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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시편 (16)] 미련한 믿음

20240111 청파교회 새벽설교

 

미련한 믿음

 

<시편 79편 11-13절>

 

11. 갇힌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주님께서 들어 주십시오. 죽게 된 사람들을 주님의 능하신 팔로 살려 주십시오.

12. 주님, 우리 이웃 나라들이 주님을 모독한 그 모독을 그들의 품에다가 일곱 배로 갚아 주십시오.

13. 그 때에 주님의 백성, 주님께서 기르시는 양 떼인 우리가, 주님께 영원히 감사를 드리렵니다. 대대로 주님께 찬양을 드리렵니다.

 

 

아삽의 시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은 시편 79편입니다. 시편 79편의 제목에는 <아삽의 시>라고 적혀 있습니다. 아삽이라는 이름은 시편 50편에 가장 먼저 등장했습니다. (이미 들어서 아시겠지만) 아삽은 다윗 왕 때에 성전의 음악을 담당하던 레위인1)이었습니다. 어쨌든 아삽은 그렇게 잠시 이름을 비췄다가 시편 74편에 이르러서 재등장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등장한 아삽의 시는 83편까지 이어집니다.

 

오늘의 시는 (마치 다윗의 이름은 붙었지만, 다윗이 모든 시를 쓴 게 아닌 것처럼) 아삽의 이름이 붙었어도 아삽 개인의 저작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아마도 그의 자손들이 그의 이름을 빌려서 짓지 않았나 추측해 봅니다.

 

그런데 오늘의 시는 <아삽의 시>라고 평범하게 이름이 붙은 것에 반해, 그 속에 담긴 내용은 매우 절박하고 처절합니다. 그 이유는 시인은 전쟁으로 인해 엄청난 재난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오늘의 시인은 (시편 74편처럼)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때를 살았던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처한 상황

 

시인의 첫 음성을 들으면 그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를 매우 처절하면서도 끔찍하기까지 합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하나님, 이방 나라들이 주님의 땅으로 들어와서, 주님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을 돌무더기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종들의 주검을 하늘을 나는 새들에게 먹이로 내주고, 주님의 성도들의 살을 들짐승에게 먹이로 내주고, 사람들의 피가 물같이 흘러 예루살렘 사면에 넘치게 하였건만, 희생당한 이들을 묻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웃에게 조소거리가 되고, 주변 사람들에게 조롱거리와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1-4)

 

당시의 상황이 머릿속에 선명히 그려집니다. 이방나라들이 주님의 땅으로 들어와서 성전을 훼손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고 따른 사람들을 모두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사람들의 피가 물같이 흐른다는 말은 상상하기조차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전히 침묵 가운데 계십니다.

 

다음 세대가 마주한 상황

 

시인에게 이보다 더 확실한 요청의 명분은 없습니다. 주님의 이름이 더럽혀졌고, 주님의 명예는 완전히 실추됐습니다. 이제는 주님이 나설 때라고 시인은 느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또한 모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토록 침묵하시는지를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주님, 언제까지입니까? 영원히 노여워하시렵니까? 언제까지 주님의 진노하심이 불길처럼 타오를 것입니까?"(5)

 

시인은 주님이 이방나라를 들어서 예루살렘을 벌하시고 그리고 아무리 부르짖어도 응답하지 않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들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벌하심은 자신들의 죄가 아니라 조상들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8절에서 그는 말합니다. "우리 조상의 죄악을 기억하여 우리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주님의 긍휼하심으로 어서 빨리 우리를 영접하여 주십시오. 우리가 아주 비천하게 되었습니다."(8)

 

오늘의 시인을 포함한 세대들은 예루살렘 멸망을 직접 초래한 세대는 아닙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유산처럼 주어진 형벌을 면해달라고 주님께 요청합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조상들의 죄를 자신들에게 돌리지 말아 달라'는 이 말이 좀 독선적인 모습으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의 이 말은 개인적인 의견이라기보다는 신명기에 나온 이야기에 근거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신명기 24장 16절 보면, "자식이 지은 죄 때문에 부모를 죽일 수 없고, 부모의 죄 때문에 자식을 죽일 수 없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만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개인이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을 일족 전체에게 지우지 말아야 한다는 고대세계의 원칙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당하신 모욕

 

물론 그가 이렇게 책임을 조상들에게 전가했다고 하여, 자신들에게는 죄의 흔적이 전혀 없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곧이어 9절에 우리의 죄 또한 용서해 달라고 주님께 간구합니다. 그러니까 시인의 관심은 잘잘못을 따지는 데 있지 않고, 그저 이 극심한 재난에서 모두를 구원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갇힌 사람들의 신음소리를 주님께서 들어주십시오. 죽게 된 사람들을 주님의 능하신 팔로 살려 주십시오. 주님, 우리 이웃 나라들이 주님을 모독한 그 모독을 그들의 품에다가 일곱 배로 갚아 주십시오."(11-12)

 

시인은 자신들의 처지가 회복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처지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명분을 주님의 정의가 회복되는 것에 의존하여 간구했습니다. 지금 이방나라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패배를 보며, 하나님이 패배하셨다고 느낍니다. 시인은 자신들의 처지도 처절했지만, 주님이 당하신 모욕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믿음

 

오늘 시인이 처한 상황은 매우 어두웠습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절망 가운데에서도 희망을 붙들었습니다. 시인의 끈기가 참 대단해 보입니다. 그의 믿음과 다시 시작하려는 용기가 참으로 부럽기까지 합니다. 사실 믿는다는 것은 참 미련한 행위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따른다는 것부터가 세상의 논리로 잘 설명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이란 그런 겁니다. 미련한 선택을 하고 남들과는 다른 속도로 사는 생활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결과는 주님께 맡기십시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과정에 집중하는 것뿐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어둠 가운데서도 빛을 보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 대상 6:31-33;39, 25:1-2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살롱(salon)에서 성경에 담긴 생명과 평화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with 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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