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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시편 (12)] 다시 배우는 신앙

20231214 청파교회 새벽설교

 

다시 배우는 신앙

 

<시편 59편 16-17절>

 

16. 그러나 나는 나의 힘 되신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내가 재난을 당할 때에, 주님은 나의 요새, 나의 피난처가 되어 주시기에, 아침마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노래하렵니다.

17. 나의 힘이신 주님, 내가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하나님은 내가 피할 요새, 나를 한결같이 사랑하시는 분."

 

 

다윗에게 일어난 일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은 시편 59편입니다. 시편 59편의 제목에는 낯선 단어들이 적혀 있습니다. 그 단어는 알다스헷과 믹담입니다. 이 두 단어의 소갯글을 보면, 첫 번째로 알다스헷은 지휘자의 안내에 따라 이 알다스헷에 맞추어 노래를 부른다고 되어 있고, 두 번째 믹담에 관한 소개는 간단히 다윗의 믹담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먼저 알다스헷의 뜻은 '멸하지 마십시오, 없애지 마십시오'입니다. 생명을 지속하기 위한 바람이 이 단어 안에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믹담의 뜻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추측하건대, 이 믹담이라는 것은 노래의 한 종류가 아니면 시를 낭송하는 하나의 방식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어쨌든 시편 59편의 시에 제목에는 이러한 알다스헷, 믹담이라는 표현이 소개되고, 뒤이어 이 시의 배경이 등장합니다.

 

시편 59편은 간단히 말해, 다윗을 시기한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사람을 보냅니다. 그리고 사울이 보낸 사람이 다윗이 머무는 집을 감시합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 가운데 다윗이 지은 시가 바로 시편 59편입니다. 다윗이 처한 상황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다만 다윗이 엄청난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을 거라고 추측할 따름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의 영역은 뭐라고 단정 짓기 어려운 영역입니다. 좋은 삶이란 결국 내가 시시각각 죽음 앞에 선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며 사는 것임을 알면서도 가까이 쫓아온 죽음의 공포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누군가 나를 죽이려는 마음으로 바라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온몸이 굳어버리는 불안의 극한의 상태가 될 것입니다. 다윗은 바로 이러한 상황 가운데 오늘의 노래를 불렀던 것입니다.

 

기도자의 요청

 

먼저 기도자는 주님 앞에 간곡히 호소합니다. "나의 하나님, 내 원수들에게서 나를 구원해 주시고, 나를 치려고 일어서는 자들에게서 나를 지켜 주십시오. 악을 지어내는 자들로부터 나를 구해 주시고, 피 흘리기 좋아하는 자들에게서 나를 건져 주십시오." (1-2)

 

기도자는 주님 앞에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합니다. 그는 사람을 해하기를 좋아하는 자들로부터 건져주시기를 간절히 요청합니다. 그리고는 말합니다. 자신은 무고하게 박해를 받고 있음을 말입니다. 사람이 가장 억울해할 때가 언제나 하면, 오해를 받거나 억울한 일을 당할 때입니다. 평소에 말이 많지 않은 사람이더라도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되면, 내 속에서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데 더구나 억울한 일의 결과가 자신의 죽음이라면, 사람이 그러한 상황을 홀로 견딘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자는 주님께 간곡히 요청합니다. 자신을 해하려는 자들을 벌하여 주시고, 자신의 권리를 되찾아달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기도자는 자신을 해치려는 자들을 개에 비유하는데, 저녁이 되면 자신을 잡으려는 자들이 마치 개처럼 짖어 대며, 성 안을 이리저리 쏘다닌다고 말합니다. 개라는 동물은 중동의 여러 성읍에서 매우 골칫거리였는데, 기도자는 적들을 이러한 개들에 비유한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쉴 공간이 필요합니다. 물론 쉴만한 시간이나 상황도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은 쉴 공간, 쉬어야 할 시간,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상황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것들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사람은 엄청난 불안감 속에서 하루하루 큰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기도자의 처지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는 지금 어디를 가도, 하루 중 언제가 되어도 편히 쉴 수 없었습니다.

 

기도자의 바람

 

그런데 8절에 넘어가면, 기도자의 노래가 호소가 아닌 고백과 확신의 형태로 바뀌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은 내가 피할 요새이시니, 주님만을 바라'본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혹시 주님이 자신이 주님만을 믿고 따르는 자임을 잊으셨을까 하여 주님을 향한 사랑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 반드시 원수들의 멸망을 보게 해 주실 거라고 확신합니다.

 

이어서 기도자는 주님께 흥미로운 내용을 담아 기도를 드리는데, 그는 원수들을 아주 말살하지는 말아 달라고 요청합니다. 억울하고 화가 난 사람이라면, 당장 눈앞의 적들을 없애고 싶어 할 텐데, 기도자는 그렇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원수들을 그냥 죽여서는 안 된다고 요청합니다. 그가 이렇게 기도한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그 이유는 누군가에게 갑자기 닥친 재난은 매우 고통스럽긴 하겠지만, 갑자기 닥친 만큼 또 쉽게 그날의 기억과 고통이 잊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자가 얼마나 억울하고 화가 났는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기도자는 원수들이 자신의 잘못을 쉽게 잊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시인을 통해 배우는 신앙

 

이렇게 기도자는 자신의 무고함을 주님 앞에 아뢰었고 그리고 원수들을 벌하여주시기를 요청한 다음, 마지막으로 다시 주님 앞에 사랑고백을 드립니다.

 

문득 어르신들이 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범한 일상이 가장 좋은 일상이라는 말말입니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는 비단 어르신들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삶에 우여곡절이 많았던 사람이나 쉼과 여유가 없이 계속 앞만 보며 달린 사람 그리고 원치 않는 일들에 휘말려 그 일을 책임지고 사는 사람들 모두의 바람이기도 할 것입니다.

 

특별히 주님 앞에 잘못 행한 것이 없었던 오늘의 시인은 자신을 둘러싼 오해와 억울함 그리고 죽음의 위협까지 받고 살았습니다. 바로 오늘의 시주님을 잘 믿는 사람에게도 삶의 어려움이 있을 수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었고 또 좋은 삶특별한 삶이 아니라 평범한 삶임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내 삶에 어려움이 닥쳤다고 하여, 내게 특별한 죄나 잘못이 많아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음을 아는 것과 또 때론 가슴을 격양시켜 주는 삶의 순간도 필요하지만, 그보다는 좋은 삶이란 자극적이지 않고 덜 흥분되더라도 주님 앞에 평범하고 안온한 일상이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잊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살롱(salon)에서 성경에 담긴 생명과 평화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with 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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