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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성서학당] 성경 인물의 빛과 그림자 : 막달라 마리아

20201126 청파교회 목요 <성서학당> : 성경 인물의 빛과 그림자

 

여왕과 야성녀: 막달리 마리아

 

 

위대한 사랑의 여자

안녕하세요. 일곱 번째 목요 <성서학당>을 시작하겠습니다. 일곱 번째 시간에는 ‘막달라 마리아’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안셀름 그륀은 그녀를 ‘사랑할 줄 아는 여자’라고 부르는데요. ‘오~ 사랑 좀 하는데?’라는 느낌이 드는 이 표현은 과면 무슨 의미인지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문학 작품을 보면, ‘사랑의 대가’ ‘사랑 좀 하는 인물’이 등장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특히 여성이 주인공이 되는 경우들이 있는데요. 이 위대한 ‘여성 사랑꾼들’은 그 작품을 접하는 독자들에게 영감을 주곤 합니다. 

저희가 다루고 있는 이 <여왕과 야성녀>에는 <죄와 벌>이라는 소설이 소개됩니다. 이 책은 러시아의 대문호인 도스토옙스키가 쓴 작품인데요. 이 책에는 ‘소냐’라는 여자가 등장해, 돌처럼 굳어버린 한 살인자의 마음을 녹입니다. 한 인물을 향한 그녀의 사랑이 도저히 열 수 없을 것 같던 살인자의 마음을 녹이게 된 것이죠. 

‘소냐’ 뿐만 아니라 ‘카말라’라는 여성도 있습니다. 카말라는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에 등장하는 여성입니다. 그녀는 극 중 인물이었던 싯다르타의 본능을 깨워주고 그를 성숙한 남자가 되게 도와줍니다. 이 외에는 파울로 코엘료의 책 <오자히르>에는 우리가 지난 시간에 다룬 ‘에스더’와 같은 이름인 ‘에스테르’라는 여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모티브가 된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한 달 후, 일 년 후>에 나오는 ‘조제’도 사랑하는 여성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본의 아니게,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과 책을 나열하게 됐는데요. 이 책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우리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이야기 때도 나누었지만, ‘사회가 옳다, 그르다 정한 것’대로 판단하지 않고 어떤 틀을 넘어 열정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한 인물들이었습니다. 이렇듯 도스토옙스키나 헤세, 코엘료, 사강 등의 저자들은 ‘매혹 시키는 여성’을 이야기의 중심으로 삼았습니다. 안셀름 그륀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세계 문학에서 위대한 사랑을 하는 여자는 수많은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에서 소냐를 위대한 사랑의 여자로 그린다. 그녀는 돌같이 굳은 살인자를 죽음에서 깨웠다. 사랑이 굳은 것을 녹여 물처럼 흐르게 했다. 사랑은 가까이할 수 없는 살인자를 한 인간으로 변화시켰다. 작가들은 사랑으로 사람을 매혹시키고 생명으로 이끄는 여자를 늘 찬미한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73

 

예수의 친구이자 연인 같은 마리아

성경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바로 이 ‘사랑하는 여인’으로 등장합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의 여자로 묘사한다. 여자들은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한다. 그녀는 열정적인 여자이고 사랑하는 법을 아는 여자다. 그녀는 예수의 친구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74

그녀는 성경에 일곱 귀신이 들렸다가 풀려난 여인으로 처음 등장을 합니다. 그리고 곧이어 예수의 무덤을 가장 먼저 찾아온 인물로서 예수 부활의 ‘첫 번째 목격자’로 소개가 됩니다. 이 막달라 마리아에 관한 수식어는 참 많은데요, 가장 대표적인 수식어는 바로 ‘예수님의 친구’입니다. 그녀와 예수님과의 관계에 관해 말하는 안셀름 그륀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나는 막달라 마리아를 누가와 요한복음서에 한정해 이야기하겠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길에 동행한 첫 번째 여자다. 그녀는 강한 여자였다. 그녀는 예수 곁에 있었다. 누가는 그녀에게서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갔다고 전한다. 예수는 그녀를 마귀에게서, 내적 분열과 소외에서 해방시켰다. 그녀는 본디 사랑할 능력이 있었다. 예수가 그 능력을 이끌어 주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 곁에 머무르고 싶었다. 예수는 그녀에게 존엄과 중심을 찾아 주었다. 그녀는 이제 자기 중심으로부터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새롭게 깨달은 사랑의 능력으로 예수를 사랑했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74

성경에 등장한 이 막달라 마리아를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두 개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의 제자이자 사도로서의 ‘막달라 마리아’이고, 두 번째는 예수님과 애틋한 감정을 나눈 여인 그래서 마치 예수님의 연인이자 친구 같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안셀름 그륀은 두 번째의 시선으로 마리아를 바라보는데요. 그래서 마리아를 자신의 상처 입은 영혼을 사랑해준 예수와 마치 ‘연인과 같은 관계’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영상을 시청하시는 분 중에 이런 시각이 불편한 분들도 계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연인이라는 사실이 뭔가 불경하게 느껴져서 그러실 겁니다. 하지만 새로운 무언가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이전에 붙들고 있던 생각과 관념들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을 좀 열어주시면 새로운 것이 유입되는 걸 경험할 수 있으실 겁니다. 어쨌든 우리도 이 두 번째 시각 ‘예수님과 막달라 마리아’를 연인이자 친구의 관계로 바라 볼 예정입니다. 안셀름 그륀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겠습니다.  

요한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무덤으로 제일 먼저 달려갔다고 전한다. 그녀가 첫 번째 부활을 목격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듯, ‘사도 중의 사도’(apostola apostolorum)가 되었다. 요한은 마리아가 무덤으로 달려가 부활한 예수를 만나는 장면을 사랑 이야기로 묘사한다. 두 연인의 사랑의 노래인 아가雅歌와 연결한다. 연인은 사랑을 즐기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놀라운 선물에 감사한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74-175

 

막달라 마리아의 슬픈 간절함

이제 성경 속 이야기를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막달라 마리아는 어두운 새벽, 예수의 무덤으로 향합니다. 자신의 영혼을 사랑한 그분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이런 경험 없으셨나요? 강의를 준비하다가 오래전 묵혀둔 기억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저는 첫 연애를 21~22살 때 했었는데, 정말 좋아했던 교회 누나와 첫 연애를 시작했었습니다. 어쨌든 제 마음과는 다르게 이별은 다가왔고, 아직 감정이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여자 친구와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때 새벽기도를 다니지 않고 있었고 평소 잠이 많은 편이었기에 새벽에 일어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이 답답하고 먹먹한 마음을 가눌 길 없어 그 새벽에 하나님께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혼자서 한참을 새벽 기도에 참석했던 기억이 났습니다. 정말 간절하면 ‘미명’에 움직이게 되더라고요. 

물론 제 이야기가 막달라 마리아 이야기와 견줄 수 없다는 것은 잘 압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자신의 영혼을 아끼고 사랑해줬으며, 자신 또한 사랑했던 예수가 죽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엄청난 슬픔이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그 아물지 않은 마음을 어떻게든 달래기 위해 동트지도 않은 이른 새벽, 예수님의 무덤으로 갔던 것입니다. 저는 마리아의 모습이 이처럼 그려졌습니다.

 

호명(呼名)됨과 떠나보냄

예수의 무덤에 도착한 마리아는 예수의 시신이 그곳에 없음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한 제자에게 달려가 말합니다. 누가 예수님을 무덤에서 가져갔는데,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다고 말입니다(요 20:2). 그리고 그녀는 한 번 더 이 물음을 던지는데요. 예수의 무덤 안에 있는 천사를 만났을 때도 누군가 예수님을 꺼내 갔는데, 대체 그분을 어디에 두었는지 알 길이 없다고 말합니다(요 20:13).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이 물음을 던지는데, 이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를 동산지기로 여기며, 만일 당신이 그를 옮겨 놓았거든, 어디에 두었는지 알려달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그를 모시고 가겠다며 말입니다(요 20:15). 

그때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마리아야!”하고 부르자, 그녀는 돌아서서 히브리말로 “라부니!”하고 응답합니다. ‘라부니’는 선생님 또는 스승님이라는 뜻의 히브리어입니다. 마리아는 그 예수의 음성에서 사랑을 느꼈습니다. 예수의 그 호명으로 막달라 마리아는 자기 내면에 있는 모든 슬픔이 사라지고 새로운 생명이 가득 차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자 마리아는 감동했습니다. 왜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유명 시도 있지 않습니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 그에게로 가서 나도 / 그의 꽃이 되고 싶다 / 우리들은 모두 / 무엇이 되고 싶다 /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意味)이 되고 싶다 
김춘수, <꽃>

호명(呼名)된다는 건 무채색 일상에 유채색이 입혀지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좀 내향적인 편이어서 신학교 다닐 때도 친하게 지내는 교수님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도서관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수강 중이던 한 수업의 교수님이 저를 알아봐 주신 겁니다. 교수님께서는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인품이 참 좋으신 교수님 같아서 가까워지면 좋겠다 싶었는데, 그렇게 알아봐주셔서 매우 기뻤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그 작은 사건 이후, 교수님에 대한 호감과 그 수업에 대한 애정도 올라갔었습니다. 

사람이 이러할진대, 자신을 알아봐 주고 따스하게 호명해준 예수님과의 만남은 얼마나 강렬했을까 싶은 겁니다. 호명된다는 건 생각보다 사람에게 미치는 힘이 큰 것 같습니다. 성경 이야기를 이어서 살펴보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호명하신 후,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자신을 붙들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 순간 마리아는 자신의 사랑이 변화돼야 함을 직감합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자기 사랑 안에 붙들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녀는 은연 중, 사랑하는 대상을 자기 곁에 두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여왕과 야성녀>를 읽어나가며 반복해서 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떠나보내는’ 이야기입니다. 물리적인 떠남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떠남도 중요한데, 애인이나 부부 혹은 자녀를 바라볼 때도 이 ‘떠남’은 중요하다고 말했었습니다.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관계에서도 이 ‘놓아줌’은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속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아가서를 중심에 두고

안셀름 그륀은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님’ 사이에 <아가서>의 이야기를 끌어들이는데요. 그래서 미리 말씀드렸듯이, 그는 이 두 인물의 관계를 마치 ‘연인’처럼 설명하고 또 묘사를 합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아가를 배경으로 막달라 마리아 이야기를 읽으면 그녀의 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 아가는 도덕적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사랑을 찬미한다. 그것은 신부와 신랑 사이의 자유로운 사랑이다. 그것이 놀랍도록 아름다운 그림으로 묘사되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달콤한 그대의 사랑, 그대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더 나를 즐겁게 한다. 그대가 풍기는 향내보다 더 향기로운 향기름이 어디 있느냐! 나의 신부야, 그대의 입술에서는 꿀이 흘러 나오고, 그대의 혀 밑에는 꿀과 젖이 고여 있다. 그대의 옷자락에서 풍기는 향내는 레바논의 향기와 같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문 잠긴 동산, 덮어놓은 우물, 막아 버린 샘.” (아 4:10-12)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76-177
막달라 마리아는 이 사랑을 예수에게서 체험했다. 요한은 아가에서 노래한 사랑을 예수의 부활에서 확증한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 사랑의 시샘은 저승처럼 잔혹한 것, 사랑은 타오르는 불길, 아무도 못 끄는 거센 불길입니다.” (아 8:6-7)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77

정경에 들어온 이 <아가서>는 신앙인들에게 늘 골칫덩어리입니다. 어떻게 읽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지가 고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같은 이야기를 나눌 때, 이 <아가서>를 한번 곁눈질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사랑 : 타인의 신비를 아는 것

안셀름 그륀은 ‘예수의 부활’이 죽음으로도 사라지지 않는 사랑을 묘사한다고 말합니다. ‘죽음을 이긴 사랑’ 같은 개념인데요. 그 사랑이 하나님의 ‘초월적 사랑’을 말하는지 아니면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 사이의 ‘연인과 같은 사랑’을 말하는지 확실히 알 순 없지만,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채 접근하면 좋겠습니다. 안셀름 그륀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를 하나로 결합한다. 죽음으로도 사랑은 사라지지 않음을 보여 준다. 사랑은 죽음을 이긴다. 죽음은 단지 변화시킬 뿐이다. 사랑은 매어 놓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자유로운 것이다. 타인의 신비를 아는 것이 사랑이다. 타인 안에는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속하지 않으며, 누구도 그 안으로 밀고 들어갈 수 없는 신비, 바로 하나님이 있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77

방금 한 이야기에 재미난 표현 하나가 등장했습니다. “타인의 신비를 아는 것이 사랑”인데, 그 ‘신비가 곧 하나님’이라는 말말입니다. ‘타인 안에 신비가 있다’라는 이 말이 저는 참 좋게 와 닿습니다. 우리는 평생을 살아도 하나님을 다 알 수 없듯이, 우리 사람 안에도 침범할 수 없고 그러나 존중받아 마땅한 것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관계가 언제 어긋나기 시작하는지 아십니까? 내가 그 사람을 다 안다고 생각할 때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할 때도 그렇고, 성경을 읽을 때도 그러하거니와 부부간이나 연인 간에 또 부모와 자녀 간에도 이 부분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내 안에 ‘신비’가 있듯이 타인에게도 그 안으로 밀고 들어갈 수 없는 ‘신비함’ 그리고 알 수 없는 ‘미지의 공간’이 있음을 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열정적인 여성,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는 열정적인 여성이었습니다. 특히 사랑에 그러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고매하고 위대한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일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이 하나님의 사랑인지 단번에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잘 모를 때는 빗대어 생각해봐야 하는데요.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었는데요.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신다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지금껏 살면서 열정적인 사랑을 해 보셨나요? 떠올려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뜨겁게’ 또 헤어짐이 너무 고통스러워 ‘절망적으로’ 사랑해본 적 있으신가요? 이러한 경험 없이 우리가 어떻게 연탄재를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안도현 시인은 당신은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냐며,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준 이 ‘연탄재’를 함부로 차지 말라고 했었습니다(안도현의 시, <너에게 묻는다>). 마리아는 열정적인 여성이었습니다. 안셀름 그륀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열정적인 사랑이 그녀를 예수에게 몰아댔다. 그 사랑은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냐고 세 번이나 묻는 고집스러움에서 나타난다. 그 열정은 그녀가 흘린 눈물에서 볼 수 있다. 그녀는 예수를 향한 사랑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77-178

누가복음 7장에는 눈물로 예수의 발을 씻긴 여인이 등장합니다. 예수를 집에 초대한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 여인을 ‘죄인’ 취급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핵심은 ‘죄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접속사에 그 핵심이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 죄인임에도 ‘불구하고’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죄인이라 여김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예수께 했던 행위 그리고 그녀의 마음이 어떤 상태였는지가 이 이야기의 중심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녀는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여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따랐습니다. 안셀름 그륀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누가는 죄인을 도덕적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녀를 죄인이라 불렀다. 누가는 그녀를 열정적으로 사랑한 여자라고 묘사했다. 그녀는 사회적 장애를 극복하고 바리새인의 집에서 열린 잔치에 들어가 예수의 몸에 손을 댔다. 그녀는 사람들의 선입견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마음을 따랐다. 그녀는 눈물과 향유로 자신의 사랑을 보여 주고자 했다. 예수는 행하도록 허락하며 그녀를 칭찬했다. “그가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눅 7:47)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78

 

칼릴 지브란의 ‘막달라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를 소재로 한 소설이나 영화도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 <최후의 유혹>에도 예수를 ‘연인의 마음’으로 사랑한 막달라 마리아가 등장합니다. 사실 누가복음 7장의 이야기에서 이 ‘죄인’을 막달라 마리아로 보느냐, 아니냐는 지금까지도 성서학자들 사이에서 계속되는 논쟁거리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그녀를 어떤 대상으로 보든 간에 그녀는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여인’의 관점에서 벗어나진 않습니다. 

<여왕과 야성녀>에는 레바논의 시인인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의 이야기 하나가 등장하는데요. 찾아보니 이 이야기는 그의 책 <사람의 아들 예수>에 나오는 이야기였습니다. 책에 등장한 이야기를 읽어드리겠습니다. 편하게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교재 p.180-182 읽기

 

한 사람이 자유하게 되면

칼릴 지브란이 한 이야기는 평소 우리가 잘 접하지 못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에는 마음이 닫히고 무너진 한 여인을 향한 예수의 섬세하고 따뜻한 사랑이 드러납니다. 안셀름 그륀은 두 인물의 만남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는데요. 읽어드리겠습니다. 

예수와의 만남으로 막달라 마리아는 사랑으로 받아들임이 무엇인지 경험한다. 예수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어떤 조건이나 소유를 주장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 그로 인해 그녀는 자유로워진다. 사랑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에서 벗어난다. 그녀는 이제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 자기가 어떤 사랑을 할 수 있는지 깨닫게 된다. 이제 자기 안에 붙들고 있는 것을 자유롭게 놓아준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서 받아들인다. 열정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82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것, 소유하려들지 않는 것, 있는 그대로 사랑하려는 마음은 막달라 마리아를 자유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얻게 된 ‘자유’는 그녀 자신에게만 좋은 일이 아니라, 그녀가 앞으로 만날 사람들, 그녀가 만날 타자들 또한 자유하게 하게 만듭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이 우리 안에 머물게 되면, 우리가 진리를 알 것이며, 이 진리가 우리를 자유하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요 8:31-32). 한 사람이 자유하게 되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 또한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렇기에 내가 먼저 바로 서는 것이 중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잘 돌보는 일이 우선시 돼야 할 것입니다. 

 

사랑 받고 싶은 원초적 욕구

여러분, 사람의 가장 근원적인 욕구는 ‘사랑 받고 싶은 욕구’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돈을 많이 벌고 싶은 마음,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은 마음,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고 싶은 마음 등은 불안을 낮추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은 마음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사람의 이런 심리적 욕구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요? 고개가 끄덕여지는 한 이야기가 있어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스위스의 소설가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은 그의 책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이라는 책에서 사람들이 왜 토라지는, 왜 삐치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그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토라짐의 핵심에는 강렬한 분노와 분노의 이유를 소통하지 않으려는 똑같이 강렬한 욕구가 혼재해 있다. 토라진 사람은 상대방의 이해를 강하게 원하면서도 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설명을 해야 할 필요 자체가 모욕의 핵심이다. 만일 파트너가 설명을 요구하면, 그는 설명을 들을 자격이 없다. ​ 
덧붙이자면, 토라짐의 대상자는 일종의 특권을 가진다. 다시 말해, 토라진 사람은 우리가 그들이 입 밖에 내지 않은 상처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로 우리를 존중하고 신뢰한다. 토라짐은 사랑의 기묘한 선물 중 하나다. ​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은행나무, p.87-88

그러니까 쉽게 말해, 우리가 흔히 삐친다고 할 때의 그 토라짐은 유년기의 경험에 그 뿌리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원인들도 있을 수 있지만, 저는 알랭 드 보통의 이야기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갑니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하는데, 자궁에 있을 때 우리는 말로 뭔가를 설명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고 말합니다. 모든 필요가 충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때그때마다 필요한 위안이 저절로 발생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처음 몇 년간 지속되죠. 우리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따로 알릴 필요가 없었습니다. 부모나 어른들이 모든 것을 가늠해줬습니다. 우리의 눈물과 우리의 혼란을 꿰뚫어 보고, 우리가 아직 말로 표현하지 못한 불편함의 이유들을 찾아내주었습니다. 

결국 ‘인간’이란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날 수밖에 없고 또 부모라는 대상을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말로 뭔가를 설명하지 않아도 기본적인 욕구가 채워졌던 부모로부터의 그 태초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성인이 된 뒤에도 따라다닐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평소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를 돌아볼 때도 아주 유의미할 것입니다. 

 

자기애 VS 이기심

이어서 안셀름 그륀은 말합니다. 그는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먼저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까지는 우리도 꽤 자주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어려운 것은 그 ‘자기 사랑’을 어떻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륀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사랑받고 싶고 자신을 사랑하고 싶다. 타인을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먼저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자신을 사랑함은 자기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자기를 배려한다는 뜻이다. 내 느낌과 고유함, 나를 살아 있게 하는 모든 것을 내 안에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83

안셀름 그륀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먼저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자기를 배려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자신을 사랑한다는 건 내 느낌, 내 감정, 내 안의 고유함을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기 사랑’은 ‘이기심’ 혹은 ‘자만심’과 혼동되기도 하는데요. 제가 자주 언급하는 사람인데,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그의 책 <사랑의 기술>에서 ‘자기애’와 ‘이기심’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자기애’인 것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덕이지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죄라는 신념이 널리 퍼져 있다. 나 자신을 사랑할수록 남을 사랑하지 못하며, 자기애는 이기심과 같다고 생각되고 있다. (생략) 만약 나의 이웃을 인간으로서 사랑하는 것이 덕이라면, 나 역시 인간이므로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악덕이 아니라 미덕이어야 한다. (생략) 나 자신이 포함되지 않은 인간 개념은 있을 수 없다. 나 자신을 제외하는 이론은 그 자체에 본질적인 모순이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성서의 말에 표현된 사상은 자기 자신의 통합성과 특이성에 대한 존경이 다른 개인에 대한 존경과 사랑과 이해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 자신의 자아에 대한 사랑은 다른 존재에 대한 사랑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문예출판사, 2014, p.82-83

에리히 프롬은 마태복음 22장 37-39절의 성경 이야기를 들며, 만일 ‘네 이웃’의 ‘이웃’이 보편적 인류나 인간을 뜻한다면, ‘나’ 또한 보편적 ‘인간’에 속하기에, 나를 사랑하는 것은 악덕이 아니라 바로 미덕이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과 우리 자신에 대한 사랑은 한 가지만 선택해야 하는 양자택일적인 것이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위의 책, p.84). 

‘이기적인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고,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을 위해 원하며, 주는 데서는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받는 데서만 기쁨을 느끼는 사람을 말합니다(위의 책, p.85). 하지만 ‘자기애적인 사람’은 좀 어려운 말로 사랑하고자 하는 대상의 성장과 행복에 대한 능동적인 갈망이며, 이 갈망은 자신의 사랑의 능력에 그 근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위의 책, p.84). 

‘자기 사랑’ 이야기를 하다 좀 멀리 와버렸습니다. 하지만 저도 요새 뼈아프게 느끼는 바이지만, 지금 우리가 이야기 나눈 이러한 이론들은 직접 실제 상황에 부딪치고 또 깨지면서 체득되는 것 같습니다. 수영을 백날 머리로 배워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실전이 중요합니다, 

 

나의 약함을 사랑으로 바라보라

우리가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어렸을 때의 경험을 새로 쌓을 수 있을 텐데 그럴 수가 없지요. 어렸을 때의 경험은 거의 평생을 가는 것 같습니다. 안셀름 그륀은 말하는데요. 

어릴 적에 부정적으로 평가된 자신의 특성을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에 대한 가치판단 기준으로 삼았다. 자기 불신, 시기, 조급함, 무능, 이런 것은 도움이 안 된다. 받아들인다는 것은 나의 약함으로 드러난 나를 사랑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 안에도 은총이 숨어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83

사실 완벽한 상황에서 자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부모는 처음 부모가 되어보았기에 깨달음과 반성은 사후에야 가능합니다. 누구나 그런 불완전한 부모 밑에서 자랄 수밖에 없었기에, 모든 사람은 취약한 부분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을 하나님의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려 애쓰는 것이고, 내 약함에 숨겨진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해내는 것입니다. 린다 아로슈도 에리히 프롬이 말한 (성장시키는) ‘자기애’적인 사랑과 비슷한 이야기를 전하는데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이다. 그에게서 그 사람만의 위대함을 성취할 수 있는 자산을 이끌어 낸다. 사랑하는 여자는 그의 결함보다 그 인격의 충만함을 본다. 그가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도 알고 있다면 사랑하는 여자는 침묵한다. 잘못을 지적하지 않는다. 그만의 방식으로 성장하도록 놓아둔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85

누군가를 바꾸려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은 사랑의 가장 어려운 단계인 것 같습니다. 담임 목사님이 자주 들려주시던 사랑 이야기가 있습니다. 최승호 시인의 <오징어 부부>가 바로 그 이야긴데요. 읽어드리겠습니다. “그 오징어 부부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부둥켜안고 서로 목을 조르는 버릇이 있다.” 우리는 조건 없이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사랑에 수많은 조건을 답니다. 이 오징어 부부처럼 말입니다. 린다 아로슈는 이어서 말합니다. 

여자들은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은 사랑에 수많은 조건을 단다. 상대방, 아이, 부모가 달라진다면 그들을 더 사랑할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 시선은 상대에게 결여된 것을 향한다.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상대방을 그대로 두지 못하고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갖는다. 끊임없이 그가 못하는 것을 지적하고, 그를 부족한 사람으로 몰아세우고, 그에게 자신의 문제를 전가한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84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안셀름 그륀은 ‘소유하려 들지 않고 통제하고 싶은 욕심에서 자유로운 사랑은 정말 어려우며, 사랑을 배우고 생명을 일깨우며 섬기는 일은 평생에 풀어야 할 과제’라고 말했습니다(p.184). 여러분, 늘 기억하세요. 조급해하지 말고 긴 호흡으로 한 걸음씩 배워나가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남성의 성숙과 여성의 성숙

사랑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개념이 바로 ‘인내’입니다. 성서도 그렇거니와 문학을 포함한 많은 고전에서도 이 ‘오래 참음’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사랑 ‘장’인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7)’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인내하고 기다린다는 개념과 떨어지기 어렵습니다. 

상대가 내 마음 같지 않거나 내 마음을 몰라주는 그 순간을 견디는 일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여성은 남성을, 남성은 여성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안셀름 그륀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여자들은, 여자가 전력을 다해 발전해 갈 때 남자도 여자의 발전에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좋겠다고 느낀다. 여자는 남자와 더 많이 나누고, 동등한 경험을 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남자는 자신의 감정 세계에 대해 나눌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남자는 질병이나 삶의 큰 변화를 겪으면 좀 더 성숙하게 된다. 이때 남자에게 그로서 존재하게 하고, 자신만의 시간을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여자에게 사랑이 필요하다. 또한 남자에게 그 자신은 소중한 존재이며, 함께 발전하기를 원한다는 신뢰가 필요하다. 여기서 여자가 채근하면 남자는 마음을 닫는다. 남자는 여자와 다른 자기 길을 간다. 사랑하는 여자는 이를 신뢰하고 시간을 준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87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서 남자의 성숙과 여자의 성숙은 기본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성의 변화와 성숙은 주로 내면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안에서부터 시작된 변화가 외부의 변화로 나타난다면, 남자는 외부의 상황이나 자신에게 발생한 어떤 사건을 통해 변화가 시작되고 그 변화가 내면으로 자리 잡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게 이 문법에 들어맞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부분을 이해할 때, ‘당신은 내 말을 전혀 듣지 않아’ ‘말해봤자 소용없어’라는 말은 서로가 조금은 덜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사랑은 자기희생이 아니다

한 가지만 더 다루고 마무리하려고 하는데요. 인내와 희생은 잘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갈 이야기> 때 나눈 이야기이기도 한데요. 사라와의 관계에서 하갈은 ‘희생양’ 역할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희생양 역할을 감당한 사람이 주위 사람에게도 그 희생의 역할을 강요하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주 빈번히 예수님의 희생과 자신을 동일시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희생하셨으니 우리도 예수의 희생정신을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예수님을 닮으려는 노력은 참 좋은 태도입니다. 아주 중요한 부분이죠. 하지만 잘 알고 실천할 필요가 있습니다. 안셀름 그륀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사랑이란 자기를 내어 주고 놓아주는 것이다. 사랑은 자기희생을 뜻하지 않는다. 타인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은 쓰다. 희생자는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타인을 내게 묶어 놓기 위해, 그를 위해 나를 희생한다.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은 그를 쉽게 놓아주지 못한다. 예수는 우리를 위해 죽음의 손에 자신을 맡겼다. 그의 희생은 성공했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의 희생과 그의 희생을 동일시하면 스스로에게 과도한 요구를 한다. 칼 융이 말했듯이, 어떤 원형과 자신을 동일시하면 자신의 희생 안에 감추어진 공격성을 보지 못하게 된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88

그륀은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은 그를 쉽게 놓아주지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저는 이렇게 이해해보는데요. 타인을 위해 희생함으로 자신의 존재를 느끼게 된다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희생하고 있는 그 대상이 없어지면, 나 또한 존재의 이유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 자유로운 관계가 아니라 종속의 관계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냉정하게 말해, ‘나 좋아라’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이런 희생은 어쩌면 상대와 무관한 희생일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자, 막달라 마리아

한 주 더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요 <성서학당> 일곱 번째 시간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오늘 ‘사랑할 줄 아는 여자’ 즉, ‘사랑하는 여자’ 막달라 마리아에 관해 살펴봤습니다. 그녀는 사랑에 열정적인 여성이었습니다. 사람들의 편견과 시선을 이겨내고 자신의 원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 용기 있는 선택이 예수님과 긴밀한 만남을 갖게 하였고, 새로워지는 구원의 감격을 체험하게 했습니다. 

우리의 내면을 살피면 살필수록 ‘인간의 복잡함은 참 끝이 없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 사람의 속이 이렇게도 깊고 오묘한데, 나와 다른 타인의 내면은 어떠할까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서로를 알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신앙을 ‘여정’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여겨집니다. 지속성과 끈기가 중요합니다. 

긴 호흡으로 하나님과 타인을 알려고 노력하시되, 때로는 이전 것을 단번에 끊어내는 결단도 필요함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주에 마지막 강의로 찾아뵙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

안녕하세요.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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