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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성서학당] 성경 인물의 빛과 그림자 : 에스더

20201105 청파교회 목요 <성서학당> : 성경 인물의 빛과 그림자

 

여왕과 야성녀: 에스더

 

 

성서학당

 

안녕하세요. 다섯 번째 목요 <성서학당>을 시작하겠습니다. 혹시 영화 <관상> 보셨습니까? 배우 송강호 씨와 이정재 씨가 나오는 한국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얼굴만으로 사람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는 한 권력자의 관상을 통해 그의 역모를 알아채고 나라의 운명을 구하게 되는 내용입니다. 스포일러를 해버렸네요. 이 영화를 보면 수양대군 역할을 한 이정재가 이런 대사를 합니다. 유명한 대사인데요. “어찌 내가 왕이 될 상인가?” 이 대사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왕 이야기를 하려고 <관상> 이야기를 드렸는데요. 여러분께서는 혹시 왕이 되고 싶으셨던 적 있으신가요? 부와 권력을 가진 왕을 한 번쯤 꿈꿔보신 적 있으십니까? 너무 터무니없습니까? 베드로(벧전 2:9)는 이미 여러분을 보고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이미 ‘왕과 같은 자’인 것입니다. 

 

왕은 부와 권력을 가진 자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이야기는 이 ‘왕’과 관련된 다시 말해, ‘에스더’의 모습에 담긴 ‘여왕’의 면모에 관한 것입니다. 미리 말씀드리면, 안셀름 그륀은 이 ‘여왕(왕)’에게 있는 ‘부와 권력’에 관심을 가지기보다 왕이 가진 품격, 즉 한 사람의 ‘존엄’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먼저 안셀름 그륀의 이야기를 들어보시죠. 

 

여왕의 원형에 여자들의 눈은 번쩍 뜨인다. 여자들은 여왕을 자기 안에 들이고 싶어 한다. 여자를 왜소하게 만드는 역할로 몰아대는 남자들 때문에 여자들은 괴롭다. 여자는 자기 안에 여왕이 있음을 느낀다. 그러나 여왕은 여자 안에 감춰져 있다. 여자는 자기 내면에 여왕의 자리를 내어 줄 용기가 없다. 사회가 여자에게 부여한 역할, 즉 가정부, 어머니, 친절한 판매원, 조력자, 연인의 역할에 매달린다. 여자는 뒤로 물러나 있으려고 하고 자기 진가를 드러내지 못한다. 여왕은 여자에게 자립, 가치, 자유를 준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39-140

 

여기서 여왕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인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왕이라는 직업과 역할에 관한 것을 말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핵심은 왕이 지닌 태도, 즉 ‘자립, 가치, 자유’에 관한 것입니다. 

 

자립적인 인간

 

여러분은 자립(自立)적인 사람이십니까? 저는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자립적인 사람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나이를 먹으면 자연히 그렇게 되는 줄 알았습니다. 물론 자신이 맡은 역할이나 상황 때문에 자립하는 사람이 되어갈 순 있지만, 이 시간을 통해 우리가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그저 ‘주어진 대로 살아가면 자립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가’입니다. 

 

사실 먼저 이런 질문부터 드렸어야 했을 텐데요. 여러분께서는 자립적인 사람이 되고 싶으십니까? 물론 사람은 아무리 발버둥 치고 또 잘난 사람이라고 해도, 혼자만의 힘으론 세상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내 곁에 있어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동료나 이웃에게 의존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 ‘사람’입니다. 

 

담임 목사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립한다는 것’은 목발 없이 걷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어쩔 수 없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항상 기대어 살수만은 없습니다. 자신이 제대로 서야 내 곁에 있는 사람도 온전히 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립이 주는 가장 긍정적인 효과는 바로 내가 내 삶을 더 알차고 명랑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립이 주는 영향력

 

자립한 사람은 주위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도 한 번 소개해드린 사람인데, 독일의 여성 철학자 나탈리 크납은 그녀의 책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에서 자립한 부모가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녀는 인간은 무엇보다 ‘모방’을 통해 관계를 배워가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세상에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를 배운다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의를 주고 설교하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세계에 대해 독립적이고, 신뢰가 강하고, 생동감 넘치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은 도움이 된다. 

부모가 밤에 여러 시간 수동적으로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거나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이나 들여다보지 않고, 열정적으로 책을 읽고 운동을 하고 외국어를 배우고 친구들에게 맛난 음식을 대접하고 프라모델을 만들고 정원을 가꾸고 낯선 문화를 발견해나간다면, 그들은 아이들에게 자신의 관심사가 있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밖에 어른들은 사춘기를 겪는 아이들이 인격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열린 대화 상대자가 되어주어야 한다. 청소년들이 방황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동안 어른들의 감정적, 정신적 자립과 진정성 있는 태도는 아이들에게 발판이 되어 준다. 

나탈리 크납,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 어크로스, 2016, p.98

 

비단 자립적이거나 자기 삶을 추구하는 사람의 영향력은 청소년에게만 영향을 끼치는 건 아닙니다. 주위에 있는 이들은 어떤 식으로든 자립이 주는 영향을 받게 됩니다. 한 사람의 자립은 이렇게 영향력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립적인 신앙인, 주체적인 신앙인은 하나님과 더 건강한 관계를 맺습니다. 하나님께 너무 의존하거나, 반대로 너무 자기 멋대로 하려는 신앙의 모습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마음을 잘 알아차리는 직립의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왕비가 된 에스더(에스테르)

 

‘자립’에 관해 이야기하다 너무 멀리까지 왔는데요. 왕은 이 ‘자립심’ 외에도 ‘가치’와 ‘자유’도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합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 이야기들에서 더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함께 나눌 성경의 인물은 ‘에스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책에는 ‘에스테르’라고 되고 있는데, 이는 발음상의 차이이니 에스더와 에스테르는 동일 인물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성경 이야기를 잠시 살펴보면요. 에스더는 어릴 적, 부모님을 여윕니다. 그래서 그녀는 삼촌인 ‘모르드개(모르도카)’의 손에서 자라게 됩니다. 그런데 이 모르드개는 이스라엘이 아닌 페르시아의 왕국에 살고 있었는데요. 이 시기는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 이어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입니다. 

 

에스더를 왕궁으로 데려온 사람도 그녀의 삼촌 모르드개였습니다. 당시 페르시아는 ‘아하수에로’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왕은 자신을 실망시킨 왕비 ‘와디스’를 대신해, 새로운 왕비를 뽑는다는 어명을 내립니다. 그래서 에스더도 다른 여성들과 함께 왕궁으로 들어갑니다. 왕궁에 들어온 여성들은 열두 달 동안 몸을 가꾸었습니다. 그리고 이 기간이 끝나면 한 명씩 왕궁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리고 왕이 마음에 들어 하면 그 여자를 다시 불렀습니다. 에스더는 삼촌 모르드개의 충고에 따라, 유대 사람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감춥니다. 에스더도 왕비가 되고 싶었습니다. 에스더는 실제 왕의 총애를 받게 됩니다. 왕은 그녀를 몹시 마음에 들어 했고 그녀에게 왕관을 씌워 왕비로 삼게 되죠. 

 

에스더 이야기

 

그때 ‘하만’이라는 자가 등장합니다. 그는 아하수에로 왕이 등용한 사람이었습니다. 왕은 그에게 큰 벼슬을 주고 다른 대신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힙니다. 하만은 왕의 모든 종이 자기 앞에 무릎을 꿇고 절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에스더의 삼촌 모르드개만은 그의 명령을 듣지 않습니다. 왕의 시종들은 하만에게 그가 유대 사람이기 때문에 절하지 않는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하만은 전역에 있는 유대 사람들을 몰살시킬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왕에게 유대 사람을 전멸시켜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에스더는 이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녀는 충격을 받고, 슬픈 마음에 화려했던 의복을 벗고 고뇌와 슬픔의 의복을 입은 채 며칠을 보냅니다. 

 

그녀는 왕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왕 앞에 나아갑니다. 이것은 엄연한 위법이었습니다. 그녀는 비장했습니다. 폐위가 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자신의 민족을 구하고 싶었습니다. 왕은 에스더를 여전히 아꼈습니다. 그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줍니다. 에스더는 자신이 여는 연회에 왕과 하만을 초대합니다. 그녀는 그렇게 두 번의 연회를 엽니다. 그리고 그 두 번째 연회가 있던 날, 왕이 에스더에게 소원이 무엇인지 묻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민족을 살려달라고 청합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와 내 겨레가 팔려서, 망하게 되었습니다. 살육 당하게 되었습니다. 다 죽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남종이나 여종으로 팔려가기만 하여도, 내가 이런 말씀을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만한 일로 임금님께 걱정을 끼쳐 드리지는 않을 것입니다.”(에 7:4) 왕은 누가 감시 그런 일을 하려는지 묻자 에스더는 하만을 가리킵니다. 그러자 왕은 하만이 모르드개를 매달기 위해 세워둔 장대(말뚝)에 그를 세우게 합니다. 그런 다음에야, 왕의 분노가 가라앉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간단히 알아본 ‘에스더’의 스토리입니다. 

 

위기 속에 꽃피는 가능성

 

에스더는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녀는 삼촌 모르드개로 인해 자신의 진정한 사명(에 4:14)을 깨달았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여왕의 위엄을 간직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없는 소녀 에스더가 위엄을 발하게 된 것이죠. 민족을 구원할 용기 있는 여왕이 된 것입니다. 

 

사실 내 안의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거나, 왕과 같은 면모가 있는지 깨닫기 위해서는 ‘위기의 순간’이 필요합니다. 평온한 일상에서 자신의 내면에 감춰진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에스더는 부모님을 일찍 여의게 되는 ‘한 번의 위기’와 왕비가 된 뒤에 동족을 포함해 자신도 죽을지 모르는 ‘또 한 번의 커다란 위기’를 경험합니다. 이렇듯 새로운 가능성이나 혹은 내 안에 숨어 있는 또 다른 면모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위기와 고난은 어쩌면 필수 요소인지도 모릅니다. 솔직히 사람이 그렇지 않습니까. 좋을 때보다 어려움이 왔을 때, 더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 말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풀어야 할 영원한 숙제인 것 같습니다. 

 

권력이라는 욕망

 

정말 여러분은 여왕(왕)이 되고 싶으신 적 없으십니까? 이렇게 물으면 답하기 쉽지 않으실 겁니다. 린다 아로슈는 이 질문에 관한 여성들의 반응이 나뉜다고 하는데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시죠. 

 

세미나에 참석한 여자들은 여왕의 상에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그들 중 대다수가 처음에는 이 상에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여왕은 피곤하고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매력을 느끼며 여왕처럼 느끼고 싶다고 말한다. 여자들은 여왕의 상에 빠져들수록 그 여왕에게 자기 내면의 자리를 더 내어주고 싶어 한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42

 

왕 혹은 여왕에 대한 이미지는 서 있는 자리에 따라 달라집니다. 타자로서의 왕은 불편한 존재입니다. 그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왕의 입장에 서게 된다면 생각이 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물론 왕의 역할이 몇몇 사람들의 말대로 피곤하고 자유롭지 못한 역할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저도 왕 혹은 여왕의 역할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피곤해지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왕이 지닌 이 ‘권력’은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욕망’ 중 하나입니다. 나는 안 그렇다는 분 손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사실 인식하지 못할 뿐이지 우리 안에는 힘을 발휘하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잘 와 닿지 않는 분들은 한번 자녀와의 관계를 떠올려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아니면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이나 여러 인간관계를 떠올려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가족 혹은 자녀나 (구조나 상황적으로) 나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 우리는 자신도 모른 채, ‘힘’을 발휘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저도 늘 경계하는 부분이지만 실패하고 넘어지고를 반복합니다. 완벽한 사람은 없기에, 중요한 사실은 자신의 이런 성향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죠. 내가 그렇다는 것을 알고만 있어도 어느 정도 조심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존중하십니까? 

 

어쨌든 오늘 이야기에서 말하는 여왕의 면모는 이 부정적인 ‘권력욕’과 관련된 것은 아닙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면, 여왕이 지닌 ‘자립과 존엄, 자유’와 같은 것을 말한다는 걸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린다 아로슈는 다음 대목에서 여왕은 ‘자신의 존엄을 아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여왕은 우리를 위엄과 자기 존중으로 이끈다. 또한 삶을 책임지게 한다. 여왕은 자신의 존엄을 안다. 그 존엄은 다른 사람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왕은 자신의 가치를 의식하며 자기 가치가 다른 누구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중에서 나온다는 것을 안다. 여왕은 자기를 존중하며 타인의 가치를 존중한다. 여왕은 자신과 자신에게 있는 능력, 자기가 내린 결정, 자기가 행한 일에 책임진다. 자기를 책임지는 것이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43

 

여러분께서는 여러분 자신을 잘 존중하는 편이십니까? 사실 정말 견디기 어려운 것은 누군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느끼는 경우입니다. 살다 보면 대놓고는 아니어도 은근히 무시당하는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린다 아로슈는 내 안에 ‘왕 됨’을 인식하는 사람은 견디는 힘과 평정심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자가 자기 내면에 여왕을 인식하면 힘과 평정심을 얻는다. 누군가 나를 비하하고 웃음거리로 만든다고 내 안에 있는 여왕에게까지 상처 주지 못한다. 그런 것으로 내면의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는다. 자신의 내적 가치가 침범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주는 상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상처를 인식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자기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생략) 여왕은 스스로 결정하며, 다른 사람의 문제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3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누군가 자신을 무시할 때 그것을 견디는 일은 말입니다. 기독교 작가 페터 제발트도 “남이 나를 무시하는 것 같을 때 조용히 견디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최대의 도전”(<사랑하라 하고 싶은 일을 하라>, p.47)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존중하는 사람, 자신의 존엄을 아는 자는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흔들려도 제자리로 잘 돌아올 수 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을 신뢰하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고 고유한 자신의 가능성을 알아준다면 흔들릴지언정 넘어지진 않을 것입니다. 

 

홀로 자기 방에 머무는 시간

 

가끔 사람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당신은 혼자 있을 때와 함께 있을 때 중, 언제 에너지가 채워지냐고 말입니다.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더 기운이 나는 사람과, 기운을 차리려면 혼자 있는 시간이 중요한 사람을 구분하며, 외향적인 사람, 내향적인 사람을 가리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십니까? 하지만 사람의 유형을 떠나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건 삶에 있어 아주 중요합니다. 특히 갈등을 겪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한데요. 린다 아로슈는 말합니다. 

 

내 세미나에 참가한 여자들은 갈등 상황에 있을 때 의식적으로 여왕의 태도를 취한다고 했다. 이들은 자기 존중과 존엄을 느끼려고 이러한 태도를 취한다. 그러기 위해 혼자 있는 시간을 갖는다. 혼자 있는 시간에 그들 안에 있는 어떤 것을 바꾸어 놓는다. 그들은 자신의 내적 존엄과 결합한다. 다시 당당히 일어나 새로운 평정을 느낀다. 여자에게 당당히 선다는 것은 다른 해결책을 볼 수 있는 시야를 얻었음을 뜻한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44

 

사실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는 건, 혼자 가만히 앉아 생각하는 것뿐만 아니라 홀로 걷거나 조용한 교회당이나 장소에서 기도하는 것도 포함일 수 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의 모든  불행은 자기 방에 홀로 머물러 있지 못하는 데서 온다."라고 까지 말했습니다. 혼자의 시간을 갖는다는 건, 자신에게 일어난 상황을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하지만 한 번도 ‘여왕 같은 태도’로써 자신을 바라본 적 없던 사람이 갑자기 자신을 그런 식으로 인식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린다 아로슈가 만난 여성들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는데요. 아마 여러분들도 공감하실 겁니다. 

 

여자들은 일상에서 자기 안의 여왕을 보는 것이 어렵다고 한다. 한 여자가 상담 중에 깜짝 놀라면서 내게 물었다. “욕조를 닦고 있을 때 어떻게 나를 여왕으로 느낄 수 있겠어요?” 그러나 “내가 왜 이 일을 하는가?”라고 자문해 볼 수 있다. 현모양처가 되려고, 다른 사람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려고 하는가? 아니면 이 순간 무엇이 올바른지 아는 것인가? 내가 의식하고 원해서 욕조를 닦는 것이라면 나는 스스로를 여왕처럼 느낄 수 있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45

 

일상을 채운 일들 가운데, 관성에 따라 해왔던 일들이나 또는 해야만 할 것 같아 했던 일들이 참 많습니다. 물론 사람은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어떤 일을 하는데 이상하게 자꾸 짜증이 나거나 불만이 쌓인다면 그 일을 잠시 멈추고 자신을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원해서라기보다 타인들의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 그 일들을 하지 않았었나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마음은 참 심술이 많습니다. 왜 그런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이제 공부를 시작하려고 했는데, 엄마가 갑자기 공부하라고 하면 하기 싫어진다는 말 말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누군가가 시키는 일을 하는 걸 불편해하죠. 

 

관습적으로라도 해오던 일을 안 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기 때문인데요. 처음에는 뭐든 어렵습니다. 하지만 하루하루 기쁨의 일들로 채워가도 부족한 것이 삶입니다. 지금이라도 멈출 것은 멈추고 새로운 일들을 시작해 나가십시오. 

 

여왕: 자기 내면 통치자

 

이어서 책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안셀름 그륀은 여왕은 ‘나라’를 지키며 보호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여왕은 가정의 보호자다. 자기 나라를 보호하고 지킨다. 그 나라는 현실의 집뿐만 아니라 자기 내면의 집이기도 하다. 여왕은 내면의 집을 차지하려는 시기, 질투, 불안 같은 것들에 의해 쫓겨나지 않는다. 여왕은 내면의 집을 자신으로 가득 채운다. 그 집에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것을 안다. 자기 집을 스스로 지어 가며 그 안에 산다. 자기 자신을 위한다. 그렇게 여자는 외적인 집도 지을 수 있다. 가족, 회사, 교회, 국가를 그렇게 형성해 간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47

 

여기서 말하는 ‘나라’는 곧 ‘자기 내면’을 뜻합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는데요. 안셀름 그륀은 인간의 외적인 요소들을 사람의 내면과 연관시켜서 바라봅니다. 심리학을 공부했기에 그런데요. 하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마음의 변화로 시작해 외부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나’로 시작해 ‘너’에게서 끝나는 것이지요. 어쨌든 안셀름 그륀은 여왕은 자기 내면을 통치하는 자 혹은 통제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상에 드러난 여왕의 광채

 

아까 나눈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면요. 여왕으로서의 태도(통치)는 평범한 일상에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안셀름 그륀은 ‘여왕과 같은 존엄’을 깨닫게 되면, 가사 노동을 할 때도 여왕처럼 느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자가 자신의 여왕 같은 존엄을 알게 되면 가사 노동을 할 때도 여왕처럼 느낄 수 있다. 남자는 직장에서 경력을 쌓아가며 빛을 내는데 자신은 허드렛일이나 한다고 불평할 필요가 없다. 여왕으로서 요리나 살림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그것이 모두 여왕의 임무에 속한다. 무엇을 하는가는 상관없다. 어떤 일을 하던 자신의 여왕다운 존엄을 알아야 한다. 그녀에게서는 여왕의 광채가 나온다. 어떤 집에 초대받아 가 보면, 이 집은 여왕이 다스리고 있구나 하고 느낄 때가 있다. 잘 정돈되어 있고, 뽐내지 않지만 모든 것이 위엄과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사람들은 왕에게 대접받는다고 느낀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47-148

 

물론 모든 일에 매사 이 같은 태도로 임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죠. 새로운 방식으로 살기 위해서는 시행착오가 필요합니다. 과정이 필요한 법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하갈 이야기> 때도 말씀드렸듯이 ‘희생양 역할’을 내려놓고 자기 삶의 주인이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자기 안에 여왕다운 면모가 있음을 꼭 기억하시고 자신의 가치, 자신의 존엄성을 잊지 마십시오. 

 

세 가지 방향의 변화

 

조금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 하는데요.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안셀름 그륀은 이렇게 말합니다. 

 

옆에 있으면 힘이 다 빠지는 것 같은 여자가 있다. 그런 타입의 여자와 한 시간쯤 이야기하면 지친다. 사람을 밑바닥으로 끌어내리는 것 같다. 헤어지고 나면 불쾌하고 무기력하고 진이 다 빠진다. 다른 여자에게서 힘을 빼앗아 가는 여자는 여왕이 아니다. 그런 여자에게는 경계가 없다. 뒤죽박죽이다. 다른 사람의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든다. 자신을 비하하며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도록 몰아댄다. 문제는 그런 여자가 다른 이들에게서 힘을 빼앗는 것만이 아니다. 여자들이 그런 여자 옆에서 자기 에너지를 잃어버린다는데 있다. 그런 여자는 타인의 불안, 불만, 분열, 약함을 자꾸 들춘다. 그런 부정적인 영향에서 자기를 지키기 위해 내면의 여왕이 필요하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48-149

 

이진경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어떤 식으로든 세 가지의 변화를 준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웃과의 만남은 그것이 만난 존재자에게 세 가지 방향의 변화를 야기합니다. 그 존재자의 능력이 증가하거나, 감소하거나, 아무 변화가 없거나.”(이진경, <우리는 왜 끊임없이 곁눈질을 하는가(니체의 눈으로 읽는 니체 도덕의 계보)>, 엑스북스, p.103) 쉽게 말해, 누군가를 만나고 나면 내가 더 힘과 활기를 얻게 될 수도 있고 또는 안셀름 그륀의 이야기처럼 누군가를 만나고 나면 힘이 쭉 빠지게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아무런 변화나 감흥이 없을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평소 나는 나의 입에서는 어떤 말이 흘러나오나 한번 돌아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나도 모른 채, 곁에 있는 이들을 밑바닥으로 끌어내리고 있는 건 아닌지를 말입니다. 안셀름 그륀은 현재 내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의 여부에 따라, 여왕(왕)의 면모로 살고 있는지 아닌지 가늠해 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계를 정하는 일

 

안셀름 그륀은 남성인 저에게도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줬는데요. 다시 한번 느꼈던 바이지만, 내면의 문제는 남녀를 가리지 않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여왕은 나라를 다스릴 뿐만 아니라, ‘경계’를 지키는 자이기도 하다고 말합니다. 경계라니. 무슨 이야긴가 싶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죠. 

 

여왕은 나라를 다스릴 뿐 아니라 경계를 지킨다. 적들이 나라를 침입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여왕의 본질적 임무는 경계를 잘 정하는 것이다. 여자에게 쉬운 일은 아니다. 주위 사람이 떠나 버릴지 모른다고 불안해하기도 한다. 경계를 정할 때 홀로 있다고 느낀다. 이제 아무도 자기 문을 두드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기 안에 여왕이 있는 여자는 경계를 정하고, 자신의 나라를 향유한다. 여왕은 손님을 기쁘게 맞는다. 그 손님에 의존하지는 않는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49

 

경계를 지킨다는 건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 어떤 ‘선(line)’을 긋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선’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않겠다는 어떤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자신을 지키기 위한 긍정적인 ‘선’을 말합니다. 그런데 경계를 정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안 해보던 일이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경계를 정하는 건 ‘자신’을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경계’는 여왕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안셀름 그륀은 말합니다. 저에게도 참 중요한 부분인 것 같습니다. 

 

불안이 주는 경계의 어려움

 

경계를 정하는 게 어려운 이유가 ‘불안’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가장 좋은 예가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인데요. 

 

경계를 정하는 것이 왜 힘들까? 불안해서다. 홀로 남을지 모른다는 불안,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하리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어머니와 잘 지내지 못하는 여자가 있다. 어머니의 지나친 기대 때문에 종종 어머니에게 공격적으로 반응한다는 것이다. 나는 어머니의 그런 기대는 당연하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나 그 기대를 얼마나 채우기를 원하며, 또 할 수 있을지는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50

 

이 부분은 남성인 저에게도 해당되는 부분이었습니다. 저는 계속 반복해서 겪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상하게 어머님과 통화를 하고 나면, 약간의 짜증과 불만이 생기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자꾸 공격적으로 반응하는 제 모습을 발견합니다. 왜 생각과 다르게 반응할까 고민이 많았습니다. (이 영상을 어머님이 보시면 안 되는데 ^^;) 

 

이 책을 읽어나가면 들었던 생각은 저에게도 어머님과의 관계에 있어 ‘경계’가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셀름 그륀의 말처럼 어머님의 기대는 당연한 겁니다. 부모로서 자녀에게 기대를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기대를 채울지 말지는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사실입니다. 저와 어머님 사이에 경계가 모호했던 것 같습니다, 이 말은 내가 그 경계를 어떻게, 얼마나 그을지 잘 몰랐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건 어머니의 기대에 경계를 정할 만큼 나 자신을 신뢰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있었습니다. 어머니께 사랑을 받고 싶었지만,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까봐 불안해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까의 이야기를 이어서 보면요. 

 

이 여자의 공격성은 어머니를 향한 것이 아니다. 자신을 향한 것이다. 그녀는 어머니의 기대에 경계를 정할 만큼 자신을 신뢰하지 못했다. 어머니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어머니가 원하는 것을 다 잘하고 싶었다. 그러나 잘되지 않았고 버거운 요구를 받는다고 느꼈다. 스스로 경계를 정할 만큼 내면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탓에 어머니에게 공격적으로 반응했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50

 

하지만 자신을 신뢰하거나 여왕(왕)으로서의 존엄을 가슴에 새긴 사람의 반응을 다를 수 있습니다. 먼저 어머니의 기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러고 자기 스스로에게 그 기대를 얼마나 채울지를 묻습니다. 그러고 나서 어머니께 무엇이 자기에게 가장 알맞은지 이야기를 합니다. 모든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미묘하지만, 부모와 자녀의 관계만은 못할 겁니다. 새로운 시도는 설렘과 불안을 준다고 말씀드렸었습니다. 혼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올 수 있지만, 이 불안감에 속지 마시고 새로운 관계, 건강한 관계로 재정립된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과정에 함께 하고 계신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여왕의 그림자 : 폭군

 

나눌 이야기가 더 있지만,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고 마무리 하겠습니다. 안셀름 그륀은 칼 융의 심리학을 전공했다고 말했습니다. 융은 ‘그림자’에 관해 말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림자’는 간단히 말해, ‘내 안에 있는 어두운 면’을 말합니다. 어원의 느낌은 부정적이지만, 이 그림자는 소중히 다뤄야합니다. 여왕의 모습에도 그림자가 있습니다. 바로 ‘폭군’이라는 그림자인데요. 폭군이라니 뭔가 무시무시합니다. 안셀름 그륀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모든 원형에는 그림자가 있다. 여왕의 그림자는 폭군이다. 우울증에 빠진 여자는 자기 질병을 이유로 온 가족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모든 것이 자신에 맞춰 조정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질병은 맞설 수 없는 무기로 사용된다. 아마존 여자들이 화살과 활로 싸운다면, 자기의 위엄을 발견하지 못한 여자들은 상처나 질병을 무기로 사용한다. 남편과 아이는 질병이라는 무기에 맞서는 것을 어려워한다. 질병은 다른 사람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한다. 그런 양심의 가책을 가지고는 싸울 수 없다. 여왕은 고통을 겪으며 그것을 받아들인다. 고통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용기를 언제나 새롭게 발견한다. 우리 안에 있는 여왕은 고통 가운데서도 그 내면의 위대함을 보여 준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54

 

자녀에게 죄책감을 심어주거나 가족조차 어찌할 수 없는 것을 무기로 삼는다면, 서로 간의 관계를 더 불편해질지 모릅니다. 하지만 누가 대놓고 이런 관계를 만들고 싶겠습니까. 자신도 모른 채 이런 관계가 형성될 수 있으니, 우리는 늘 자신을 돌아보며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여왕 에스더

 

성서학당 <5강>을 정리합니다. 오늘 우리는 구약에 등장한 ‘에스더(에스테르)’의 모습에서 ‘여왕’의 모습을 보아냈습니다. 여왕은 자기 내면에 ‘존엄’과 ‘자유’를 간직한 자입니다. 안셀름 그륀은 여성들의 내면에 이 ‘여왕’의 모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남성들에게는 ‘남왕’으로서의 모습이 있을 수 있겠지요. 

 

여러분, 정말 하루하루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요새 성장통을 좀 겪고 있습니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고통과 어려움의 시간은 반드시 필요한 모양입니다. 너무 저만 이야기하는 것 같으니 여러분의 감상이나 소감, 에피소드들을 댓글로 나눠주셔도 좋을 듯합니다. 물론 마음이 허락하는 선에서 말입니다. 그럼 왕이 왕께 인사드립니다. (인사) 한 주도 평안하십시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

안녕하세요.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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