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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성서학당] 성경 인물의 빛과 그림자 : 마르다&마리아

20201203 청파교회 목요 <성서학당> : 성경 인물의 빛과 그림자

 

여왕과 야성녀: 마르다와 마리아

 

 

여주인과 예술가 자매

 

안녕하세요. 여덟 번째 목요 <성서학당>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늘로써 8주 동안의 강의가 마무리 됩니다. 10월 들어서서 시작된 강의였는데, 12월에 들어서야 마무리가 됐습니다. 어떤 분들은 8주가 짧다고 더 길게 해달라고 말씀하기도 하셨는데, 주위에 더 좋은 강의도 많이 있으실 테고,  담임 목사님의 강의를 비롯한 훌륭한 분들의 강의를 더 듣다가, 저와는 기회가 된다면 다시 그때 만나 뵈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마지막 시간으로 안셀름 그륀의 책 <여왕과 야성녀>에 등장하는 <13> chapter의 여인들, ‘마르다와 마리아’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일을 마치거나 외출하고 난 뒤, 집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무엇부터 하십니까? 일단 고단한 육신에 휴식부터 주십니까? 아니면 묵혀둔 집 안 일부터 시작하십니까? 물론 그날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사람은 일반적으로 정해진 어떤 패턴이나 습관대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취하게 되는 행동들이 있다는 말인데요. 사실 뭐 매일 다른 패턴을 취하는 것도 그리 건강한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행동들은 오랜 시간 배우고 (저절로) 훈련되어서 몸에 익은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기질처럼 부모와 어른들로부터 전해 받은 어떤 유전적 성향일 수도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서로 다른 유형을 지닌 자매였습니다. 한 부모의 배에서 나왔지만, 서로 다른 캐릭터를 가졌습니다. 둘 이상의 자녀가 있는 가족에게서는 아주 흔한 풍경이죠. 그래서 안셀름 그륀은 그들을 나누기를, 마르다는 ‘주인’의 성향을 지닌 여성으로, 마리아는 ‘예술가’의 성향을 가진 여성으로 구분했습니다. 저에게도 누님이 한 명 있는데, 비슷한 구석이 있긴 해도 확실히 다른 성향, 다른 기질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재밌는 사실은 이 서로 다른 캐릭터가 묘하게 서로 짝을 이룬다는 사실입니다. 안셀름 그륀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여자는 손님을 환대하는 여주인이다. 집에 맞이한 손님이 편하게 지내도록 대접한다. 자기 집을 아름답게 꾸민다. 또한 예술가이기도 하다. 환대하는 여주인과 예술가는 짝을 이룬다. 이 둘은 긴장 관계에 있기도 하다. 여주인은 자기 임무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반면, 예술가는 자기를 위해 시간을 쓴다. 예술가는 직관을 따른다. 창조적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기 위해 조용한 곳을 찾는다. 여주인과 예술가, 이 두 원형은 여자에게 내재한 능력과 만나게 한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201

 

경쟁하면서도 짝을 이루는 자매

 

여러분께서는 성격이 다를 때 서로가 더 끌리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그 반대라고 생각하십니까? 나와 너무 다른 성향의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꼴도 보기 싫고, 보기만 해도 하나하나가 다 마음에 안 드십니까? 저도 이 ‘끌림의 경향’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안셀름 그륀은 ‘여주인’ 성향인 마르다와 ‘예술가’ 성향의 마리아를 서로 경쟁을 하면서도 짝을 이루는 사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에 나온 ‘마르다&마리아’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리스인 누가는 여자의 기품을 특히 좋아한 복음서 저자다. 그는 손님을 환대하는 여주인과 예술가가 어떻게 서로 경쟁하며 또한 짝을 이루는지 아름다운 만남을 통해 보여 준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202
예수는 제자들과 길을 가다가 한 마을에 들어갔다. “그러자 마르다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었다. 마르다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다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하고 말하였다. 주님께서 마르다에게 대답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눅 10:38~42)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202

 

여자 안에 있는 두 측면

 

누가복음 10장의 말씀을 들으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가사 노동’, 즉 ‘집안 일’이라는 게 뭔가 저평가되는 느낌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 마리아를 보시고 좋은 몫을 택했다고 하셨기 때문에, 뭔가 마르다의 행동은 저평가되고, 마리아의 선택은 좋은 평가를 받는 느낌을 받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무 자르듯 너무 이분법적으로 나누지는 말아야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가진 이 두 성향은 한 여성 안에 잠재해있고 또 밖으로 드러나기도 하는 본질, 성향으로 보아야 합니다. 안셀름 그륀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누가는 대단한 이야기꾼이다. 단지 몇 마디로 이 두 자매의 성격을 소개한다. 여자들은 이 구절에 거부감을 느낀다. 자신들의 가사 노동이 평가 절하된다고 생각한다. 결코 그렇지 않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여자 안에 있는 두 측면이다. 그 둘은 여자의 본질에 속한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202

 

성실한 마르다의 내면

 

여러분은 지인들을 집에 잘 초대하는 편이십니까? 친구나 손님을 만나면, 자신의 집에 초대해 만나는 게 더 마음이 편하신 분이 계신가요? 오늘 누가복음의 말씀을 보면, 마르다는 ‘초대하는 여성’으로 등장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녀가 매번 아무나 다 집에 초대하는 사람이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만, 상상을 해보자면 마르다는 왠지 사람을 자주 집에 초대하는 여성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녀가 집에 들어가서 하는 행동들이 아주 자연스럽고 또 서슴없기 때문입니다. 

 

마르다는 환대하는 여성이었습니다. 고대에는 손님을 집에 재우는 것을 성스럽게 여겼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방인의 모습으로 찾아온다는 신념 때문인데요. 요즘은 이스라엘에도 이런 문화가 많이 없어졌겠지만, 개인적으로 보았을 때도 누군가를 서슴없이 집에 초대하고 재워주기도 하는 사람은 정말 대단하고 한편으로는 소중해보이기도 합니다. 이에 관해 말하는 안셀름 그륀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① 마르다는 손님을 환대하는 여주인이다. 고대에는 손님을 집에 재우는 것이 성스러운 일이었다. 손님 가운데는 이방인도 있다. 하나님이 이방인의 모습으로 찾아오기도 한다.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 이방인을 사람들이 어떻게 대하는지 보시고자 한다. 마르다는 예수가 편히 지내기를 바랐다. 그녀에게는 그것이 중요했다. 마르다의 시선은 예수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에 가 있다. 예수와 제자들을 위해 서둘러 음식을 장만한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203
② 그 행동에 사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마르다는 예수에게 훌륭한 여주인이라고 인정받고 싶었다. 다른 여주인과 경쟁했고, 그들과 비교해 이기고 싶었을 것이다. 마르다가 단순하게 자기 행동에 몰입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마리아에게 하는 행동을 보면 알 수 있다. 예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는 마리아에게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203

 

이 이야기를 들으면 좀 어떠십니까? 나도 이런 경우가 종종 있다는 생각 안 드셨나요?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 ‘동기’가 없는 경우는 드뭅니다. 특히 사람과 관계된 일을 할 때에는 보상의 심리, 인정의 심리가 작동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어쩌면 우리 삶의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이 ‘인정의 욕구’가 작동될 수 있습니다. 

 

마르다는 성실하고 착실한 여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집에 초대된 예수께서 편하게 계시기를 바랐습니다. 그녀는 배려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예수님께 인정받고 싶은 마음, 그런 사적인 마음(사심)이 없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마르다, 마리아에게 있는 여성성

 

안셀름 그륀은 마르다와 마리아를 여성 안에 있는 두 가지 측면으로 이해한다고 말씀드렸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위해 부지런히 대접하는 마르다는 ‘여주인’의 모습으로, 그리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예술가’의 모습으로 표현했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안에는 이런 ‘여주인’의 성향과 ‘예술가’의 성향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지요. 한 사람씩 그 성향을 살펴보면요. 

 

먼저 마르다는 자기에게 몰두한 여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손님의 필요보다 자신의 의무에 집중했습니다. ‘당연히 ~을 필요로 하시겠지’라고 여기며, 자신이 생각한 것을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의무감에서 나오는 섬김이 아님을 깨닫자 그녀는 실망합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손님의 말을 경청했습니다. 손님의 이야기에 먼저 귀 기울였습니다. 의무감이 강한 사람은 이런 마리아의 모습이 못마땅합니다. 불성실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관해 말하는 안셀름 그륀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① 이 두 여성성을 여자 안에 있는 두 측면으로 이해해 보자. 여자 안에 있는 마르다는 자기 행동에 몰두한 나머지 손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깨닫지 못한다. 손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대접한다. 손님에게 무엇이 적합한지, 실제로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보지도 않고 일을 시작한다. 기대했던 대로 인정받지 못하자 실망한다. 그녀는 손님과의 관계 속에 있지 않았다. 손님을 접대하는 안주인으로서 자기 의무에만 매달렸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203
② 마리아는 손님의 말을 경청했다. 마리아는 손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싶었다. 손님은 어떤 것을 가지고 온다. 그는 그 자신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하는 어떤 낯선 것을 가지고 온다. 누가는 마리아가 예수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들었다고 쓴다. 이는 고대부터 제자를 묘사할 때 쓰는 표현이다. (...) 마리아는 예수의 학생이자 제자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203~204

 

환대하는 ‘여주인 마르다’

 

누가복음 10장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은 마리아의 행동에 더 힘을 실어주고 있습니다. 듣는 행위를 더 긍정해주시는데요. 우리는 때로 혹은 자주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평소에 하던 행동을 멈춰야 할 때가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하는 행위가 좋은 일인지, 지금 꼭 필요한 일인지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 행위의 원천이 ‘내 기쁨’이 아닐 경우, 언제든 그만둘 수도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에서 놓치지 말고 계속 붙들고 가야 하는 부분은 마르다와 마리아는 서로를 보완 한다는 사실입니다. 안셀름 그륀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마리아가 없는 마르다는 맹목적이다. 그러나 마리아 또한 마르다가 필요하다. 마르다 없는 마리아는 행동하지 않고 듣기만 한다.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마르다를 편든 것은 의외다. 그는 마르다 없는 마리아는 자기 주변만을 맴돌 뿐이라고 말했다. 영성을 ‘기분 좋게 느끼는 것’으로 바꿀 수 있겠지만 그 영성은 나르시시즘에 빠질 수 있다. 마르다는 영적 길이 나아가야 할 방향, 즉 남을 돌보는 사랑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204~205

 

제가 느끼기에 사실 ‘여주인 마르다’와 ‘예술가 마리아’는 남녀를 떠나, 모든 사람 안에 있는 두 가지 욕구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우리 내면에는 행동하고 활동하려는 욕구와 쉼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여주인 마르다는 누군가를 대접하고 챙김으로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고, 예술가 마리아는 자가 안에 뭔가를 채움으로, 즉 휴식을 통해 창조적인 무언가를 생산해냅니다. 안셀름 그륀은 이를 잘 정리했는데요. 먼저 마르다에 관해 말하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누가는 마르다와 마리아를 통해 손님을 환대하는 여주인과 예술가의 원형을 보여 준다. 훌륭한 여주인인 여자가 많다. 그들은 손님에게 환대 받는다는 느낌을 준다. 고향 같은 느낌, 안정감, 편안함과 사랑을 퍼뜨린다. 손님을 환대하는 여주인은 집을 아름답게 꾸미고, 식탁을 환상적으로 예쁘게 차리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손님을 맞이하는 태도에서 손님을 존중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손님은 기꺼이 여주인의 영역 안으로 들어간다. 그곳이 사랑과 창조성으로 가득한 자리임을 느낀다. 여주인이 준비한 음식에서 사람들은 그녀가 얼마나 삶을 기뻐하며 지내는지 느낀다. 여주인은 생명을 선사한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205

 

저는 어렸을 때부터 뭔가를 그리고 또 꾸미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지금도 그런 편인데요. 제가 청파교회에 오고 저희 집에 목회실 식구분들이 심방 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집에 이것저것 꾸며 놓은 것을 보시고, 담임 목사님께서 별명 하나를 지어주셨습니다. ‘잔망스러운 사람(인간)’이었습니다. 목사님 눈에는 제가 집안을 꾸며 놓은 것들이 큰 쓸모는 없고, 지나치게 아기자기한 것들로 꾸며져 있는 것 같아 그런 별명을 붙여주신 것 같습니다. 물론 그 별명이 싫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평소 마르다처럼 손님을 잘 접대하는 사람들은 공간을 꾸미고 식탁을 정성스레 차리고 꾸미는 일 등을 좋아하곤 합니다. 그래서 그 공간에 오는 사람들은 자신이 환대받는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예술의 핵심: 놀이와 재미

 

그럼 이번에는 마리아에 관해 말하는 안셀름 그륀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누가는 마리아를 통해 예술가가 손님을 접대하는 여주인에게 언제나 동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자주 그 반대편에 선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예술가는 자기를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일만 할 수 없다. 창조적인 휴식이 필요하다. 예술가는 자신의 소리를 듣는다. 자기 안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일깨우는 낯선 이에게도 귀 기울여야 한다. 예술가는 자기 내면의 목소리, 직관에 귀 기울인다. 듣는 가운데 그 내면에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예술가는 생명의 신비, 마침내는 하나님의 신비를 표현하는 직관적 여자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205

 

여러분, 예술가는 어떤 사람을 말하는 걸까요? 우리는 평소 ‘예술’하면 어렵고 지나치게 우아하고 격식이 있어서 나와 동떨어진 것으로 여기곤 합니다. 하지만 미디어 예술가였던 ‘백남준’ 선생님은 예술의 핵심은 ‘놀이나 재미’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예술을 ‘장난감’으로 묘사합니다. 그에 관해 말한 오종우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백남준 예술의 핵심은 이처럼 놀이와 재미에 있습니다. 한 인터뷰에서 백남준은 자기 예술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모든 것이 장난감이에요. 비디오는 장난감이죠. 나 역시 장난감이에요. 내가 하는 모든 것은 게임이 되었죠. 나는 아기 TV예요." 예술이 지닌 상상력과 창조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엄숙한 자세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오종우, <예술 수업>, 어크로스, 2015, p.284

 

백남준 선생은 예술을 엄숙하고 무거운 태도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마리아가 그랬습니다. 그녀는 먼저 일에 몰두하기보다는 자기를 위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녀는 외부의 소리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채워갔습니다. ‘예술가’는 이러한 시간들을 통해, 새로운 생각을 떠올리고 또 열린 사고 속에서 하나님의 신비를 느끼는 사람인 것입니다. 

 

사소한 것에 무늬를 그려 넣는 예술

 

사람들은 누군가를 부러워하다 보니, 자기 안에 있는 새로운 가능성 혹은 잠재성을 놓치곤 합니다. 린다 아로슈는 우리 안에 예술가의 기질이 있다고 하는데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자기에게는 예술가적 기질이 없다고 하는 여자들이 있다. 그들은 예술이라고 하면 멋진 그림을 그리거나, 시를 쓰고, 음악을 연주하는 걸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도 일기를 쓰거나, 요리나 식탁 장식에 대해 말할 때, 홀연히 자기 안에 예술가가 있음을 느낀다. 어떤 여자들은 예술가적 측면을 펼쳐 볼 시간이 없다고 한다. 예술은 생산적이지 않다는 부모님의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그들은 좀 더 의미 있는 것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자는 예술가적 소질을 표현할 때 자기 안에 집중하고 몰입할 수 있다. 그때 새로운 힘을 모으고, 어려움에서 벗어난다. 자기에게 새로운 날개가 달린 듯하다고 느낀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206~207

 

여러분 안에는 예술가적 기질이 있으신지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으신가요? 아까 백남준 선생님의 이야기를 하며 오종우 교수의 책 이야기를 잠시 했었는데요. 오교수님은 그의 책 <예술 수업>에서 ‘예술은 사소한 것들에 무늬를 그려나가며 전체에 스며들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술은 정치혁명처럼 어떤 거창한 구호를 외치지 않습니다. 인간의 삶은 소소한 것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예술은 그 사소한 것들에 새로운 무늬를 그려나가 전체에 스며들게 하죠. 거창한 구호보다 큰 감동을 주는 작은 울림들로 세상을 움직입니다. 

오종우, <예술 수업>, 어크로스, 2015, p.77

 

그러니까 이렇게 본다면, ‘예술’은 삶에서 작고 사소한 것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냐와 상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그림이나 조각, 문학과 음악 등 여러 분야에 천재 예술가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아주 평범한 일상에도 이름 없는 수많은 예술가가 존재했고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예술은 존재 그 자체로 의미가 있지만, 예술은 사람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경탄이나 기쁨, 슬픔, 충격, 열정 등 예술은 그것을 창조해 낸 사람뿐만 아니라, 그것을 보고 경험하고 느끼는 사람에게도 어떤 식의 파동을 일으킵니다. 결국, 작고 소소한 것에 기울인 관심이 자신뿐 아니라 누군가를 변화시키게 되는 것이죠. 

 

얼마 전, 현빈&한지민 주연의 영화 <역린(逆鱗)>을 봤습니다. 혹시 보신 분 계시려나요? 평범한 대중 영화이기에 그리 깊이가 있는 영화는 아니지만, 역사를 배경으로 한 스릴러 영화가 보고 싶어 최근에 다시 보게 됐습니다. 영화는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갓 왕위에 오른 그의 아들 ‘정조’에 관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왕인 정조의 암살을 둘러싸고 살아야 하는 자와 그를 죽여야 하는 자 그리고 살려야 하는 자들의 엇갈린 운명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엔딩 장면에도 나오는 대사이지만, 계속 반복하여 나오는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용 23장>의 이야기인데, 읽어드리겠습니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바뀐다. 온 정성을 다해 하나씩 배워간다면. 세상은 바뀐다.” (중용 23장)

영화, <역린>의 대사 

 

‘중용(中庸)’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쓴 글이고, 사서(四書) 중 하나라고 전해집니다. 저는 영화에 등장하는 이 <중용 23장>의 이야기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마치 이 말은 <마태복음 25장 14~30절>의 ‘적은 일에 충성된 종’ 이야기의 풀이처럼 느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비유를 드시며, 자신에게 맡겨진 일이 적었지만 그래도 성실히 임한 종에게 칭찬을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더 큰 일을 맡기겠다고 하셨습니다. 

 

‘중용(中庸)’ 이야기는 마치 작은 일, 적은 일에 충성했을 때 그 일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파동과 결과를 만들어내는지 설명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예술가는 일상의 작고 소소한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관심이 결과적으로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단초가 된 것입니다. 

 

예술이 없는 삶은

 

지금 우리는 마리아가 예수께 칭찬받았던 그 맥락을 계속 살펴보고 있는데요. 그 관점을 ‘예술가’의 관점이라고 말했었습니다. 여러분, 내 안의 예술가적인 기질, 예술가의 성향을 발견하고 또 그 삶을 살아내는 게 왜 필요할까요? 린다 아로슈는 그렇지 않을 경우, 삶이 메말라가고 기쁨이 없으며, 삶 자체를 즐기기보다 의무와 능률만 따지게 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사람 자체가 경직되고 계속 무거운 마음으로 살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죠. 그녀는 말하는데요. 

 

예술가의 측면은 가벼운 것, 노래, 춤, 자신에게서 벗어나 감각으로 표현하는 즐거운 것이다. 예술가는 삶에 색을 입힌다. 일을 쉬거나, 자유로울 수 있으며, 다른 사람에게 삶의 기쁨을 전염시킬 수 있다. 예술가는 이 기쁨으로 무거운 삶과 가벼운 삶의 균형을 맞출 수 있다. 예술가가 없으면 우리 삶은 메마르고 기쁨이 사라지며, 의무만 남고 능률만 따지게 된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207

 

예술가가 되는 고난의 길

 

저는 계속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 안에 있는 다채로운 것, 즉 갖가지 욕구와 본능, 욕망을 많이 느끼면 느낄수록 사람과 삶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의 폭도 넓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하지만 많이 느끼는 것과 동시에 주어지는 것은 ‘고통’입니다. 많이 느낄수록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순 있지만, 그만큼 깨달음을 알아가는 과정이 고통스럽습니다. 거저 주어지는 깨달음은 없습니다. 왜 우스갯소리로 그런 말도 하지 않습니까. ‘커피의 쓴맛이 달게 느껴질 때라야 진짜 어른이 되는 것 아닐까’라는 말말입니다. 쓴 맛이 좀 달콤해져야 성장하는 건 아닐까요? 

 

린다 아로슈는 내면의 예술가적 측면과 만나면 내 안에 얼마나 많은 ‘끼(재능)’가 있는지 알게 되고, 그뿐 아니라 그 능력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지도 알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여자가 자기 내면의 예술가 측면과 오래 접촉하면 얼마나 이 능력을 모르고 있었는지 깨달을 것이다. 이를 통해 여자들은 자기 안에 얼마나 많은 끼가 있으며 그것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지 말한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208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표출하고 싶었지만, 눈치 보느라 체면 차리느라 나이를 생각하느라 꾹꾹 눌러 놓았던 ‘끼’같은 것 없으십니까?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이제라도 해볼 수 있는 건 꼭 해보시기를 응원합니다. 

 

예술: 현실도피&현실적

 

안셀름 그륀은 예술가를 삶의 기술자로 묘사했는데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죠. 

 

예술가는 자기 삶을 잘 만들어 가는 기술을 아는 여자다. 삶의 기술에 능하다. 상황이 썩 좋지 않을 때도 생의 기쁨을 누린다. 삶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삶의 기술자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208

 

괴테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세상에서 해방되는 데 예술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또한 세상과 확실한 관계를 맺는데에도 예술을 통하는 것이 가장 좋다." (괴테)

오종우, <예술 수업>, 어크로스, 2015, p.280

 

예술은 경직된 일상에서 거리를 두게 해주고 또 반대로 현실을 정말 제대로 바라보게 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예술가는 자기 삶을 아름답게 가꾸어갈 ‘삶의 기술자’들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예술만큼 정말 어느 것보다 현실 도피적이며 또 반대로 현실적인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술의 ‘치유하는 힘’

 

하지만 명(明)에는 암(暗)이 있기 마련입니다. 예술가가 갖는 장점도 많지만, 그가 갖는 어두운 면도 있습니다. 늘 스스로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데요. 린다 아로슈는 예술가의 부정적 측면 중에 자기를 과장하고, 감동을 인위적으로 만드는 면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술가의 부정적 측면은 자기를 과장하고 감흥을 인위적으로 만들 때 나타난다. 예술가는 히스테리를 부릴 위험이 있다. 마음에서 익은 것을 묘사하기보다 자기를 광고하는 데 급급하다. 자기를 잘 팔아야 한다. 괴로울 것이다. 참된 예술가는 자기를 잊는다. 자기를 표현하려 하지 않는다. 존재의 신비를 표현한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209

 

그래서 ‘참된 예술가’는 자기의 몸집을 부풀리기보다, 자기 자신을 잊고 ‘있음 그 자체’의 신비를 표현합니다. 

 

그런데 평소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는 사람이 내 안에 있는 예술가적인 면모를 끌어내고 또 발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방금 말씀드렸듯이, 예술적인 감각이 깨어나고 표현되기 위해서는 고통의 경험이 필요합니다. 필요하다기보다는 삶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이를 경유해야만 합니다. 참 예술, 참된 예술가적 삶은 자기 안에 있는 모순을 발견하고, 그 고통을 감수하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 철저한 자기 신뢰 속에 예술이 일상에 표현될 때, 예술은 자신과 또 그 작품과 만나는 사람들을 치유하게 됩니다. 안셀름 그륀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예술이 늘 쉽고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우울증으로 괴로울 때 창조적 에너지를 내뿜는 예술가가 많다. 그러나 우울함에 빠져 있지만은 않는다. 그것을 잘 다듬는다. 예술가는 고통의 경험을 이끌어 표현 능력에 집중한다. 자기 안에 있는 어둠, 무질서, 혼돈을 표현한다. 그 예술은 자신과 그 작품을 만나는 사람을 치유한다.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치유의 과정이다. 부정적 감정에 휩쓸려 자기를 잃지 않고 어둠과 부정적 에너지를 잘 다루어 흐르게 한다. 흐르는 것은 굳은 것을 변화시키고 치유한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209

 

저는 직접 경험해보진 못했지만, 러시아 출생의 미국인 화가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작품이 생각났습니다. 그의 그림은 미국 텍사스 휴스턴에 있는 ‘로스코 채플’에 있는데, 그의 그림은 심플하고 정적이지만 경건함이 느껴지는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작품 앞에 오래 머물면 그동안 살피지 못한 자신과 조우하게 됩니다. 이 작품은 자기 안에 있던 고통과 신음, 고뇌를 꺼내주며 그동안 묵혀뒀던 슬픔과 마주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슬픔이 밖으로 터져 나오게 되는 것이죠. 이 ‘마크 로스코’의 작품은 예술이 치유가 되는 과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됩니다. 

 

자기 내면을 표현할 것

 

이렇게 말씀드리니 예술가에 대한 이미지가 더 멀게 느껴지시나요? ‘예술’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누군가와 비교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표현하는 것이기에, 즐겁고 재밌게 표현하기만 한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린다 아로슈는 말합니다. 

 

우리의 창조성은 내적 풍요로움이고, 우리는 언제나 거기에서 길어 올릴 수 있다. 유명해지고 찬사를 받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자신의 깊은 내면과 결합해 감각적이고 재미있게 그 내면을 어떤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209

 

예술은 곧 ‘나’와 동떨어진 개념이 아님을 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리아: 예술가의 한 표본

 

목요 <성서학당> 8강을 정리합니다. 오늘 우리는 목요 <성서학당> 마지막 시간으로 ‘마르다와 마리아’에 관해 이야기 나눠 봤습니다. 집주인으로서의 마르다와 예술가로서의 마리아는 우리 안에 있는 두 가지 모습인 동시에, 두 성향은 서로를 보완한다고 말씀드렸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마리아의 태도를 좀 더 긍정한 예수님의 이야기를 통해, 마리아가 가진 ‘예술가적 특징’에 관해 살펴봤습니다. 

 

의무보다 자신이 하고 싶고 원했던 것을 선택한 ‘마리아’, 예수님의 발치에 가 그분의 말씀을 듣기 원했던 ‘마리아’는 예술가의 한 표본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작고 소소한 것에 관심을 갖는 예술가는 능률과 효율을 따지기보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슬픔을 치유하는 힘이 있는 자입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예술가’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능력에 계속 물을 주시기 바랍니다. 

 

<여왕과 야성녀>를 마치며

 

우리는 작년에 이어, 안셀름 그륀의 책 <여왕과 야성녀>를 주교재로 정해 함께 읽고 배우며 또 자신을 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부족한 이야기를 시청해주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부족하고 때론 제멋대로의 해석으로 불편함을 느끼신 분들도 있으신 줄 압니다. 사실 성경을 해석하고 인물을 바라보는 관점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도 합니다. 담임 목사님은 그래서 성경을 ‘주름진 텍스트’라고 하기도 하셨죠. 무엇을 말하려나 시대적인 눈을 갖고 매번 다시 읽어봐야 하는 거죠. 

 

우리는 분석심리학을 공부한 ‘안셀름 그륀’의 관점으로 성경 이야기를 해석했고, 그 가운데 성경의 ‘여덟 여성 인물들’을 다뤄봤습니다. 결국, 읽고 배운다는 건 자신을 돌아보기 위함이고, 이는 반드시 실전에서 겪고 시험해봐야 진짜 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용기를 내서 하나씩 시도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이제 이 부분은 개인적인 이야기인데, 어쩌다 보니 유튜브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여덟 강의는 계속 제 유튜브에 남아 있을 예정입니다. 이 목요 <성서학당>을 마치면, 개인적으로 관심 있는 분야를 가끔 찍어서 올려보려고 합니다. 제가 좋아한 책이나 영화, 장소 등을 나눠 보고 싶은데요. 그래서 계속 이 채널을 구독하실 분들은 쭉 구독해주시고 또 ‘이제 됐다’ ‘구독을 끊어야겠다’하는 불편하신 분들은, 더욱 더 계속 구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동안 함께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

안녕하세요.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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