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128 청파교회 새벽설교
다시 시작하시는 하나님, 끝내 지키시는 하나님
<예레미야 37장 21절>
21. 시드기야 왕은 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려, 예레미야를 근위대 뜰에 가두고, 그 도성에서 양식이 모두 떨어질 때까지 빵 만드는 사람들의 거리에서 빵을 매일 한 덩이씩 가져다가 예레미야에게 주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예레미야는 근위대 뜰 안에서 지내게 되었다.
잠시 물러난 바빌로니아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은 예레미야서 37장입니다. 예레미야서 34-37장은 남왕국 유다의 왕과 백성들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마지막 경고가 담겨 있습니다.
오늘 다룰 예레미야서 37장은 남왕국 유다의 왕이 여호야긴(고니아)에서 그의 아들 시드기야로 넘어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는 본문에서도 언급했듯이 왕이나 그의 신하나 그 땅의 백성들 모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던 때였습니다(2).
먼저 시드기야는 여후갈과 스바냐를 예레미야에게 보냅니다. 두 사람을 예레미야에게 보내어 자신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기도드려달라는 요청을 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등장하는 5절에서 당시 남유다의 상황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 등장합니다. 5절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당시는 “바로의 군대가 이미 이집트에서 출동했고, 예루살렘을 포위했던 바빌로니아 군인들은 그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에서 퇴각한 때”(5)입니다. 바로의 군대는 예루살렘을 돕기 위해 진군했습니다. 남유다가 바빌로니아에게 반기를 들고 있는 동안에는 이집트는 그들의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 군대는 바빌로니아에게 둘러싸인 남유다를 돕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던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바빌로니아 군대는 이집트와 전투를 하기 위해 잠시 예루살렘으로부터 물러났습니다.
확고한 하나님의 마음
바빌로니아가 물러나자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나타나 자신의 뜻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곧 ‘바로의 군대는 제 나라 이집트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마치 하나님이 시드기야의 요청을 들어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바빌로니아 군대는 다시 와서 이 도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불질러 버릴 것이다. 나 주가 말한다. 너희는 바빌로니아 군대가 틀림없이 너희에게서 떠나갈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 너희 자신을 속이지 말아라. 그들은 절대로 철수하지 않을 것이다.”(8-9) 하나님께서는 바빌로니아가 이집트 군대를 물리치고 나면 곧 다시 돌아와 다시 남유다를 공격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혹시 남유다가 바빌로니아를 물리치는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들이 다시 일어나 예루살렘 도성을 불태워버릴 거라고말씀하셨습니다(10). 남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마음은 확고해 보입니다.
구치소에 갇힌 예레미야
이어서 예레미야에 관한 한 가지 에피소드가 등장합니다. 바빌로니아 군대가 이집트 군대와 맞서느라 잠시 예루살렘에서 철수합니다. 그때 예레미야는 볼 일이 있어서 예루살렘 도성을 나오려고 했습니다. 성경은 그 일에 관해서 말하기를 예레미야의 볼 일은 ‘집안의 재산상속을 물려받을 일’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재산상속을 물려받는 일’은 아무래도 예레미야서 32장 7-8절에 언급된 밭을 산 것과 관련된 일로 여겨집니다.
이러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 예레미야는 잠시 예루살렘을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북쪽 성벽문인 ‘베냐민 문’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곳에 있던 수문장 ‘이리야’가 의심하듯 예레미야를 붙들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지금 바빌로니아 군인들에게 투항하러 가고 있소.”(13) 예레미야는 어의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렇지 않다고 해명하였으나 ‘이리야’는 그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예레미야를 체포하여 고관들에게로 데려갔습니다. 고관들의 생각 또한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예레미야의 말을 믿지 않았고 그를 서기관 요나단 관저에 있는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방금 예레미야를 가둔 곳을 감옥이라고 표현하였는데 그 이유는 개역개정에 ‘옥’이라고 표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새번역에서는 이 ‘감옥’을 ‘구치소’라고 명명하였는데, 고대 근동에서 ‘감옥’은 아직 형이 집행되지 않은 자들이 머무는 곳을 일컫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치소’라는 개념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에서는 우리가 아는 그러한 감옥으로서의 개념이 아직 일반화되지 않은 상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호소
그러던 어느 날, 시드기야는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 있던 예레미야를 왕국으로 데려오게 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은밀히 묻습니다. “주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신 것이 없”는 지를 묻습니다. 예레미야는 “있다.”라고 답한 뒤에 “임금님께서는 바빌로니아 왕의 손아귀에 들어가실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레미야는 그동안 답답했던 마음을 호소하듯 왕에게 이야기합니다. “제가 임금님이나 임금님의 신하들에게나 이 백성에게 무슨 죄를 지었다고 저를 감옥에 가두어 두십니까?”(18) 그는 자신의 결백함이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매우 억울했습니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이기를 자신을 다시 서기관 요나단의 집으로 돌려보내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가 갇혀 있던 (요나단 관전에 있던) 구치소는 습기가 가득한 지하였고, 그가 그곳에 더 오래 머물러 있다가는 그는 이내 죽고 말 것입니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의 청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근위대 뜰’이라는 곳에 가두었습니다. 그곳은 예레미야의 적들이 그에게 함부로 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소량의 식량이긴 하나 빵을 먹으며 지낼 수 있었습니다.
남유다의 상황, 예레미야의 위기
오늘 우리는 예레미야서 37장을 통해 남유다가 맞이한 상황과 예레미야에게 닥친 위기를 알 수 있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남유다를 향한 징계의 마음을 돌이킬 생각이 없어 보이십니다. 남유다는 바로의 군대에 힘입어 바빌로니아로부터 벗어날 것처럼 보였으나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집트 군대는 바빌로니아게 패배할 것이고, 혹 남유다가 바빌로니아를 물리치게 되더라도 그들은 언제든 다시 일어나 예루살렘 도성을 불태워버릴 것입니다.
이어서 예레미야에게 일어난 일은 개인적인 일이라곤 하였으나, 그 개인적인 일이 ‘밭을 사는 일’과 관련된 것이라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시련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그는 (생명 유지가 힘든) 열악한 감옥에 갇혀 있다가 이내 상황이 좋은 곳으로 옮겨지긴 하였으나 그가 주님의 일을 하다가 위험을 당한 것은 분명합니다.
이 두 가지가 우리 가슴속에 남습니다.
하나님이 일하는 방식
만약 우리가 예레미야 이야기 가운데 오늘 본문을 가장 처음 읽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은 완고하시고 한번 정하신 뜻을 돌이키지 않는 분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예레미야서 말씀 초반부에 이미 심판을 경고한 적이 있었고, 죄악 된 길에서 돌아설 것도 여러 차례 촉구한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서 30-33장에는 죄악된 길에서 돌이킬 경우, 이스라엘과 남유다에 임할 구원의 메시지 또한 들려주셨습니다.
잔인한 이야기일 수 있으나 새로 시작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남김없이 무너져야 할 때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는 고통과 슬픔을 감내하더라도 이전의 것들을 허물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남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는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주님은 ‘심판을 위한 심판’이 아닌 ‘시작을 위한 심판’을 감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예레미야에게 일어난 일을 보며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고난이 뒤따라 오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서 예언자를 뜻하는 히브리어 nabi의 어원은 nabu이고, 그 뜻은 '부르다'입니다. 그러니까 예언자는 ‘부름을 받은 사람’을 일컫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말하기 위해 부름을 받은 자들이 아닙니다. 예언자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것을 전하기 위해 부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것은 미래에 일어날 일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레미야에게 일어난 일을 보면, 부름을 받아서 일한다는 게 결코 쉽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끝내 주님이 그를 지키셨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일을 하며 고난을 당할 순 있으나 끝내 주님이 지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시작하시는 하나님, 끝내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는 오늘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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