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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파 Note

[청파 Note / 출애굽기 (6)] 하나님과 만나는 내밀한 공간

20220318 청파교회 새벽설교

 

하나님과 만나는 내밀한 공간 

 

<출애굽기 33장 7-11절> 

 

7. 이스라엘 백성이 진을 칠 때마다, 모세는 장막을 거두어 가지고 진 바깥으로 나가, 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그것을 치곤 하였다. 모세는 그 장막을, 주님과 만나는 곳이라고 하여, 회막이라고 하였다. 주님을 찾을 일이 생기면, 누구든지 진 밖에 있는 이 회막으로 갔다. 

8. 모세가 그리로 나아갈 때면, 백성은 모두 일어나서 저마다 자기 장막 어귀에 서서, 모세가 장막으로 들어갈 때까지 그 뒤를 지켜보았다. 

9. 모세가 장막에 들어서면, 구름기둥이 내려와서 장막 어귀에 서고, 주님께서 모세와 말씀하신다. 

10. 백성은 장막 어귀에 서 있는 구름기둥을 보면, 모두 일어섰다. 그리고는 저마다 자기 장막 어귀에서 엎드려 주님을 경배하였다. 

11. 주님께서는,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이, 모세와 얼굴을 마주하고 말씀하셨다. 모세가 진으로 돌아가도, 눈의 아들이며 모세의 젊은 부관인 여호수아는 장막을 떠나지 않았다.

 

 

광야에 불어 닥친 폭풍


출애굽기 25장부터 시작된 예배 안내서의 설명이 끝났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앞으로 어떻게 자신을 예배해야 되는지 모세에게 상세히 그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참 안타까운 사실은 하나님의 이 가르침이 진행되는 동안,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우상을 섬기게 됐다는 사실입니다. 모세가 백성의 곁을 떠나고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순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부재의 시간을 견디지 못해 금송아지를 만들어 자신들의 불안을 달랬습니다. 

 

뒤이어 하나님의 커다란 심판이 따라옵니다. 하나님의 편에 선 레위 자손들의 손에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 중 3천 명 정도가 죽음을 맞게 된 것입니다(32:28). 한 차례 커다란 폭풍이 몰아쳤습니다. 이 폭풍이 가라앉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향해 백성들을 이끌고 조상들에게 약속한 땅으로 나아가라고 명합니다. 이제 다시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을 향해 한 걸음 내딛게 됩니다. 

 

모세의 회막

 

물론 살아남은 자들에게도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자신들의 몸에서 장식품을 떼어냈습니다. 이는 우상을 만들었던 자신들의 행동이 잘못된 것임을 뉘우치는 외적 행위임과 동시에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일정한 거리가 생겼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 행위는 마치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잘못을 뉘우칠 때 머리에 재를 뒤집어쓰고 베옷을 입던 다니엘과 또 요나서에 등장하는 니느웨 사람들의 모습과 유사해 보입니다(단9:3;욘3:5;마11:21). 광야의 백성들은 그렇게 조금은 참담한 모습으로 길을 떠나게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나아감과 멈춰 섬을 반복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는 길목마다 진을 쳤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진을 칠 때마다 뭔가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의 관계 회복을 위한 어떤 시도가 필요함을 느꼈던 모양입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진을 칠 때마다 장막 하나를 거두어 진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다가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주님과 만나는 곳이라 칭하며 ‘회막’이라고 불렀습니다. 누구든 주님을 찾을 일이 생기면 진 밖으로 나가 이 회막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회막에서 마치 친구에게 말하듯, 모세에게 말씀하셨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11). 

 

하나님을 기억하고 자신을 돌아볼 구별된 공간은 필요합니다. 일상의 관성을 끊어내기 위함입니다. 별도의 마련된 공간에서 시간을 보낼 때, 우리는 우리 몸과 마음에 드리운 삶의 무게나 먼지들을 털어낼 수 있습니다. 사실 교회의 예배당이 대표적인 곳이고, 여타의 다양한 종교들이 자신들이 믿는 존재를 묵상하기 위한 별도의 공간을 만드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공간 

 

요즘 교인들은 점점 지역 교회를 찾아가기 보다는 자신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와 부합하는 교회를 찾아 갑니다. 그래서 먼 동네나 지방에 있는 교회 혹은 다른 대륙에 있는 교회에 접속해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배우기도 합니다. 물론 온라인 접속이 보편화되면서 물리적인 거리가 크게 중요치 않게 됐지만, 그래도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물리적인 공간의 중요성입니다. 

 

우리의 사고와 감정은 생각보다 몸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몸의 상태가 어떤 지에 따라 또 몸이 무엇을 느끼느냐에 따라 생각도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육신을 입은 사람에게는 물리적 공간이 주는 영향력이 적지 않습니다. 혹시 가능하다면 일상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자신을 돌아볼 별도의 공간을 마련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집에서 이뤄질 수 있다면 더욱 좋을 듯합니다. 

 

철학자 김진영 선생은 그의 책 <상처로 숨 쉬는 법>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합니다. 여러분께서 생각하는 집은 어떤 곳인가요? 자신을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단절시켜 온전히 쉼을 누리는 곳이 바로 집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요즘 우리가 사는 집은 집이 아닐 수 있습니다. 김진영 선생은 우리에게는 인테리어가 없는 공간이 필요하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인테리어가 없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다름 아닌 내밀한 공간이에요. 그곳에서만 우리는 나를 만날 수 있죠. 나를 만날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타자의 꿈이 생겨요. 그리고 타자의 꿈이 생길 때에만 타자를 찾아나가기 위한 출발 혹은 여행에의 꿈이 생기겠죠. 사회적인 가치들로 인테리어화되어 있는 공간은 그런 꿈이 생길 수가 없어요. (김진영, <상처로 숨 쉬는 법>, 한겨레출판, 2021, p.362) 

 

집이란 단순히 추위를 피하고 외부의 공격을 막기 위해 생겨난 곳이 아닙니다. 우리는 집을 통해 나를 만나고 타자를 꿈꾸고 자유를 꿈꿔야 합니다. 이것이 집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공간의 이점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물론 크기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작은 테이블이 놓여 있는 공간에서 보내는 시간 혹은 잠들기 전에 잠깐의 시간을 마련할 수 있다면, 하나님과 관계가 지금보다는 더 친밀해지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별도로 마련한 그 공간에서 마치 하나님이 모세를 향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 말씀하셨던 그 음성을 여러분께서도 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삶이 주는 무게에서 우리를 건져주십시오. 주님을 기억하고 나 자신을 돌아보는 공간을 마련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을 통해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 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아멘. 

 

 

이작가야의 말씀창고

안녕하세요. 이작가야입니다. 다양한 감수성을 통해 말씀을 묵상합니다. 신앙이라는 순례길에 좋은 벗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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