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청파 Note

[청파 Note / 시편 (23)] 시인의 시선 닮기

20240229 청파교회 새벽설교

 

시인의 시선 닮기

 

<시편 114편 1-4절> 

 

1.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야곱의 집안이 다른 언어를 쓰는 민족에게서 떠나올 때에, 

2. 유다는 주님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다. 

3. 바다는 그들을 보고 도망쳤고, 요단 강은 뒤로 물러났으며, 

4. 산들은 숫양처럼 뛰놀고 언덕들도 새끼양처럼 뛰놀았다. 

 

 

다른 언어를 쓰는 민족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은 시편 114편입니다. 시편 114편에는 하나님이 하신 놀라운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바로 출애굽 사건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시편의 저자를 말할 때, 시인이라고 칭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 114편을 쓴 저자는 정말 전문 시인에 가깝게 상황을 묘사합니다. 그가 사용한 표현들은 시적이라고 표현하기에 충분해 보입니다. 

 

먼저 시인은 오늘 본문 1절에 이집트다른 언어를 쓰는 민족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그냥 다른 민족이라고 칭해도 됐을 텐데, 이집트인들을 다른 언어를 쓰는 민족이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언어는 그야말로 나라말을 뜻할 것입니다. 서로 다른 모국어를 뜻할 것입니다. 하지만 시적 상상력을 발휘해 보면, 오늘 시인의 묘사가 훨씬 깊은 뜻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라는 철학자언어를 가리켜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사용하는 언어그가 누구인지를 규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하이데거가 말하는 언어는 외래어/외국어를 말하진 않습니다. 누군가 평소 사용하는 일상의 언어를 말할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것밖으로 나오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언어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나의 내면에 어떤 것이 채워져 있느냐에 따라 그것이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평소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추구하며, 내가 선망해 왔던 것들이 내 안에 쌓이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스스로를 형성하여서 외부로 표출되게 됩니다

 

이집트는 강대국이었고, 약소국들을 지배하고 다스렸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많은 영토를 차지하고, 자신들의 영향력을 넓히는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들의 언어에는 그들이 추구한 것이 담겨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오늘의 시인이 이집트인들을 향해 다른 민족이 아닌 다른 언어를 쓰는 민족이라고 말한 것은 참 적확한 표현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주님의 성소, 주님의 영토

 

2절로 넘어가면, 2절은 꽤나 파격적인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나올 그때를 이렇게 상상했습니다. “유다는 주님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다.”(2) 이 말은 그리 대단한 말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매우 급진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인은 이스라엘 민족주님의 성소가 되었고, 주님의 영토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주님을 예배드리는 장소가 지금까지 건물이나 공간이었다면, 그것이 이제는 사람 중심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하나님을 만나는 곳예배당이 아니라 공동체가 되었다는 말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 성소의 휘장을 가르셨습니다. 마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순간,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다고 보도했습니다(마 27:51). 이 사건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가장 큰 상징은 성전 중심 체계가 무너지고, 이제는 누구나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서 예배드릴 수 있게 되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시편의 저자는 바로 출애굽 사건을 통해 이러한 미래를 보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주님의 성소가 되었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다.”(2) 위기를 기회로 여긴 시인의 안목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

 

이어서 시인은 말합니다. “바다는 그들을 보고 도망쳤고, 요단 강은 뒤로 물러났으며, 산들은 숫양처럼 뛰놀고 언덕들도 새끼양처럼 뛰놀았다.”(3-4) 

 

출애굽 한 이스라엘 민족은 큰 벽을 마주하게 되는데, 그것은 커다란 바다였습니다. 뒤에는 이집트 군대가 쫓아오고, 앞에는 큰 바다가 놓여 있었습니다.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발만 동동거리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나타나 모세를 통해 바다를 가르시고, 그곳을 건너게 하셨습니다. 시인은 바로 그날의 상황을 “바다는 도망쳤고, 요단 강은 뒤로 물러났으며, 산들은 숫양처럼 뛰놀고, 언덕들도 새끼양처럼 뛰놀았다.”라고 묘사했습니다. 

 

시인은 이 모든 일을 지켜보며,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능력에 다시 한번 감탄했습니다. 그래서 바다와 강과 산과 언덕들을 의인화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바다야, 너는 어찌하여 도망을 쳤느냐? 요단 강아, 너는 어찌하여 뒤로 물러났느냐? 산들아, 너희는 어찌하여 숫양처럼 뛰놀았느냐? 언덕들아, 너희는 어찌하여 새끼양처럼 뛰놀았느냐?”(5-6) 시인은 주님의 크심 앞에 모든 창조세계가 낮고 작아짐을 느꼈습니다

 

시인은 마지막으로 노래합니다. “온 땅아, 네 주님 앞에서 떨어라.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어라. 주님은 반석을 웅덩이가 되게 하시며, 바위에서 샘이 솟게 하신다.”(7-8) 시인주님께 불가능한 일이란 없음을 노래했습니다. 주님은 딱딱한 바위가 웅덩이가 되게 하시고, 메마른 바위에서 샘이 솟게 하는 분임을 그는 노래했습니다. 

 

모든 것이 지나고 난 뒤

 

시편 114편은 짧은 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 짧은 시 안에는 시인의 상상력이 풍성하게 담겨 있습니다. 시인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한 사건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그날에 있었던 일들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하신 일들매우 놀랍게 다가왔습니다. 큰 감동에 사로잡힌 시인세상이 주님 앞에 복종하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사건의 중심에 있을 때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거리가 미를 창조한다고 하지만, 힘든 일의 한복판에 있을 때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러한 한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모든 것이 지나고 난 뒤에 그리고 모든 감정이 가라앉고 나서, 그리고 모든 것이 제자리를 잡았을 때라야 우리는 상황을 조금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셨다는 사실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제대로 파악될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의 한복판을 지날 때주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잘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평소에 자주 의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잊더라도 다시 기억하려고 애쓰는 것! 이것이 참 중요합니다. 이 사실을 가슴에 잘 새기며 살아가는 오늘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살롱(salon)에서 성경에 담긴 생명과 평화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with 청파교회

www.youtube.com

 

728x90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