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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성서학당] 성경 인물의 빛과 그림자 : 룻

20201029 청파교회 목요 <성서학당> : 성경 인물의 빛과 그림자

 

여왕과 야성녀: 룻

 

 

성서학당

 

안녕하세요. 네 번째 목요 <성서학당>을 시작하겠습니다. 저희가 함께 읽어나가고 있는 <여왕과 야성녀>는 총 <14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매학기 <성서학당>은 총 8회로 구성되어 있기에, <14과> 중에 8개만 이야기 나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와, 사라, 하갈까지는 순서대로 이어갔지만, 오늘 함께 나눌 4회는 쭉 건너뛰어 “룻”의 이야기를 다뤄보려고 합니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룻” 다음에는 “에스더”,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 “마르다와 마리아” 이렇게 준비해보려 합니다. 

 

여성 : 이방인

 

질문 한 가지를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에게 남성은 낯선 존재입니까? 혹은 여러분에게 여성은 낯선 존재이십니까? 남성의 입장에서 저는 여성이 참 어렵습니다. 가끔 안다고 생각할 때가 있지만 헛짚을 때가 훨씬 많습니다. 동성 간에도 서로를 잘 모르겠는데, 다른 극에 있는 성(性)은 오죽할까 생각이 듭니다. 

 

안셀름 그륀은 여성이 낯선 존재인 이유를 좀 특별하게 바라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여성은 여성 스스로가 세상을 낯설게 느끼는 존재이기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그러하십니까? 여성이신 분들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세상을 낯설게 바라보는지를 말입니다. 그륀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여자들은 자주 이 세상이 낯설게 느껴지곤 한다. 그들은 자신의 이중적 기원을 안다. 자기가 다른 세계에서 왔음을 짐작하고 있다. 남자에게 여자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친근하고 매력적이지만 여전히 낯설어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존재다. 이방인은 원형적 상이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11

 

여기서 ‘이방인’이 중요한데요.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낯선 여성’, ‘세상에서 낯선 존재로 사는 여성’을 ‘이방인’의 관점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기근과 죽음

 

여성이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말이 저기 무슨 안드로메다나 4차원에서 왔다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책에서 말한 ‘이중적 기원’이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순 없지만, 짐작해보건대 한 가지는 이 땅에 발붙이고 살아야 하는 ‘인간이라는 기원’과 다른 한 가지는 자신 안에 있는 비밀스럽고 낯선 것에 끌리는 어떤 ‘미지의 기원’을 말하는 것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현실과 이상이라고 정리하면 괜찮을까요? 바로 이러한 여성의 원형을 보여주는 인물이 <룻기>의 ‘룻’인 것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이스라엘이 선택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그런데요. 그런데 이 ‘룻’이라는 여인은 모압의 여인, 즉 이방 나라의 사람이었습니다. ‘모압’은 ‘암몬’이라는 나라와도 인접한 바로 ‘이스라엘’의 오른편에 위치한 나라라고 보시면 됩니다. 룻 이야기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전개가 됩니다. 

 

이스라엘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 사람이었던 엘리멜렉은 기근을 피해, 그의 아내 나오미와 그리고 두 아들인 말론과 기룐과 함께 모압 지방에 가서 살게 됩니다. 모압에서 이 두 아들은 모압 출신의 여성이었던 룻과 오르바를 아내로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데 엘리멜렉이 죽고 나자 곧이어 두 아들마저 죽게 됩니다. 결국 나오미와 두 며느리만 남게 된 것이죠. 

 

그들이 모압 지방에 사는 동안 주님께서 다시 이스라엘에 풍년이 들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과부가 된 나오미는 자신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두 며느리도 시어머니와 동행합니다. 고향으로 향하던 중, 나오미는 두 며느리에게 자신들의 고향인 모압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며느리들은 시어머니와 함께 가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결국, 오르바는 시어머니의 강권에 못 이겨 친정으로 돌아가지만, 룻은 아시다시피 나오미와 끝까지 동행합니다. 

 

예수의 족보에 오른 ‘룻’

 

룻은 경계를 넘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갑니다. 고향이 주는 안전함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기위해 나아갑니다. 두 사람은 베들레헴에 도착합니다. 그곳에는 나오미 남편 쪽 친족인 ‘보아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아주 재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등장으로 룻의 구원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룻은 시어머니의 권유로 보아스의 들에서 이삭 줍는 일을 합니다. 이삭 줍는 일은 이스라엘에서는 가난한 자의 권리였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친절하고 관대하게 대해주었습니다. 룻은 나오미에게 자신이 경험한 보아스의 환대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때 나오미는 보아스가 룻의 구원자임을 알려줍니다. 보아스가 보리타작을 마친 뒤, 자려고 누우면 그 침상의 발치를 들치고 함께 누우라고 말합니다. 룻은 시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행합니다. 보아스는 잠에서 깨어나 룻에게 누구인지 묻습니다. 그러자 룻은 "어른의 종 룻입니다. 어른의 품에 이 종을 안아 주십시오. 어른이야말로 집안 어른으로서 저를 맡아야 할 분이십니다."라고 답합니다. 보아스는 준비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습니다. 룻에게는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책임 권한이 있던 그 친족은 전통에 따라 엘리멜렉 가족인 나오미와 룻을 거두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권한을 보아스에게 넘겨주었고, 결국 보아스는 자신의 뜻대로 룻과 혼인하게 됩니다. 

 

룻은 임신을 하였고, 둘 사이에서 사내 아이 하나가 태어납니다. 그의 이름은 ‘오벳’입니다. ‘오벳’ 들어보셨지요? 오벳은 이새의 아버지이자 다윗의 할아버지입니다. 이사야 11장을 보면,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자라 열매를 맺는다”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이 오벳을 경유합니다(마1:5). 그러니까 이방 여자인 룻은 보아스와의 만남을 통해, 다윗의 선조가 되었고 예수의 족보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이방인이 주는 ‘낯섦’

 

이야기를 듣고 보니, 왜 안셀름 그륀이 룻에게서 ‘이방 여인’의 모습을 보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그녀는 실제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모압 지방의 여인이었고, 이 ‘이방 여인’은 경계를 넘어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녀의 용기 있는 선택은 보아스가 룻에게 했던 이야기에서도 드러나는데요.  

 

11. "남편을 잃은 뒤에 댁이 시어머니에게 어떻게 하였는지를, 자세히 들어서 다 알고 있소. 댁은 친정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고, 태어난 땅을 떠나서, 엊그제까지만 해도 알지 못하던 다른 백성에게로 오지 않았소?
12. 댁이 한 일은 주님께서 갚아 주실 것이오. 이제 댁이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날개 밑으로 보호를 받으러 왔으니, 그분께서 댁에게 넉넉히 갚아 주실 것이오."


<룻기 2장 11-12절>

 

이방 사람은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자입니다. 말뿐만 아니라 태도나 행동 그리고 다른 외모를 통해서도 새로움을 전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것’은 늘 양가적입니다. 설렘과 동시에 두려움을 줍니다. 지금은 인터넷이나 매체들이 발전하여 이방인에 대한 두려움이 훨씬 적어졌습니다. 생김새와 언어가 다른 외국인이 나타나도 무서워 도망치는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고대 세계에서는 이 이방인을 위험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안셀름 그륀은 말합니다. 

 

고대에는 이방인을 위험한 존재로 여겼다. 사람들은 이방인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경탄하기도 한다. 이제껏 보지 못한 것을 이방인이 전해 줄 거라 기대한다. 이방인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지식, 사람들이 모르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방 여자는 마법을 부려 사람을 해치는 마술사의 이미지와 결부된다. 동화에서 마녀는 부정적인 이미지다. 그러나 긍정적인 상이기도 하다. 마녀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15

 

모르는 것은 두렵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여행’을 갈 때도 비슷합니다. 혹시 이 영상을 시청하시는 분 중에 여행을 갈 때 전혀 모르는 곳으로만 가시는, 그런 콜럼버스 같은 분이 계십니까? 모르는 곳은 두렵기에 조금이라도 아는 곳, 어딘가에서 본 장소로 우리는 여행을 떠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우리와 얼굴색이 다른 나라 사람을 만나거나, 어둔 길에서 마주친 낯모르는 사람은 두렵기 마련입니다. 이방인이란 여전히 두려운 존재입니다. 하지만 나오미와 보아스는,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이 이방 여인 ‘룻’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습니다. 나오미와 보아스 또한 대단한 안목과 용기를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또 다른 가능성을 인식하는 삶

 

혹시 여러분은 그런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내가 아는 내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 말입니다. 무슨 뜬구름 같은 소린가 싶으실 텐데요. 안셀름 그륀의 동생 린다 아로슈는 내 안의 낯선 존재를 인식하며 사는 사람들이 세상을 풍요롭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죠. 

 

자신 안의 낯선 존재를 의식하며 사는 여자들은 세상을 풍요롭게 한다.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을, 우리 생각의 틀과 관계에 새로움을 선사한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16

 

지금의 나를, 현재의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불어 내 안에 있는 어떤 또 다른 가능성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작가 오종우는 그의 책 <예술 수업>에서 이런 이야기를 전합니다. ‘예술’은 아주 사소한 것들에 새로운 무늬를 그려나간다고 말입니다. 그 새로운 무늬들이 전체에 스며들어 세계에 큰 감동을 주게 된다고 말합니다. 

 

예술은 정치혁명처럼 어떤 거창한 구호를 외치지 않습니다. 인간의 삶은 소소한 것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예술은 그 사소한 것들에 새로운 무늬를 그려나가 전체에 스며들게 하죠. 거창한 구호보다 큰 감동을 주는 작은 울림들로 세상을 움직입니다. 

오종우, <예술 수업>, 어크로스, 2015, p.77

 

갑자기, 뜬금없이 무슨 ‘예술’인가 싶으실 텐데요. 오종우 교수는 예술이란 크고 거대한 어떤 것은 아니지만, 소소하고 평범한 인간의 삶에 새로운 무언가를 새긴다는 의미에서 예술은 ‘작은 거인’과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술이 세상에 새로움을 선사한다는 의미에서 이 ‘예술’과 ‘여성’은 닮아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여성들은 곧 인생 예술가인 것입니다. (물론 남성분들이 예술적이 아니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위대한 남성 예술가들도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낯선 것에 끌린다

 

이어서 책을 살펴보면요. 안셀름 그륀은 여성은 낯선 것에 잘 끌린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것을 ‘호기심’이라고 표현해볼까 하는데요. 여러분께서는 호기심이 많은 편이신가요? 주로 언제 가장 호기심이 많으셨던 것 같은가요? 사실 남녀 구분할 것 없이 우리는 ‘어릴 때’ 가장 호기심이 많았습니다. 아이들을 보십시오.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질문거리입니다. 나이가 드는 것을 좀 부정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나이가 든다는 것은 ‘호기심이나 궁금증, 낯섦’에 관해 점점 무뎌지게 되는 것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물론 나이 듦이 깊어짐의 상징일 수 있지만, 반대로 무뎌짐의 상징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안셀름 그륀은 이 ‘낯선 것’을 긍정적인 의미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자들은 자주 낯선 문화에 매혹된다. 낯선 것에 끌린다. 그들은 낯선 것에서 어떤 것을 취하려고 한다. (생략) 처음 본 낯선 것에 대한, 사람에 대한 관심이었다. 어머니는 낯선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하려고 하셨던 것이다. 무엇이 더 나은 지 비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로 인해 더 풍성해지려고 이방인에게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17-118

 

안셀름 그륀은 어릴 적, 자신의 집에 놀러 왔던 낯선 나라 사람들을 떠올리며, 어머님과 누이들이 그들에게 갖는 관심과 애정이 기억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정말 낯설고 새로운 것, 새로운 사람에게 관심이 많으십니까? 

 

삶의 변화와 인간의 불안감

 

요즘은 확실히 예전보다 더 ‘자유와 자기 Want’를 추구하려는 여성분들이 많아진 것 같습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여성들의 목소리가 그것을 증명한다고 볼 수 있는데요. 

 

우연히 유튜브에서 예능 하나를 보게 됐습니다. TV 광고를 하려는 건 아닌데, 그 프로그램의 이름은 <동상이몽2–너는 내 운명>이었습니다. 프로그램엔 이번 9월에 결혼한 가수 신화의 멤버인 전진 부부가 나왔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잠시 들려 드려보면요. 스튜어디스였던 전진의 아내는 결혼을 하면서 전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둡니다. 자신의 의사로 말입니다. 남편 전진은 그녀의 결정을 응원해줍니다. 남편 전진도 바라던 일이었기에 여기까지는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곧 40대가 되어가는 전진의 아내는 인생의 후반기를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마음에 이런저런 다음 계획들을 남편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남편은 20년 가까이 쉬지 않고 일했던 사람이 일을 그만두자마자 바로 시작하려 한다며, 안타까워하면서도 뭔가 불편해하는 모습을 내비쳤습니다. 이 영상이 별 의미 없이 지나갈 수도 있었는데, 저는 이 부분을 보며 두 가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전진의 아내에게서는 자신이 해오던 일이 사라졌을 때 오는 어떤 ‘존재의 불안감’을 보았고, 다른 하나는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추구하려는 아내를 보며 ‘불안해하는 남편의 모습’이었습니다. 

 

제가 이 상황이 눈에 들어온 건, 그들의 상황이 제가 연애 시절 겪었던 상황과 비슷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안셀름 그륀의 이야기를 보면, 이러한 상황은 저와 전진 부부만이 겪는 상황이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보다 많은 자유를 누리며 참된 정체성을 추구하려는 여자가 많다. (생략) 여자들의 이러한 추구를 깎아내리는 남자도 많다. 그들은 자신의 표상에 맞는 틀에 여자를 끼워 맞추려고 한다. 남자들은 아내가 결혼하기 전과 달라졌다고 투덜댄다. 


여자가 무언가 추구하면 남자는 불안하다. 그는 아내가 그냥 이대로 머물러 있었으면 좋겠다. 결혼 초기에는 아내에게 힘을 주었던 강한 남편도 아내가 자신을 찾아 나서고 지금까지의 삶에 만족하지 않으면 힘들어한다. 그는 아내가 과거에 머물러 있기를 바란다. 발전을 허용하지 않는다. 남편은 아내가 자신의 길을 갈까 불안하다. 


안셀름 그륀, <여왕과 야성녀>, 분도출판사, 2013, p.119

 

“내 애인은 대체 왜 이러지?”나 “내 남편은 정말 내 마음을 몰라”라는 마음이 조금은 수그러드셨나요? 남성들의 반응이 주로 이러하다는 것입니다. 여성을 이해하고 여성과 함께 가기 위해서는 남자가 극복해야 할 것들이 참 많습니다. 결국, 누구에게나 있는 이 ‘불안감’이 서로를 더 멀어지게 만드는 것 아닐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삶에는 변화가 필요한 순간이 있습니다. 물론 제가 얼마나 알겠습니까만, 저도 크고 작은 경험과 또 곁에 있는 사람들을 보며 그리고 책이 전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이 ‘변화’와 ‘불안감’이 인간  관계에 있어 중요한 요소임을 깨닫게 됩니다. 남성분들 가운데 이 영상을 시청하고 계신 분들이 계신다면, 여성이 지닌 이 ‘이방인’과 같은 성향들을 이해해주시고 알아주시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성분들도 남성들이 겉으로 보기엔 참 강한 것 같지만, 내면은 불안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 또한 이해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새로운 삶을 향한 용기

 

목요 성서학당 <4강>을 정리합니다. 그리 길지도 않지만, 이 유튜브로 강의를 준비한다는 게 참 쉽지가 않았습니다. 괜히 유튜브로 진행한다고 해서 후회가 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벌써 <8강> 중엔 절반이나 왔습니다. 어설프고 좀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넓은 마음으로 시청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은 우리는 ‘룻 이야기’에 담긴 인간의 원형에 관해 나눠 봤습니다. 룻은 자신의 고향을 떠나서 시어머니를 따라 새로운 땅, 즉 이방 나라인 이스라엘로 오게 됩니다. 고향이 안전함과 익숙함을 상징한다면, 그녀는 아브라함처럼 새로운 땅, 새로운 삶을 향해 용기 있게 나아갔습니다. 새로운 가능성에 자신을 열어둔 것입니다. 이 용기 있는 선택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까지 이어지는 ‘족보’에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융(Jung)을 공부한 안셀름 그륀의 책을 함께 읽어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융(Jung)은 인간의 원형, 즉 여성의 원형, 남성의 원형 그리고 인간 내면에 드리워진 ‘그림자’ 등을 연구한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두시면 좋겠습니다. 

 

아무튼, 오늘 우리는 룻을 통해 여성 안에 있는 이방인의 기질에 관해 이야기 나눠봤습니다만, 한 사람 안에는 늘 남성성-여성성이 공존하고 있기에, 이 이방인의 모습은 남-녀를 크게 가리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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