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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작가야의 일상 에세이

<삐딱하게 사랑보기> 2. 사랑은 하는 것일까, 하게 되는 것일까?

<삐딱하게 사랑보기> 2. 사랑은 하는 것일까, 하게 되는 것일까? 

 

 

즐겨듣는 팟캐스트(Potcast)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존경하는 선생님이 담임하고 계시는 ‘교회’의 팟캐스트고 다른 하나는 ‘이동진의 빨간책방’이다. 

 

사랑에 관해 논해야 할 이곳에 웬 팟캐스트 소개인가 싶겠지만 그 이유는 ‘이동진의 빨간책방’에 소개된 책 한권이 오늘 이야기의 중요한 흐름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이승우 작가가 쓴 <사랑의 생애>가 바로 그 것이다. 물론 책 홍보를 하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은 ‘왜 지금, 하필 너를 사랑하게 됐을까?’의 물음을 시작으로 기독교 신앙의 한 단면까지 다루고 있기에 꽤 중요한 책이라 느껴진다. 인문과 교양, 신앙을 다루는 이 매거진에 잘 어울리기로는 두말하면 잔소리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작용’을 심리나 정신의학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을 본다. 이 방식은 꽤 정확하기에 문제 해결에 많은 도움을 준다. 하지만 오늘은 어떤 분석적인 접근보다 ‘다가오고 사로잡히는 것’으로의 사랑 즉, ‘하게 되는 것으로서의 사랑’에 관해 생각해보려 한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사랑하게 되는 현상은 이성(理性) 혹은 사고(思考)를 넘어서는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첫 눈에 반한 사랑도 마찬가지고 처음에는 관심 없던 사람인데 여러 시간을 함께 보내다 사랑을 시작하게 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랑을 하게 되는 순간은 아주 갑작스레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 말이다. 물론 누군가 좋아지는 것이 두루뭉술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이게 뭐지? 왜 자꾸 그 사람이 신경 쓰이지?’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다 그 과정이 결정적인 순간에 묵직한 덩어리가 되어 사랑의 형태로 자리 잡힌다. 그러면 지금의 나는 이전의 나와 같은 내가 아니게 된다. 

 

“세상에 떠도는 말대로, 사랑하면 용감해지거나 너그러워지거나 치사해진다. 유치해지거나 우울해지거나 의젓해진다. 어떤 식으로든 어떤 변화인가가 생긴다. 몸 안에 사랑이 살기 시작한 이상 아무 변화도 생기지 않는 경우는 없다. 그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다른 사람과 다를 뿐 아니라 사랑하기 전의 자기와도 같지 않다. 같을 수 없다. 사랑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p.11) 

 

이 말에 공감을 하는가? 사랑한 기억이 너무 오래돼 이 이야기가 잘 믿어지지 않는다면 어서 사랑을 시작해보기 바란다. 혹은 이미 연애 중인데 이 말에 별 감흥이 없다면 둘 사이의 사랑을 다시 일깨우길 바란다. 어쨌든 홀로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거나 현재 서로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 말이 가진 무게를 알 것이다. 사랑이 우리 몸 안에 살기 시작한 이상 우리는 사랑을 안 하고 있는 사람이나 사랑하기 이전의 나와는 확실히 다른 내가 된다. 차분함을 유지해보려 하지만 늘 통제 밖만 어루만지기 일쑤다.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질문해 보자. 방금 이야기 나눈 것이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의 변화라고 한다면, 이 변화를 가져오게 될 대상을 스스로 선택한다는 것이 가능하긴 한 걸까?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가 사랑에 빠질 대상을 선택할 수 있는 걸까? 

 

<사랑의 생애>는 모든 이야기 속에 다음 문장이 새겨져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이다.” 이 문장과 대상을 선택하는 문제를 연관 시키는 것이 가능해 보인다. “사람이 사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사람이 빠질 사랑의 웅덩이가 대체 어디 있단 말인가!) 사랑이 사람 속으로 들어온다. 사랑이 들어와 사는 것이다. 숙주가 기생체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기생체가 숙주를 선택하는 이치이다. 물론 기생체의 선택을 유도하는, 기생체의 마음에 들 만한 숙주의 조건과 환경에 대해 언급할 수는 있다. 그렇더라도 그 선택이 숙주의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숙주는 자기 몸 안으로 기생체가 들어올 때는 물론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순간까지 어떤 주체적인 역할도 하지 않거나 못한다.” (p.10-11) 

 

결국 우리는 사랑하고 싶은 대상을 선택해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이고 사랑은 사랑을 하게 된 사람의 허락 없이 들어온 것이기에 마음대로 나가게 하지도 못한다. 물론 기생체의 마음에 들 만한 ‘숙주의 조건과 환경’에 대해 고려해 볼만도 하지만 이것은 사람이 가진 ‘매력’과도 같은 것이기에 정확히 정의해 낼 수 없다. 매력은 미지의 ‘어떤’ 것을 통해서만 오기 때문이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인 매력은 일종의 마술, 정신을 빼놓는 홀림과 같은 것이 아닌가. 누군가에게 홀린 사람은 자기를 홀린 것이 그 사람의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한다. 얼굴선, 몸매, 눈빛 같은 것에 실려 있는 어떤 것, 손에 잡히지 않는 어떤 기운이지, 얼굴선이나 몸매나 눈빛 자체는 아닌 것이다. 홀림 당한 사람은 이성적 판단을 할 줄 모른다. 아니, 홀림은 이성적 판단에 잡히지 않는다.” (p.72) 

 

이렇게 본다면 ‘사랑’은 동의가 필요하지 않은 ‘사건’이자 허락 없이 꾸어지는 ‘꿈’이다. 대체 ‘사랑’이 이런 것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선택과 자격을 논할 수 있단 말인가. 여러 고전 속 인물이나 지인들 그리고 이 필자의 경험을 두고 봤을 때, 사랑은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진다. 수능을 앞둔 그 긴박한 고3 말미에 연상의 교회 누나를 짝사랑했던 건 아무리 생각해도 내 선택이나 누군가의 강요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사랑’에 관한 정의는 우리를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한다. 우리가 특별한 자격이 있어서 신의 은총이나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첫 세대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할 수 없는 일, 그들이 할 거라고 기대할 수 없는 일들을 했다. (생략) 사도행전은 그 이유가 그들 안에 성령이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내 안에 사는 것은 내가 아니고,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 다른 존재가 우리의 내부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 존재를 따라 살지 않을 수 없다. (생략) 자격을 갖추고 있어서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와서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사랑이 들어오기 전에는 누구나 사랑할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사랑했거나 사랑하고 있는 어떤 사람도 사랑할 만한 자격을 가지고 있어서 사랑했거나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은총이나 구원이 그런 것처럼 사랑은 자격의 문제와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p.11-13) 

 

필자는 사람은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난다고 믿는다. 이것이 모든 삶의 목표보다 우위에 있다고 본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연인 간의 사랑, 성도들 혹은 이웃과의 사랑 등 어떤 형태의 사랑이든 사람은 사랑을 하고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다고 본다. 사랑을 지속하는 요소 가운데 의지적 차원이 있음을 모르진 않지만 그보다 앞서 생각해봐야 할 것은 ‘사랑’은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리듯 ‘하게 되고 마는 것’인 듯하다. 허락 없이 사람 속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작가야의 이중생활

문학과 여행 그리고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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