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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청년부] 생명을 나누는 공동체

20190727 청파교회 청년1부 수련회 설교

생명을 나누는 공동체

<사도행전 2장 43-47절>

43. 모든 사람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사도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과 표징이 많이 일어났던 것이다.
44.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45.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46.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교회란 무엇인가?

안녕하세요. 떠나오니 어때요? 

우리는 이번 수련회 동안, ‘교회란 무엇인가?’에 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거예요. 이미 김형욱 간사님과 함께, 두 주 동안 이야기를 나눴을 텐데, 첫 주에는 ① 교회에 다니는 이유 & 교회에 다니지 않는 이유, 둘째 주는 ② 초대 교회의 특징에 관해 이야기 나눴을 거예요. 

그리고 이번 수련회 때는 어떤 이야기를 나눌 거냐 하면, ‘교회라는 것은 하나의 건물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 즉, 하나의 공동체인가?’에 관해 생각해 볼 거예요. 건물이냐, 공동체이냐! 이미 이런 생각해 본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이 이야기는 굉장히 중요한데, 이 딱딱한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나가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조금 특별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홀로 지낸다는 것

자, 여기 계신 여러분은 평소 ‘외로움’을 어떻게 달래십니까? 뭐 나는 외로움을 느낄 새가 없이, 요새 너무 행복하다는 분 계신가요? 그럴 수 있어요. 항상 해야 할 일이 있고, 또 만날 사람이 있고, 연락을 계속 주고받을 사람도 있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아서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어요. 

그런데 참 재밌는 건, 수많은 사람은 이 ‘외로움’을 잊기 위해, 방금 제가 말씀드린 이러한 일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홀로, ‘가만히’ 있는 게 너무 힘들기에, 자꾸 할 일을 찾고, 또 다른 누군갈 찾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사상가 ‘파스칼’(1623-1662 프랑스의 사상가, 수학자, 물리학자이다. 현대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예수회의 방법에 의한 이단심문을 비판하였다)은 굉장히 의미 있는 말을 남겼습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자기 방에 홀로 머물러 있지 못하는 데서 온다.” 

이 말이 ‘인간’을 과소평가하는 말은 아닐 거예요. ‘인간’에 관한 아주 솔직한 성찰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파스칼의 이 말을 이렇게 받아들여 봤어요. ‘사람의 성숙도’는, 누구와도 연락하지 않고, 누구와도 만나지 않은 채, ‘혼자만의 시간’을 얼마나 잘 견뎌낼 수 있느냐와 상관있다고 말입니다. 물론 나는 혼자 있는 거 완전히 잘한다는 사람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런데 여기서 ‘홀로 머문다.’라는 말은 휴대전화는 물론이거니와 TV를 보거나, 컴퓨터를 하거나, 책을 읽는 일체의 행위도 하지 않는 것을 포함해요. 자신에게 집중하며 그저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이쯤 되면, 이런 생각을 하는 분들도 있을 거예요. ‘아니,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런데 그런 생각이, 맞습니다. 사람은 원래부터 지어지기를, ‘홀로 지내는 것’을 잘-못하게 만들어졌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늘 누군가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나눌 어떤 대상을 찾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로, 누군가로부터의 가벼운 ‘관심’이나 ‘소통’ 필요할 때, 무엇을 합니까? Instagram에 접속하거나, 자신의 블로그에 ‘글이나 사진’을 올리기도 하죠. 물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과거와 미래

여러분들과도 나중에 함께 읽어보고 싶은 책인, 에리히 프롬이라는 사회심리학자의 책 <사랑의 기술>을 보시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좀 철학적인 질문인데, 질문 하나를 드려볼까 합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가장 확실한 게’ 있나요? 이건 정말 확실하다, 내게 있어 이것만큼은 가장 명확한 사실이라고 할 만한 게 있나요? 에리히 프롬은 한마디로 요약했는데, 그것은 자신의 ‘과거’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직접 경험을 했고, 그 시간을 지나왔음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같은 맥락에서 질문 하나를 더 드리겠습니다. 그럼 ‘미래’에 있어서 가장 확실한 건 무엇일까요? ‘죽음’입니다. ‘죽음’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반드시 경험하게 될 사실이고,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이것을 향해 걸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슬픈 운명’이지만, 반대로 이 ‘운명’으로 인해 매 순간을 열심히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기도 하죠. 

그런데 ‘사람’은 바로 이렇게 ① ‘확실치 않은 것들’과 또 ② ‘자신이 원치 않았음에도 겪게 되는 다양한 일들’로 인해, 엄청난 혼란과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인식들이 누군가와 만나지 않거나, 또 결합 되지 않고서는 못 견디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듯 무언가로부터 홀로 떨어져 분리되어 있다는 느낌은, 우리 내면에 ‘불안’을 일으킵니다. 

 

인간의 근본적 불안

어떻게, 여러분은 제가 지금 한 말들이 이해가 좀 가십니까? 쉽게 말해, 이런 말입니다. 혹시 여기서 ‘알’에서 태어난 분 있나요? 난 좀 특별하게 태어났다? 우리는 모두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났죠.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아기였을 때, 아기였던 우리는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엄청난 ‘불안’을 느꼈다고 합니다. 왜냐면, 엄마와 한 몸을 이루던 아기가, 처음으로 둘이 되는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란, 이미 태생적으로 ‘분리’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이 ‘분리되었다는 느낌이나 경험’이 이후에 겪는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더 증폭되게 되고, 그로 인해 ‘인간’이란 존재는 더욱 ‘불안’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불안’을 극복하고자 어딘가에 소속되거나, 나 아닌 다른 사람과 자꾸 연결되거나 접속되기를 원하게 되죠. 

등을 맞댄 ‘믿음 생활’

그런 의미에 있어서, 평소 ‘마음 맞는 사람들’을 만나거나, 또는 나와 같은 ‘가치’를 추구하는 집단을 만난다는 건, 그만큼 좋은 일이고 행운입니다. 조금 전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뭔가 통하는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건, 곧 내 안의 ‘불안’을 낮추는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실 지금 이곳에 모여 있는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은 혼자서 할 수는 있습니다. 그것이 나쁘거나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홀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을 보며, 우리가 자꾸 마음이 쓰이는 건, 혼자서는 오래 가기가 어렵다는 것을, 우리가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에 가수 GOD가 산티아고 순례를 하던 중에, ‘데니-안’이 굴다리 벽면에 쓰여 있는 글귀 읽어줬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혼자 걸으면 빨리 갈 수 있지만, 같이 걸으면 더 멀리 갈 수 있다.” 멋진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지탱해 줄 다른 누군가를 필요로 합니다. ‘사람인(人)’ 아시죠? 이 한자어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지만, 그중 하나가 바로, 두 사람이 등을 서로 맞대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교회의 존재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서로 등을 맞대고 ‘믿음 생활’을 하지 않으면, ‘지속성’은 물론이거니와, 뭔가를 ‘명확히 보는 데’에도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은 성도들

말씀을 잠시 살펴볼까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말씀은 <사도행전>입니다. ‘사도행전’은 어떤 말을 줄인 말일까요? 쉽게 말해, ‘사도들이 행한 것들의 기록’으로 보시면 됩니다. ‘사도’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포스톨로스’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을 일컫습니다. 

그런데 이 ‘사도행전’에는 ‘이 분’의 역할이 아주 강조되는 성경이기도 합니다. 여러 번 등장하기 때문인데요. 혹시 이 양반이 누군지 아십니까? ‘성령’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아마 여러분께서 각자가 생각하는 ‘성령의 역할들’이 있을 겁니다. 그중 한 가지가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합니다. 사도행전 2장 말씀을 보면, 오늘 본문에는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이 ‘자신의 소유’를 타인들과 나누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마음이 열릴 대로 열린 성도들은, 자신의 것을 나누는 것뿐만 아니라, 날마다 모이기에 힘썼다고 했습니다. 본문을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사도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과 표징이 많이 일어났던 것이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내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 사람들이, 누군가의 강요가 아닌, 적극적인 자발성으로 ‘자신의 소유’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열심히 성전에 모여 맛있는 음식을 나누며,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했습니다. (사실 그러고 보면, 주중에 사모임을 열심히 만드는 우리 1-청년부의 맞이들 고정한, 최다미가 참 성령의 사람인 것 같아요. 물론 장소가 ‘다른 주님’을 모시는 장소여서 그렇지만 말입니다) 

성령의 변화

어쨌든 중요한 건, ‘성령’께서는 사람을 변화시켰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은 뭔가 심오하고 Mystery-하기만 한 존재는 아닙니다. ‘성령’은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녹이는 존재’ 또는 ‘우리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어, 이전의 삶으로부터 돌아서게 하는 존재’로 보시면 됩니다. 이 말이 더 어려운가요? 

아무튼, 오늘 본문에서 성도들이 나눈 물건은 대부분 ‘물질’과 관련된 것인데, 누군가에게는 ‘마음’보다 ‘물질’을 나누는 것이 더 쉬울 수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그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그건 각자의 상황에 따라 조금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성령을 선물로 받은 초대 교회 성도들은, 자발적으로 ‘자신의 소유’를 나누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은 주는 것이다

여러분, 질문 한 가지를 더 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평소 사랑에 관해 말할 때, 사랑하는 대상한테 내게 있는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을 준다고 말하곤 합니다. 예전에 철학자 강신주씨가 책에 썼던 이야기였는데, 사람은 사랑하는 대상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주기 마련인데, 소중한 것들 가운데 ‘가장 최상의 선물’은 바로 ‘자신의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아무리 사랑해도 이 ‘생명’까지는 주는 것은 좀 거려 하는데, ‘역사’ 가운데 그 일을 행했던 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셨다는 말이 기억이 납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우리가 조금 전에 나눴던, 에리히 프롬의 책 <사랑의 기술>에서도 등장합니다. 우리가 평소 사랑에 관해 말할 때, 주로 어떤 표현을 씁니까? ‘사랑에 빠졌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에리히 프롬은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무슨 소린가 싶으실 텐데,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내게 있는 무언가를 ‘주는 것’이지, 단순히 상대로부터 뭔가를 ‘받아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근데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준다’라고 할 때, 이 ‘준다는 말’은 굉장히 애매하고 복잡한 의미를 지닙니다. 왜냐면, 평소 우리가 누구에게 뭔가를 ‘준다’라고 말할 때, 자연스레 어떤 것을 ‘포기하거나’, ‘빼앗기거나’, ‘희생하는’ 것을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깊은 차원에서의 ‘준다’라고 하는 것은 이 같은 것들이 아닙니다. 

생명을 준다

그런데 이 에리히 프롬도 사람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은 ‘생명’이라고 말하는데, 그가 말하는 ‘생명’은 단순히 ‘자신의 목숨’을 뜻하진 않습니다. 말 그대로 ‘생명’은 내 안에 ‘살아 있는 무엇’을 나타냅니다. 그는 ‘생명’을 준다는 말은, 자신의 생명을 희생한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것 즉, ‘자신의 기쁨’, ‘자신의 관심’, ‘자신의 이해’, ‘자신의 지식’, ‘자신의 유머’, ‘자신의 슬픔’과 같이,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어떤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 사람이나 그 집단을 위해 단순히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경험했던 아주 즐거운 일들’ 또 ‘내가 관심 있는 분야’라든가 또 ‘내가 가진 지식이나 정보들’ 그리고 ‘분위기를 즐겁게 할 수 있는 내 유머러스함’과 마지막으로 ‘내가 현재 느끼고 있는 슬픔’까지도,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럴 때, 이 ‘생명력’은 다른 사람의 ‘마음이나 가슴’에 무엇인가 일으키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렇게 주었던 ‘생명’은 그 ‘생명’을 나눴던 사람에게 다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그 ‘생명’을 나눈 ‘사이’나, ‘집단’은 더욱더 풍요로워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동참하라 

어찌 ‘설교’를 준비한다고 했는데, 한편의 ‘강의’가 된 것 같습니다. 여러분, 마커스 보그라는 신학자는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재사회화’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부와 명예를 좇는 것이 ‘사회화’라고 본다면, 예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실천하는 삶’은 ‘재사회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는 ‘두 개의 교회’로 구분 지을 수 있는데, 첫째는 ‘눈에 보이는 교회’고, 둘째는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입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교회에 가면 볼 수 있는, 우리와 같은 회중의 모임을 뜻합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런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요? 교회 안팎을 벗어나, 세상 모든 사람의 집단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교회 성도는 우리의 눈에 뚜렷이 보이진 않으며, 하나님만이 잘 보아내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하나의 ‘건물’이기 이전에, 하나의 ‘공동체’를 말합니다. 예수께서 사셨던 당시에는 당연히 교회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 우리가 2천 년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곳에 살면서, 예수께서 보여주셨던 ‘당시의 정신’을 이어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도행전의 성도들은, 자신의 소유를 나누기에 힘썼습니다. 그리고 모이기에도 힘썼고, 서로 먹고 나누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어쩌면 ‘물질 혹은 물건’이라고 하는 것은, 천천히 나누어도 좋을지 모릅니다. 그보다 우리는 내 안에 있는 ‘생명’, ‘내 안에 살아 있는 것’들을, 내 주위에 있는 이들과 나눔으로, 우리의 모임을, ‘진정한 교회, 참다운 교회’로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비-가시화된 교회는, 이처럼 내 안에 ‘살아 있는 것(生命)’들을 나눌 때, 가시화되어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입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기쁨’이 곧 ‘하나님의 기쁨’이고, ‘하나님의 기쁨’이 곧 ‘여러분의 기쁨’임을 말입니다. 여러분께서 청파-1청년부를 기뻐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그리 기뻐하지 않으실 겁니다. 내가 먼저 즐거이 이 모임에 동참할 때, 하나님께서도 기쁨으로 함께해 주실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BibleSalon)

안녕하세요.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다양한 감수성과 인문학 관점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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