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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시편 (15)] 네가 노래를 부르지 않으니

20230104 청파교회 새벽설교

 

네가 노래를 부르지 않으니

 

<시편 74편 22-23절>

 

22. 하나님, 일어나십시오. 주님의 소송을 이기십시오. 날마다 주님을 모욕하는 어리석은 자들을 버려두지 마십시오.

23. 주님께 항거해서 일어서는 자들의 소란한 소리가 끊임없이 높아만 가니, 주님의 대적자들의 저 소리를 부디 잊지 마십시오.

 

 

시인이 처한 상황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은 시편 74편입니다. 오늘의 시인은 매우 어렵고, 난감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시인이 속한 나라가 지금 환난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환난이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럼 시인은 대체 어떤 환난을 당했는지가 궁금해집니다. 시인이 당한 환난은 바로 주님의 분노로부터 온 환난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방 나라들을 불러들여 자신의 분노를 드러내셨습니다. 주님이 분노하신 이유는 명확합니다. 백성들이 자신으로부터 떠났기 때문입니다.

 

오늘 시의 배경이 정확히 언제인지 알 순 없으나, 그때를 유추할 만한 힌트가 등장합니다. 3절과 7절에 주님의 성소가 훼손되었다거나 누군가 성소에 불을 질렀다는 것 그리고 4절에 주님의 예배 장소로 들어와서 승리의 표로 깃대를 세웠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바로 그 힌트입니다. 이러한 묘사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때를 떠올리기에 충분해 보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주전 587년 파괴됩니다. 당시 예루살렘을 침범한 나라는 바빌론이었습니다. 바빌론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성소를 파괴하였고, 그곳에 이방의 신들을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던 예배의식 또한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시인은 바로 이렇게 예루살렘 성전이 함락된 때에 살던 인물이 아니었을까 유추하게 됩니다.

 

주님, 기억해 주십시오

 

먼저 시인은 주님께 한탄하듯 간구합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우리를 이렇게 오랫동안 버리십니까? 어찌하여 주님의 목장에 있는 양 떼에게서 진노를 거두지 않으십니까?"(1) 시인은 계속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 때문에 힘겨워합니다. 그리고 그 힘겨움을 견디기 어려워 주님께 도움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계속 주님의 응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과거 주님과 맺은 관계를 다시 돌아봅니다. 그리고 주님이 잊으셨을까 하여, 그 관계를 다시 상기시켜 드리고자 합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먼 옛날, 주님께서 친히 값 주고 사신 주님의 백성을 기억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친히 속량 하셔서 주님의 것으로 삼으신 이 지파를 기억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거처로 삼으신 시온 산을 기억해 주십시오."(2)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맺은 관계를 결코 잊지 않으셨을 겁니다. 시인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절박해지면, 작은 연결고리라도 붙잡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입니다. 시인은 혹시 주님이 잊으셨을까 하여, 주님과 맺은 관계를 근본부터 돌아봅니다.

 

하나님을 만날 장소

 

적들은 현재 승승장구 중입니다. 서두에 말씀드렸던 주님의 성전을 훼손하는 묘사가 4절부터 이어서 등장합니다. 8절에 그들의 기세가 현재 어떠한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그들은 "씨도 남기지 말고 전부 없애 버리자" 하고 마음먹고,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을 만나 뵙는 장소를 모두 불살라 버렸습니다."(8) 적들은 하나님과 관계된 모든 흔적을 지우는 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날 장소가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사실 우리는 꼭 예배당이 아니어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순간,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마 27:51). 그래서 우리는 꼭 성전이 아니어도 어느 곳에서 언제든지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도 구별된 장소나 공간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일터나 가정에 주님과 온전히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참 좋겠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구별된 공간 다시 말해, 예배당과 같은 장소가 필요합니다. 어딘가에 들어갔을 때, 일상의 관성이 끊어지고 무거운 짐이 벗겨지는 그런 공간! 그리고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바로 교회의 예배당이 가진 중요한 역할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의 원수들이 바로 이러한 공간을 모두 없애버린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어디서 만나야 하나 시인은 막막했을 것입니다.

 

주님이 행하실 정의

 

시인은 혼란스럽습니다. 자신들의 죄가 깊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주님의 성소가 불타서 없어지는 것을 주님이 가만히 지켜보신다는 것을 시인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주님께 호소합니다. "하나님, 우리를 모욕하는 저 대적자를 언제까지 그대로 두시렵니까? 주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저 원수를 언제까지 그대로 두시렵니까? 어찌하여 주님께서 주님의 손, 곧 오른손을 거두십니까? 주님의 품에서 빼시고, 그들을 멸하십시오."(10-11)

 

시인은 주님이 다시 정의를 행해 주실 것을 간곡히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행하실 그 정의가 무엇인지 후반부에 구체적으로 등장합니다. 21절에서 그는 말합니다. "억눌린 자가 수치를 당하고 물러가지 않게 해 주십시오. 가련하고 가난한 사람이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게 해 주십시오."(21) 주님이 행하실 정의는 분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이제는 부디 용서해 주시고 그리고 무엇보다 힘없고 가난한 자들이 받는 억압과 수치를 없애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그날이 속히 도래하여 모든 백성이 다시 주님을 찬양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한 걸음 내딛을 용기

 

시인은 주님께 마지막으로 요청합니다. 그의 마지막 호소는 또렷하고 명확합니다. 그리고 힘이 있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하나님, 일어나십시오. 주님의 소송을 이기십시오. 날마다 주님을 모욕하는 어리석은 자들을 버려두지 마십시오. 주님께 항거해서 일어서는 자들의 소란한 소리가 끊임없이 높아만 가니, 주님의 대적자들의 저 소리를 부디 잊지 마십시오."(22-23)

 

우리는 살다 보면, 주님의 정의가 어둠에 가려진 시기를 보낼 때가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외면한 채, 침묵하고 계실 때를 경험하곤 합니다. 그럴 때는 주님의 가르침도 그리고 주어진 일상도 성실히 살아갈 수 없습니다. 길을 잃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은 우리를 위해 보이지 않는 속도로 계속 일하고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앞이 캄캄하고 혹은 속도가 더디더라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내 삶의 몫을 성실히 살아내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노력한 결과가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한 걸음이라도 내딛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나는 실패해도 결국 주님은 승리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루는 꾀꼬리에게 물으셨습니다. "꾀꼬리야, 네 노랫소리는 나를 기쁘게 해 주는데 왜 요 즘엔 노래를 부르지 않니?" 꾀꼬리가 불평 섞인 목소리로 말합니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하도 커서 내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걸요." 하나님께서는 딱하다는 듯이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네가 노래를 부르지 않으니, 개구리 울음소리 가 더 크게 들리지 않니?"

 

우리가 하는 일이 작고 보잘것없어 보여도 주님의 귀에는 크게 들린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살롱(salon)에서 성경에 담긴 생명과 평화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with 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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