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청파 Note

[청파 Note / 욥기 (9)] 오만하지 않은 신앙

20230914 청파교회 새벽설교

 

오만하지 않은 신앙

 

<욥기 36장 1-4절> 

 

1. 다시 엘리후가 말을 이었다. 

2. 조금만 더 참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하나님을 대신하여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3. 나는 내가 가진 지혜를 모두 다 짜내서라도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것을 밝히겠습니다. 

4. 내가 하는 이 말에는 거짓이 전혀 없습니다. 건전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지금 욥 어른과 더불어 말하고 있습니다.

 

 

욥과 엘리후의 입장 차이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은 욥기 36장입니다. 엘리후는 남의 이야기를 오래 듣고만 있었기 때문일까요? 그는 등장과 동시에 많은 말을 쏟아냅니다. 먼저는 욥에게 그러했고, 다음으로는 욥의 세 친구들에게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한 번 더 욥에게 자기 이야기를 쏟아냈습니다. 35장부터 이어진 엘리후의 말들은 엘리후가 지닌 젊음의 패기 때문인지 명료하기는 하나 거침없었습니다. 사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엘리후의 말욥의 세 친구의 말크게 다르지 않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엘리후는 가장 먼저 하나님의 의로움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나는 내가 가진 지혜를 모두 다 짜내서라도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것을 밝히겠습니다. 내가 하는 이 말에는 거짓이 전혀 없습니다. 건전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 지금 욥 어른과 더불어 말하고 있습니다.”(3-4) 

 

엘리후는 하나님이 의롭다는 사실을 이제 밝힐 터인데, 자신이 하는 말에는 조금의 거짓이나 의심 살만한 일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자기 말오류가 없다는 확신은 정말 대단한 자신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욥도 <욥기 36장>에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결코 악한 일을 행한 적이 없다고 맹세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을 공평한 저울에 달아본다면, 자신이 흠 없는 자임을 반드시 아실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도 엘리후 만큼 자기 자신을 매우 신뢰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확신엘리후의 확신과는 조금 다릅니다. 우리는 욥이 처한 상황과 엘리후가 처한 상황이 서로 같지 않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고 당한 자의 입장입니다. 그의 터전은 위태롭습니다. 그러나 엘리후의 터전안전합니다.그는 사고 당한 자에게 일어난 일을 그저 해석하고 판단하는 위치에 서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엘리후의 확신은 해석하는 자의 입장에서 우러나온 어떤 이성 중심의 확신이라고 할 수 있고, 욥의 확신은 모든 터전을 잃어버린 자에게서 나온 처절한 자기 경험이 중심이 된 확신인 것입니다. 

 

엘리후의 말

 

엘리후는 계속해서 자기 이성에 의지하여 공평과 정의의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엘리후도 이미 말씀드린 대로, 욥의 친구들처럼 분명한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에 대한 관념도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은 벌하시고, 의인의 권리는 옹호하신다는 입장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실 엘리후의 말틀린 부분이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선인과 악인을 구분하십니다. 하나님 편에 서고자 하는 자는 지키시고, 그렇지 않은 자는 외면하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분법적인 사고반드시 한계를 지닙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겪은 특수한 상황이나 혹은 아픔들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는 데에 그 한계점이 있습니다. 물론 엘리후도 의로운 사람조차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8). 하지만 그가 그렇게 말한 이유도 결국 죄에서 돌이키지 않는 의인에게도 극심한 고통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엘리후의 말한치의 오차도 없었지만, 그러나 그의 말에는 숨구멍이 나 있지 않았습니다. 듣는 이를 답답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말, 훌륭한 말도 날이 서 있거나 지나치게 사람을 옭아매게 만든다면 모두 쓸모없게 됩니다. 엘리후의 말욥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점점 구석으로 몰기에 충분했습니다. 

 

엘리후의 혼잣말

 

엘리후가 한 말 중에 욥에게 가장 상처가 되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 가운데에 등장합니다. 엘리후는 욥이 잘못된 자라고 확실하게 못 박습니다. 1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욥 어른은 마땅히 받으셔야 할 형벌을 받고 계십니다.” 엘리후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가 이렇게 말한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요? 13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의 근거욥이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 고통이 주는 권고에 귀 기울이지 않음에 있습니다. 엘리후는 이미 욥이 죄인임을 못 박은 채, 자신의 이야기를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엘리후22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하고 대단한지를 갖가지 자연현상을 통해 이야기합니다. 이쯤 되면, 엘리후의 이야기누군가를 향한 이야기라기보다는 거의 독백에 가까운 이야기라고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상상해 보건데, 이미 욥은 엘리후의 말귀를 닫은 지는 오래되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오만하지 않은 신앙

 

엘리후참 똑똑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에 관해 모르는 것이 없었고 또 그러한 지식 덕에 자신감으로 충만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넘치는 자기 확신점점 오만함으로 번져가는 걸 우리는 보게 됩니다. 신앙의 위험바로 이런 오만함에 있습니다. 우리는 늘 이러한 오만함을을 경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상식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 나라상식으로만 접근하는 세계가 아님은 분명하지만, 몰상식의 세계는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는 특히 사람을 대할 때, 몰상식해서는 안 됩니다. 

 

브라질 출신의 한 작가(파울로 코엘료)가 우아함오만함에 관해 비교해 놓은 글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우아함뭔가 고상한 취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인 친절한 대접이나 존경 혹은 예의범절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만은 증오와 시기를 유발하지만, 우아함은 존경과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오만한 이는 주변 사람들에게 굴욕감을 주지만, 우아한 이는 빛 속을 걸어 다닌다. 오만한 이는 지성을 선택된 소수만의 것이라 여기며 말을 복잡하게 꼬아서 하지만, 우아한 이는 복잡한 생각도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말로 풀어서 한다.” (파울로 코엘료, <아크라 문서>, 공보영 옮김, 문학동네, 2013, p.123) 

 

이 말은 신앙인들이 새겨 들어도 좋을 말입니다. 잘 믿는 사람내가 만나는 사람존경과 예의로 대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엘리후의 태도에서는 참 신앙인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신앙경험의 양이 쌓여갈 때 점점 깊어집니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들서로 간에 공유될 때, 우리의 신앙은 더 넓어질 수 있습니다. 바라기는 명철했으나 사람에 대한 존경과 배려가 없었던 이 엘리후의 모습반면교사 삼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작가야의 BibleSalon

말씀살롱(BibleSalon)입니다. 살롱에서 나누는 말씀 한잔!

www.youtube.com

 

728x90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