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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작가야의 일상 에세이

<삐딱하게 사랑보기> 1. 운명의 짝은 어디 있을까?

<삐딱하게 사랑보기> 1. 운명의 짝은 어디 있을까? 

 

[Lumix gx9 / 20mm]

얼마 전, 남녀 구분 없는 한 무리와 만나 신나는 토론을 했다. 물론 모임은 서로 안부를 묻는 아주 가벼운 모임으로 시작했지만 가벼움이 무거움으로 변하게 된 이유는 단 하나, ‘사랑’ 때문이었다. ‘사랑’ 이야기는 어떤 모임에도 빠지지 않는 ‘프로 참석러’지만 청춘들 사이에는 더욱 절실한 필수 아이템이다. 

 

사건의 발생은 아주 갑작스레 일어났다. 그날 모임의 참석자 중 두 명의 친구가 연애 중이었고 두 친구 모두 연애기간은 길지 않았다. 모임 내내 잠잠하던 한 친구가 연애의 지속성에 관한 어려움을 토로했는데, 그의 질문은 좀 뜬금없었다. “나 자신을 잘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나는 그 질문자의 연애사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는 내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때 상대에 대한 불만은 자주 토로했지만 자신의 모습은 돌아보기 힘들어했다. 그런데 방금 그가 던진 질문은 요즘 내 개인적인 고민과 맞닿아 있어서 그렇기도 했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그가 문제에 접근하는 접근 방식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왜 사람이 그렇다고 하지 않던가? 질문의 방식만 달라져도 이미 답의 절반은 찾은 거라고 말이다.

 

그런데 연애의 본질이 그 ‘시작’에 있기보다 ‘지속성’에 있다고 본다면 자신을 잘 돌보고 돌아보는 작업은 매우 중요하다. 이 문제의 중요성은 인생 전반에 얽혀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이 질문에 돌입하기 직전, 연애를 하고 있는 또 다른 친구 하나가 질문을 가로채고 이렇게 묻는다. “그냥 그 사람이 본인이랑 잘 안 맞는 거 아니에요?” 이건 또 무슨 소리지? 그는 이어서 연애의 승패는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가 가장 중요한 것 같다며 발언을 마무리한다. 좋다. 이 질문이 연애에 해당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고 오늘 이야기의 승패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될 것 같다. 

 

[Lumix gx9 / 20mm]

나는 여전히 연애 혹은 사랑에 있어 처음 자신의 고민을 털어 논 친구의 그 질문, ‘나 자신을 잘 사랑하는 방법’에 연애의 승패를 가르는 핵심이 있다고 본다. 물론 자신을 잘 사랑하는 방법은 곧 자신을 잘 이해하는 방법과 아주 닮아 있다. 하지만 처음의 질문을 잠시 내려놓고 두 번째 질문에 집중해도 좋은 이유는 결국 좋은 연애는 그 질문이 어떤 질문인건 좋은 답을 찾음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무리 가벼운 질문도 혹은 의미 없어 보이는 질문도 핵심으로 파고드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면 집중해 봄직하다. 그래. 나중에 받은 그 질문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자. 

 

이런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나랑 너무 잘 맞는 그런 운명의 짝은 있는 걸까? 표현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잘 알아주고 또 나의 필요를 미리 알고 챙겨주는 사람? 더구나 한결같기까지 한 사람은 과연 있는 걸까? 답은 ‘있다’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간과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요소가 있다. 그런 상대는 당장 내 주위에 없거나 아니면 이번 생(生)에는 만나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운명의 짝’은 ‘낭만적 연애’에만 등장하는 요소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낭만적 연애? 많은 연애의 대가(?)들은 이 ‘낭만성’을 버려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연애의 ‘낭만성’은 대체 어디서 온 걸까?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수용해 줄 운명의 짝에 대한 기대는 그저 한 개인이 갖고 있는 환상에 불과한 것일까? 질문이 무거운 가? 염려 붙들어 매시라. 이런 속 깊은 질문을 졸졸 따라가다 보면, 우리의 연애는 더 깊고 풍성해질 것이다. 몇몇의 연애 선배의 충고를 유쾌하게 따라가 보자. 

 

[Lumix gx9 / 20mm]

먼저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의 이야기를 따라 가보자. 그의 책 <사랑 예찬>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사랑은 진정 우연으로 인해 발생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차이에 대한 근본적인 경험을 만들어내는 지점들, 예컨대 차이의 관점을 시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유 안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바디우는 사랑은 우연에 의해 발생하며 사랑은 서로 간의 차이를 경험하는 아주 훌륭한 배움터라고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와 같아짐을 추구하기보다 서로 간의 차이에서 오는 그 차이를 중심으로 하나의 무대에 등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좀 더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자. 

 

“저는 사랑이 바로 이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성적 욕망과 그 시련들, 또는 아이의 탄생도 당연히 포함하지만, 마찬가지로 수많은 여타의 것들, 좀 더 솔직히 말해 차이의 관점에서 시련을 영위하는 것에 관여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에 시작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포함시키는 그런 계획입니다.” 철학자는 원래 말을 어렵게 하는 사람이겠거니 하며 방금 한 그의 말을 곱씹어보자. 연애를 하거나 결혼한 모든 사람은 상대와의 갈등을 경험한다. 빈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시련 없는 연인은 없을 것이다. 갈등이 없는 연인은 서로에게 무관심한 상태이거나 아니면 이 세상 커플은 아닐 것이다.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시련을 겪는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을 하며 겪는 이 시련을 두고 상대를 탓하거나 반대로 자기 자신을 자책하기 바쁘다. 그런데 이런 행동의 밑바닥을 가만히 살펴보면 상대와 같아지고자 하는 욕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주로 우리의 불만과 분노는 ‘왜 상대는 내 마음과 같지 않지?’에서 오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주로 그 ‘시작’에 집중돼 있다. 사랑에 관해 여러 편의 소설을 쓴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의 최근 책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시작은 흔히 여러 단계 중 하나일 뿐이라고 간주되지 않기 때문에 특별히 주목을 받는다. 낭만주의자들에게 시작은 사랑 전반의 모든 중요한 것들이 압축된 형태로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수많은 사랑 이야기에서 화자는 주인공들이 최초에 부딪히는 일련의 장애를 극복하고 나면 그들을 두루뭉술하게 만족스러운 미래로 넘기거나 아예 저세상으로 보내는 것 외에 할 게 없다. 보통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은 단지 사랑의 시작이다.” 물론 사랑의 시작도 중요하다. 그런데 아무리 사랑의 시작이 어렵다 해도 사랑의 지속에서 오는 시련보단 덜 무거울 것이다. 아무래도 짝사랑의 고통이 사랑하는 사람이 주는 배신보단 덜 고통스럽지 않겠는가? 연애를 시작하거나 결혼을 앞둔 친구를 만나면 ‘어디서 만났어?’, ‘어떻게 만났어?’가 가장 중요한 질문이듯, 우리가 부르는 ‘사랑’은 주로 그 ‘시작’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랑의 성공은 대상에 달려있나?’라는 질문이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우리는 정말 좋은 짝을 만나기만 한다면 다시 말해 하늘이 맺어준 운명의 짝을 만나기만 한다면 사랑의 지속은 저절로 되는 걸까? 이 질문에 답해본다면, 나의 대답은 ‘아니다’이다. 물론 (기준이 모호한) ‘좋은 사람’을 만나 좋은 사랑을 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 ‘좋은 사람’의 기준도 잘 살펴보길 바란다. 그 ‘좋은 사람’이 내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고 나에게 모든 걸 맞춰주는 그런 사람은 아닌가를 말이다. 그를 ‘연인’이라 부를 수 있을까? 다 커서 만난 새로운 ‘부모’ 아닐까?

 

[Lumix gx9 / 20mm]

‘사랑’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두 사람이 등장하는 무대이다. 차이를 발견하고 그 차이를 중심으로 양손을 마주 잡은 채 서로 인사 나누는 것이다. 결코 같아지기를 바라서도 안 되고 또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상대가 나와 같지 않음에 화가 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는 꽤 오랜 시간 그런 대우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 모든 걸 알아서 챙겨주던 부모는 우리에게 한없는 사랑을 베풀었다. 하지만 우리는 영원히 부모 곁에 머물 수 없는 존재이고 독립적인 사람으로 살아갈 때 주어지는 기쁨을 알고 있다. 성장해 가는 기쁨, 깊어지는 기쁨, 성숙해지는 기쁨 말이다. 

 

마지막으로 사랑을 여전히 대상의 문제로 치환하고 싶어 하는 낭만쟁이들이 있다면 자격 없는 필자가 감히 그들에게 조언을 해줄까 한다. 나와 맞는 사람이 나타나기까지 열심히 연애를 거듭해 보기 바란다. 여력이 된다면 결혼도 그러해보기 바란다. 횟수를 거듭해도 그런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 때 주어지는 깨달음을 기억하길 바란다. 만일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운명의 짝이 나타났다면 그들에겐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그간의 경험과 시간의 축적이 당신도 모르는 사이 스스로를 변화시켰을 수도 있음을 말이다. ‘백마 탄 왕자’와 ‘잠자는 숲 속의 공주’는 없다. 다만 ‘사랑’을 공부하고자 하는 ‘노력’만이 남았을 뿐이다.

 

 

이작가야의 말씀살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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