다. 

 

어머니는 엄청난 슬픔 속에서 아들 예수의 죽음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예수는 어머니 곁을 그렇게 떠나갑니다. 하지만 예수는 어머니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한 명의 제자에게 어머니를 잘 모셔달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요한복음 19장 26-27절 말씀의 이야기인데요. 예수는 이렇게 말하죠. 

 

“예수께서는 자기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고 말씀하시고, 그 다음에 제자에게는 "자,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 때부터 그 제자는 그를 자기 집으로 모셨다.” (요 19:26-27)

 

여기서 우리는 이 제자를 ‘요한’이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세례 요한이 아닌 ‘예수의 제자 요한’인데요. 예수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계속 슬픔에 매달려 있지 말고, 자신을 향한 사랑을 제자 ‘요한’에게 주라고 부탁을 합니다. 마리아는 자기 아들에 관한 애정과 사랑을 어디로 흘려보낼지 결정해야 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쏟을 새로운 정체성을 추구해야 했습니다. 린다 아로슈는 말합니다. 

 

여자는 한 가지 일이 끝나면 마리아처럼 자신의 사랑과 힘을 쏟을 수 있는 새로운 정체성을 추구한다.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예수는 마리아에게 슬픔에 매달려 있지 말고, 사랑을 요한에게 계속 주라고 부탁한다. 여자는 자신의 생동성을 어디로 흘러가게 할 것인지 새롭게 결정할 수 있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68

 

너무 가벼운 예일 수 있는데요. 여성은 연애를 하다 헤어지고 다음 사람을 만나게 될 때, 그 사람이 마치 첫사랑인 것 마냥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렇게 하려고 의식해서라기보다는 여성들의 마음이 새로운 상황과 대상에 잘 적응 해나간다고 볼 수 있는 것이죠. 마리아는 아들 예수의 죽음 이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새로운 대상 혹은 새로운 방식을 선택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절망을 승화시킨 여성, 마리아

 

<6강>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 관해 이야기 나눠 봤습니다. 이 마리아의 모습에서 ‘변화시키는 여성’,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받아들인 뒤 새로운 결과물로 변화시키는 한 여성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여러 분들이 영상을 보시고 개인적인 연락이나 댓글로 자신들이 경험한 이야기들을 나눠주셨습니다. 그분들의 소감과 이야기를 들으며, 누구나 삶의 위기는 있어왔고, 누구나 현재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들을 이겨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사람이 언제 겸손해지나 생각해보니, 삶이라는 게 내 통제 밖에서 일어난다고 느껴질 때 조금이라도 겸손해지지 않나 생각해보게 됩니다. 잘 흘러가던 삶에 브레이크가 걸릴 때라야 우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마리아는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한 명의 ‘성인(聖人)’으로 여겨지는 분이지만, 당시를 살아갔던 마리아는 삶의 고통과 슬픔을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위대함은 절망의 순간을 승화시켰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녀는 고통 속에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희망을 추구하는 과정 중에 자신의 슬픔을 공유할 사람, ‘엘리사벳’을 만나게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 내게 주어진 삶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내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걷되, 위기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마십시오. 저도 저만의 길을 걸으며, 인생이라는 그 순례 길에 동참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

안녕하세요.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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