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2013. 5. 16. 00:59Essay

 

 

프로이트는 사람의 증상 가운데 히스테리가 있음을 이야기했다. 히스테리는 다음의 짧은 글의 ‘그’와 같다. ‘우리에게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 그의 바로 그 노력을 우리가 알아차리기를 그가 원하고 있다는 사실’(p.152) 나를 불편하게 하는 내 안의 그 무엇, 끊임없어 나의 몸을 통해 말하고 있는 그 무엇이 있다. 이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숨겨진 욕망이 신체증상으로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증상을 정작 자신은 모른다. 하지만 알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으니 이는 ‘뭔가 스스로 말하려고 하는구나, 노력하고 있구나.’이다. 증상은 무의미한 심리적 교란이 아니다(p.153). 증상은 우리에게 말할 무엇인가 가지고 있기에 상대의 증상에 우리는 ‘귀’를 빌려줘야 한다. 이를 통해 증상이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타자 스스로가 알아차리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증상은 나도 물론 가지고 있는 것이기에 타자를 통해 나 스스로 알아차릴 필요가 있다. 증상은 좋은 것, 나쁜 것의 개념과 별개의 것이다. 반드시 없애 버려야 하는 것도 아니며 쉽게 없앨 수도 없는 것이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안에 머물고 있는 부정적인 것(히스테리 증상)과 함께 머물기를 즐겨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도 모르는 무엇인가가, 너도 모르는 무엇인가가 귀를 빌려 달라 이야기하고 있지 않는가.

 

자신에 대한 낯섦 즉, 주체를 찾는 과정은 어려운 일이지만 한 순간에 이루어지기도 한다. 우리가 세미나를 통해 공부하며 늘 깨닫는 부분이지만, 나는 나를 모른다. "'모순'은 '타자들에 대한' 나의 존재와 타자들에 대한 관계와는 별도인 '나 자신에서'의 나의 존재 사이의 적대적 관계를 지칭한다(p.255)." 나를 개념 지을 수 있는 세 가지의 형태가 존재하는 듯하다. 남들이 보는 나, 내가 아는 나, 또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별도의 나. 라캉의 개념을 통하여 본다면 남들이 보는 나는 '상징계' 속의 나, 내가 안다고 여기는 나 자신은 '상상계' 속의 나, 그리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순수한 그 자신인 '실재계'의 내가 존재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원초적 자아 혹은 실재의 자신을 잃어만 간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타자들에 대한 관계와는 별개인 '나 자신'을 찾을 수 있을까? 다음의 글에서 그 과정을 조금 엿볼 수 있다. "자살적인 포기 행위 속에서 주체가 반항적 포기의 제스처로 모든 것을 내걸 준비가 되어 있음을 표현하는 바로 그 순간, 따라서 도구적 이성의 싸구려 재주들을 일절 부인하는 그 순간, 타자가 개입한다. 내가 흥정을 하려고 하는 한, 내가 나의 자기희생을 행운을 빌면서 제안하고 마지막 순간에 은총이 개입하길 기대하는 한, 타자는 응답하지 않을 것이다.(p.322)" 

 

이와 같은 순간은 마치 자신이 벼랑 끝에 서 있는 것과 유사한데, 우리가 벼랑 끝으로 몰리게 됐을 때 마주하게 되는 무엇이 있다.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이성으로 할 수 없게 되는 일상의 지점이 생겼을 때 우리는 불현듯 그 무엇을 만나게 된다. 자신을 완전히 놓아버리게 되는 그 순간 '타자가 개입하게' 된다.

 

여기서 타자는 나와 다른 그 누군가라고 볼 수 있지만, 이는 매우 낯선 대상이다. 나와 법칙을 공유하지 않는 그 무엇이다. 기존에 만나보지 못했던 어떤 대상인 것이다(그 대상이 기독교에서는 절대자, 신으로 표현되지 않나 생각해 본다). 이 순간 살아서 나를 지배하고 있던 기존의 자아가 소멸하게 된다. 상징적인 내가 죽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마가복음 8장 35절의 말씀(‘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은 참으로 놀라워 보인다. 내 목숨을 구하는 길은 내 목숨을 잃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실재계의 나를 만나려면 상징계의 내가 무너져야 한다. 하지만 이 일은 자기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밖으로부터의 유입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낯선 것들은 나를 가로막는 그저 심심풀이 걸림돌이 아닐 것이다. 나를 발견케 하는 요소들이다. 그것들과 함께 지금 그 삶의 자리에서 머물러 있어야 한다. 

 

또한 우리의 삶은 늘 흥분되거나 보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감사보다는 더 나은 삶의 모습을 꿈꾸며 자신이 발 딛고 있는 바닥으로부터 멀어지길 바란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우리가 처한 곤궁에서 빠져나갈 길은 해결책처럼 보이는 것이 어떻게 사실은 문제의 일부인지를 확인(p.180)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처한 문제적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만든 해결책이 어쩌면 우리가 처한 현실을 문제 있게 만드는 원인일 수 있다는 말이다. 책에 나온 예를 들자면, 신자유주의적 반복지국가적 관점에서 볼 때 실업, 사회 안전, 범죄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민의 조세를 늘려 문제해결을 위한 예산의 지출을 충당한다는 태도가 오히려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를 야기시키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p.180). 이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러면 문제 그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사실 ‘문제’로 보이는 것은 실제로는 우리가 추구하는 바로 그 ‘문제가 없는’, ‘정상적인’ 상태의 필연적 구성성분(p.180)인 것이다. 문제없는 상태는 존재할 수 없다. 문제가 사라지는 순간, 우리가 되찾고자 했던 그것을 잃게 된다(p.180). 문제와 동시에 찾고자 했던 것도 함께 잃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대로 놓아두면 모든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것일까? 부정적인 요소와 함께 머물며 살아가는 방법 외엔 해결책이 없을까?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문 다는 것. 참 어렵고도 끝이 보이지 않는 고된 수행의 과정 그 자체일 것이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살롱(salon)에서 성경에 담긴 생명과 평화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with 청파교회

www.youtube.com

 

728x90
728x90

'Essa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 When I Am Among the Trees  (0) 2013.05.20
[에세이] 난(orchid)  (0) 2013.05.16
[에세이] "신 없이 신 앞에(ohne Gott vor Gott)"  (1) 2013.05.16
[에세이]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  (0) 2013.05.16
[에세이] 깨달음이란  (0) 2013.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