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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중고등부] 하나님과 시선 일치하기

20190721 청파교회 중고등부 수련회 설교

하나님과 시선 일치하기

<사도행전 16장 1-10절>

1. 바울은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갔다. 거기에는 디모데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신앙이 돈독한 유대 여자이고, 아버지는 그리스 사람이었다.
2.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신도들에게 호평받는 사람이었다.
3. 바울은 디모데가 자기와 함께 가기를 바랐다. 그래서 바울은 그 지방에 사는 유대 사람들을 생각해서, 디모데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였다. 그것은, 디모데의 아버지가 그리스 사람이라는 것을, 그들이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4. 바울 일행은 여러 도시를 두루 다니면서,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이 정한 규정들을 사람들에게 전해 주어서 지키게 하였다.
5. 교회들은, 그 믿음이 점점 더 튼튼해지고, 그 수가 나날이 늘어갔다.
6.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을 성령이 막으시므로, 그들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지방을 거쳐가서,
7. 무시아 가까이 이르러서, 비두니아로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예수의 영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8. 그래서 그들은 무시아를 지나서 드로아에 이르렀다.
9. 여기서 밤에 바울에게 환상이 나타났는데,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바울 앞에 서서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10. 그 환상을 바울이 본 뒤에, 우리는 곧 마케도니아로 건너가려고 하였다. 우리는,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in <여행가게>

시선을 빼앗는 것  (※ 준비물: 선글라스)

안녕하세요. 벌써 수련회 마지막 시간이 왔습니다. 짧죠? 어떻게, 여러분은 이 짧은 찰나의 수련회 기간에도, 여러분의 시선을 사로잡은 ‘어떤 일‘들이 좀 있었나 모르겠습니다. 이미 충분히 이야기 나눴을 수도 있는데, 어떻게, 요즘 여러분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는 게 있나요? 있다면, 그건 뭔가요? 성적? 외모? 벌써 돈? 아이돌? 게임? 운동? 연애? 저도 이 중에 몇 가지는 포함됩니다. 

사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갖가지 것들에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어요. 당연히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어떤 것에든 시선을 빼앗기기 마련이에요. 왜냐면, 쉽게 말해, 그렇게 창조되었기 때문이에요. 혹시 이 중에 ‘인생’을 두 번 살아본 사람 있나요? 없죠. 그래서 우린 당연히 ‘전생’과 ‘현생’을 비교할 수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주 당연히 살면서 뭔가를 깨달을 수밖에 없어요. 

바울의 ‘교인 청소‘

여러분! 어제와 오늘, 선생님들과 함께 <시선 강탈>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을 거예요. 한번 복습하는 시간을 가져볼게요. ‘사울’이라고도 불렸던 이 ‘바울’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그는 마음속에 아주 불편한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게 뭐였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즉,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는 사람들을 매우 불편하게 여겼다는 거예요. 

재밌지 않나요? 서로 같은 하나님을 믿고 있는데, 예수님 때문에 ‘파’가 갈렸으니 말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각 교회를 다니며, 일명 ‘교인 청소’를 시작한 겁니다. 근데 더 재밌는 건, 바울은 그 일을 하며 아주 ‘자부심‘을 느꼈다는 사실이에요. 그러한 일에 보람을 느꼈단 말이에요. 왜냐면, 그 일을 옳은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에요. 

살기등등한 바울

바울은 열심히 ‘교인 없애기‘를 하던 중에, 어떤 ‘강렬한 사건’ 하나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제 우리는 그 사건에 관해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여러분들도 기억하겠지만, 바울은 아주 ‘살기-등등‘ 했어요. ‘살기 등등’하다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아시죠? ‘살기가 잔뜩 오른 상태’라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바울은 굉장한 ‘자기 의로움’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그 상태에서,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편지를 써달라고 했는데, 그 편지는 어디로 발송되는 편지였죠? ‘다마스커스(다메섹)’예요. ‘다마스커스’는 현재 ‘시리아‘라는 나라의 수도입니다. 그리고 ‘다메섹’은 ‘다마스커스’의 히브리식 발음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잊어버려도 괜찮아요. 어쨌든, 바울이 대제사장에게 공문을 요청한 이유는, ‘다마스커스’에 공문을 보내, 이 ‘예수 믿는 자’들을 체포하기 위함이었어요. 

 

시선이 차단된 바울

그렇게 그는 나름의 ‘열정’을 갖고 다마스커스로 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 게 있어요. ‘바울은 정말 우리와 다른 이상한 사람이었나?’를 말입니다. 

우리가 대충 성경을 읽을 땐, ‘다마스커스’ 경험 이전의 바울은, 뭔가 ‘참 이상한 사람’, ‘뭔가 돌I(아이)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쉬워요. 그런데 그는 그렇게 이상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바울은 단순히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개인감정으로 싫어한 게 아니었어요. 바울은 정말 열심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어요. 이게 굉장히 충격적인 사실이에요. 왜냐면, 좀 미안한 말이지만, 사실 ‘바울의 믿음’과 지금 ‘우리의 믿음’을 비교해 본다면, 비교 자체가 안 될 거예요. 그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있어서 엄청나게 뜨거웠던 사람이었어요. 

바울은 ‘뜨거운 유대인‘, ‘뜨거운 유대 사람‘이었어요. ‘유대교 신자‘였다는 말이에요. ‘유대교‘ 아시죠? ‘유대교‘는 우리가 믿는 그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을 믿는 종교예요. 물론, 하나님을 부르는 명칭은 다르지만, 그 전통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와의 차이가 어디에서 나냐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느냐 마느냐, 에서 차이가 납니다. 그게 가장 큰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어요. 뭔가 갑자기 ‘종교수업’을 하는 느낌적인-느낌은 뭐죠? 

아무튼, 처음에 바울은, 당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이단자로 여겼었어요. 그리고 그들을 박해하고 감옥에 넣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거룩한 사명감’에 도취 돼 있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재밌는 건, 바울은 뭔가 자기 스스로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여긴다는 사실이고, 지금 우리의 눈으로 봤을 땐 바울은 뭔가 ‘시선이 차단’된, 뭔가 잘못된 일을 행하고 있다고 보는 거예요. 

바울의 시선 강탈

그렇게 시선이 차단된 그가 무슨 일을 겪게 됩니까? ‘다마스커스’로 향하던 중, 갑자기 ‘환한 빛’과 ‘음성’을 듣게 됩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어제 배웠던 식으로 말해본다면, 바울의 시선이 어떻게 된 거죠? ‘시선이 강탈’된 사건이 발생한 거예요. 

시선이 강탈된 바울은 3일 동안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한 채로 있었다고 했어요. 그런 그가 어떤 사람의 도움을 받게 되는데, 그 사람의 이름이 뭔지 아시나요? ‘아나니아‘예요(아나(놔)-니(너)야?). 바울은 ‘아나니아’라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관해 설명을 듣게 되고, 그러고 나자,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 시력을 회복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제 새로운 시선을 갖게 된 거예요. 여러분, ‘열정’이란 참 좋은 말인데, 바울의 열정은, 옳은 것을 보지 못하는 ‘시선이 차단된’ 상태에서의 열정이었습니다. 이 부분을 우리가 유심히 봐야 합니다. 

막아서시는 하나님

그런데, 그러고 나서의, ‘바울 이야기’도 참 흥미롭습니다. ‘빛’과 자신을 부르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이 바울은, 그 이후로 늘 승승장구하기만 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바울은 확실히 변했습니다. 180도 변했어요. 180도 변했다니, 이런 글귀가 생각납니다. “이젠 180도 달라진, 너의 표정 그 말투, 너무 따뜻했던 눈빛 네 향기까지도 (벤-180도)” 정말 바울은 이렇게 변했어요. 앞장서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던 그가, 앞장서서 ‘예수를 전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그의 표정과 말투, 눈빛이 이전과는 다르게 바뀐 겁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이 동네 저 동네를 돌아다닙니다. 물론 혼자 다닌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작은 어벤져스’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였죠? ‘실라’와 ‘디모데’였습니다. 믿음 좋고 평판 좋은 ‘디모데’와, 바울의 소중한 파트너인 ‘실라’는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데 그때,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죠? ‘바울 일행‘이 가는 곳곳마다 막히는 일이 발생했어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이들의 길목을 막으신 겁니다. 원래 ‘바울 일행’은, 지금의 터키 서쪽에 해당하는 ‘아시아’로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했는데, 성령께서 그들의 길목을 막으시더니, 현재의 터키 동쪽에 해당하는 ‘브루기아 & 갈라디아’라는 곳으로 가게 합니다. 

그리고 그곳을 거쳐, 다시 터키 땅의 서쪽인 ‘무시아 & 비두니아’ 지방으로 향하려 하는데, 다시 ‘예수님의 영’이 허락하지 않아, 그곳으로 못 가게 되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바울 일행‘은 아주 당황했을 겁니다. 어째 ‘주님의 일‘을 좀 하려고 하는데, 가는 족족 하나님이 막아서니 그들은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시선 두는 연습

그러던 어느 날, 바울은,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자신의 땅으로 건너와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하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일을 계기로, 전혀 예상치 못한 땅, 계획에 없던 땅 ‘마케도니아’로 가게 됩니다. 오늘 이 수련회 마지막 말씀으로 나눌 이야기는 딱 여기까지입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바울의 시선‘은 여러 번 바뀝니다. 먼저 자신의 의로움에만 사로잡혔던 ‘시선이 차단’되는 시간이 있었고, ‘다마스커스’에서 예수님과 만나는 ‘시선이 강탈’되는 시간이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시간과 하나님의 뜻‘에 조율하게 되는 ‘시선 일치’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바울과 그 일행은, 하나님의 시선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 ‘긴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바울은 아마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 자신이 하려는 일이 계속 막힌다고 여겼을 수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았을 땐, 바울 일행에게 이때는 ‘새로운 길‘이 열리는 시기이기도 했어요. 이 말은 곧, 하나님께서 평소 우리도 어떻게 이끌어 가실지 알 수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자꾸만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 두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하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또 ‘예수님께서는 이때, 이 상황에 어떻게 행동하실까?’ 또는 ‘하나님이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를 자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자신에게 질문 던지기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여러분, 세상에는 우리의 ‘시선을 빼앗는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갈수록 더 많아질 거예요. 그런데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여러 가지 것에 시선을 빼앗기는 일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한 겪을 수밖에 없는 일이에요. 하나님이 그 정도도 이해 못하는 양반은 아니에요.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거예요. 하나님의 시선과 일치를 이루면 더 즐거움이 많다는 거예요. 지금 우리 친구들에게 이 말이 잘 와 닿지 않을 거예요. 저도 30대 중후반인 이제 와서야, 그 의미를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거든요. ‘성경의 말씀‘과 ‘선생님들‘이 여러분을 더 못 살고 괴롭히기 위해 이런 말들을 전하는 건 아닐 거 아니에요? 여러분, 하나님의 시선과 일치를 이루는 연습을 많이 하세요. 하나님께선 어떻게 생각하실까, 예수님께선 이 상황에 이렇게 행동하셨겠지, 하나님이 나에게 바라는 게 뭘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도 ‘하나님의 시선‘과 일치를 이루는 연습인 거예요. 

쉽진 않겠지만, 앞으로 맞이할 시간 동안, 하나님의 시선과 일치를 이뤄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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